영어의 ‘trigger-happy'를 굳이 번역해 온다면 ‘방아쇠가 마렵다’고 할까? 총을 가지고 있으면 방아쇠를 당기고 싶어 손가락이 근질거린다는 말이다. 미국처럼 총이 흔하지 않은 사회라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주먹이나 칼을 쓰는 데도 이와 비슷한 어감의 표현이 없다. ‘주먹이 근질댄다’ 정도로는 ‘trigger-happy'보다 훨씬 약하다.
미국 사회는 가끔씩 방아쇠가 마려운 경관들 때문에 발칵 뒤집힌다. 연전 뉴욕에서 무기도 가지지 않은 한 흑인 청년이 자기 아파트 현관 앞에서 불심검문을 받다가 집중사격을 당해 죽은 일이 대표적인 예다. 서아프리카에서 이민 온 지 얼마 안 돼 말도 짧은 이 청년이 신분증을 꺼내려던 것인지, 호주머니에 손을 넣자 마구 갈겨 버린 것이다. 마흔 몇 발을 맞고 죽었다는 보도에는 경찰 폭력에 둔감해진 미국 시민들도 어처구니가 없었던 모양이다.
탈레반 정권이 저항다운 저항도 못해 보고 무너지는 것을 보며 뉴욕의 그 가엾은 청년이 생각난다. 탈레반이 뉴욕 테러의 범인이었다는 증거는 아직도 명확하지 않다. 설령 탈레반이 범인이었다 하더라도, 무고한 민간인의 피해가 뉴욕테러보다 엄청나게 컸다. 살인용의자 하나를 체포하기 위해 도시 하나를 통째로 폭격한 격이다. 미국이 세계경찰을 자임하지만 아프가니스탄 국민은 보호할 가치가 있는 시민으로 여기지 않은 셈이다.
방아쇠가 마려운 이 경관이 이번에는 이라크에 총구를 겨누고 있다. 그 뒤에 손볼 용의자로 ‘악의 축’이니 뭐니 하며 명단까지 작성해 놓고 있다. 이 경관은 용의자를 법정에 보낼 생각도 없다. 전에 자기가 과테말라에서 한 짓이 고발당했다고 해서 국제형사재판소의 권위를 부정한 그 경관이다. 이라크의 혐의를 유엔에서 조사하는 절차가 진행되고 있는데도 무조건 총질부터 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경찰뿐 아니라 어떤 공권력도 힘과 정당성이라는 두 가지 요건을 필요로 한다. 아무리 정당한 권력이라도 자신을 지키고 자신의 뜻을 관철할 힘을 가져야 한다. 또, 아무리 강한 권력이라도 보편적 원리에 입각한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하면 깡패나 군벌의 의미를 벗어날 수 없다. 이 정당성을 민주주의적 기준으로 확인할 수 있을 때 민주주의 사회가 성립하고, 인권의 기준으로 확인할 수 있을 때 인권사회가 성립하는 것이다.
미국은 유엔을 무시하고 국제형사재판소를 부정하는 등 국제질서를 무너뜨리면서까지 용의자들을 자기 손으로 체포하고 처단하겠다고 설치고 있다. 그 정당성을 우기는 명분은 단 하나, 테러리즘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것이 과연 가능하고 타당한 일일까?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정부, 대중, 또는 개인을 상대로 예측불가능한 폭력을 체계적으로 사용하는 행위”.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테러리즘’ 정의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론’에서 전쟁이란 “다른 수단을 추가한 정치적 관계의 연장”일 뿐이라고 정의했다. 오늘날 문제가 되고 있는 국제 테러리즘은 클라우제비츠가 말한 연장선 위에 있는 것이다. 예측불가능하다는 점, 즉 국가 단위의 선전포고가 없다는 점만이 일반 전쟁과 다른 점이다.
사람이 사는 세상에는 대립하는 의견이 없을 수 없다. 이 대립을 조정하는 것이 정치의 역할이지만, 일상적 정치로 처리되지 못하는 갈등이 있고, 이것이 쌓이면 전쟁이라는 과격한 수단을 통해 큰 폭의 조정을 겪는다. 국가 단위의 전쟁이라는 익숙한 수단이 의미를 잃게 된 유일 초강대국의 시대에는 이 갈등이 테러리즘의 형태로 불거져 나올 수밖에 없다.
미국은 테러리즘의 조직을 분쇄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알 카에다를 비롯한 이슬람권 테러리스트들은 이슬람세계의 자원이 미국 중심의 세계경제체제에 착취당하고 있다는 불만을 가지고 있으며 미국이 지원하는 이스라엘의 횡포에 무엇보다 분노하고 있다. 조직을 분쇄한다고 해도 이 불만과 분노는 해소되지 않는다. 자살테러를 지원하는 사람들이 줄을 잇게 만드는 이 불만과 분노가 있는 한 알 카에다 수준의 조직은 언제 어디서라도 만들어진다.
미국이 세계경찰로서 세계질서를 가능한 한 높은 수준으로 유지하기 위해 지금보다 더 큰 힘이 필요하지는 않지만 더 확실한 정당성이 필요하다. 세계경찰인 동시에 한 국가의 정부이므로 그 국가의 이익을 도외시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 국민 한 명 다쳤다고 해서 남의 나라 사람 열 명, 백 명이라도 쓸어버리겠다고 날뛰어서는 불만과 분노를 온 세계에 키우고 테러리즘이 넘쳐나는 세계를 만들게 될 것이다.
어틀랜틱 먼슬리 지 기자 로버트 카플란은 ‘무정부시대가 오는가’에서 ‘위험한 평화’를 이야기한다. 비극을 피하려면 비극에 대한 감각이 있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비극의 감각을 지우는 완벽한 평화란 불가능한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리고 이 불가능이 다행한 일이라고 말한다. 절대적 평화는 인간을 현재와 자기 자신에게만 집착하게 만들어 사회가 천박한 편안함 속에 썩어가게 만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도 평화를 바라는 세계인의 대다수는 미국이 무너지기보다 정신차리기를 바란다. 그래서 현세의 유토피아를 꿈꾸는 미국인들이 세상을 똑바로 바라보기 바란다. 군사력에만 의지해서는 테러리즘의 위협이 줄어들기는커녕 더 자라나게 되어 있다. 1인당 에너지 소비량을 세계 평균과 똑같이 하지는 않더라도 두 배 정도만 하면 안 되는가? 다섯 배는 너무 많다. 사람의 목숨 값도 세계 평균의 두 배 정도만 생각하면 안 되는가? 열 배는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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