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대전이 끝난 후 수많은 나라들이 독립했다. 지금 지구상의 독립국가 수는 2차대전 전에 비해 세 배가 넘는다.
패전국의 옛 식민지들이 바로 독립의 길을 걸은 것은 으레 그럴 만한 일이다. 그런데 승전국들의 식민지도 대전 후 20여년동안 대부분 독립하게 된 것은 어찌된 일이었을까. 전통적 개념의 식민지배를 중심으로 하는 제국주의 시대가 막을 내린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독립을 위한 자체 역량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세계적 추세에 떠밀려 독립한 나라들 중에는 독립이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 된 경우도 많다. 남아프리카와 짐바브웨는 소수 백인 위주의 인종주의 국가로 독립했다가 수십 년이 지난 뒤에야 다수 흑인에게 정권이 돌아가면서 심한 혼란을 지금까지도 겪고 있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종교에 따른 분리독립으로 지구 안보의 중대한 위협 요소로 남아 있다. 서아프리카 여러 나라 사람들은 식민지 시대보다 더 참혹한 무정부상태에 빠져 있고 르완다의 참극도 정리되지 않은 식민지 시대 유산에서 비롯된 것이다.
눈에 띄는 참상을 드러내지 않는 나라들 중에도 독립의 진정한 의미를 유감없이 실현한 나라들은 몇 되지 않는다. 대부분은 강대국에 군사적·경제적으로 심한 경우에는 완전히 예속되어 있고 덜한 경우에도 의존도가 강해 주권 발휘에 상당한 제약을 받고 있다. 어찌 보면 식민지 제도의 소멸이 패권주의의 해소가 아니라 변형을 보여준 데 그친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다.
수많은 나라들 틈에 끼어 독립을 얻었던 우리나라의 성적표는 어떤가?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어느 나라 못지않게 종속적인 관계를 미국에 대해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다. 70년대부터 경제주권을 꾸준히 키워 경제대국들 틈에 고개를 내밀게 되었다가 IMF 사태로 곤욕을 겪기는 했지만 신생국 중에서는 대체로 괜찮은 성적표를 꾸려 왔다. 그에 비해 군사주권은 아직도 형편없는 상태다. 냉전 해소 이후 많은 나라들이 군사적 예속성을 줄일 수 있었던 가운데 우리나라는 이례적으로 강한 예속성을 유지하고 있다.
“정치가 경제의 발목을 잡는다”는 말을 많이 한다. 이것이 국내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라면 국제 상황을 두고는 “군사가 경제의 발목을 잡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 FX 계획을 보라. 온 국민이 뼈빠지게 번 돈의 큰 덩어리가 한 입에 꿀떡 넘어간다. 그 돈이 왜 꼭 미국 회사 입에 들어가야 하는가도 문제지만, 더 근본적인 문제는 엄청나게 많은 인력과 예산을 국방에 투입해야 하는 상황에 있다.
인구와 경제규모에 걸맞지 않는, 무리한 국방 부담을 강요한 것이 ‘적화통일’의 위협이었다. ‘상기하자, 6·25!’ 6·25의 경험 때문에 이 위협은 현실감을 가지고 우리 사회를 압박했다. 그런데, 50년이 넘도록 똑같은 대외정책을 유지해 온 나라가 오늘의 지구 위에 또 있는가? 이스라엘 외에는 떠오르는 나라가 없다. 별로 부러운 나라가 아니다.
북한이 진정 이스라엘과 같은 호전성과 힘을 가진 나라라면 우리는 경제발전을 접어놓더라도, 인권과 복지를 접어놓더라도, 침략의 대비에 총력을 기울여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북한의 힘, 침략능력은 소련의 붕괴를 계기로 거의 해소되어 버린 것이 분명하다. 호전성에 대해서도 이제 다르게 봐야 할 증거가 너무나 많이 쌓여 있다. 안보에 관한 일인 만큼 최악에 대비하는 자세를 우리는 오랫동안 잘 지켜 왔고, 이제는 북한의 군사적 위협에 대해 냉전시대와는 다른 차원의 평가를 시도할 때가 되었다.
57년 전의 해방에는 ‘광복’을 위한 민족의 노력이 결실을 거둔 측면도 있었지만 국제정세에 떠밀려 미국과 소련이 바라는 형태로 국가를 건설한 측면도 있었다. 지금 우리가 전보다는 주체성을 가지고 민족의 장래를 내다보며 남북간의 대화를 벌일 수 있게 된 것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진정한 광복의 노력을 그 후 계속해 온 덕분이다.
주어진 광복이었지만 그 광복을 고맙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 후 우리의 노력이 결실을 맺은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섣부른 해방으로 인해 식민지 시대보다 더 참혹한 지경에 빠진 나라 백성들이 그 해방을 고맙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인가? 진정한 광복의 노력을 더 잘 펼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준 데 57년 전 광복의 의미가 있었다. 북쪽의 많은 손님들이 함께 하는 이번 광복절을 계기로 우리 사회가 광복의 완성을 바라볼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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