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권은 물론 유럽 등 국제사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공격 의지는 단호한 것 같다. 특히 미국 정부는 최근 중동지역의 최대 맹방인 사우디를 '미국의 적' '악의 핵'으로 규정하는 보고서를 작성하는 등 막무가내로 이라크 정벌을 고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미국의 이라크 공격에서 사우디는 2가지 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하나는 군사적 교두보이다. 지난 91년 걸프전때 대부분의 미군 전폭기와 전함들이 사우디 기지에서 발진했다.
또 하나는 국제 유가의 안정이다. 중동지역에서 전쟁이 발발하면 석유가격은 치솟을 수밖에 없다. 지난 90년 8월이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했을 당시 배럴당 15달러였던 유가는 2달후 40달러로 치솟은 바 있다.
현재도 미국의 이라크 공격 위협만으로 중동산 석유 가격은 배럴당 3-5달러나 올라 있는 상태다. 실제 전쟁이 일어나면 유가가 얼마나 치솟을지 알 수 없다. 그럴 때 세계 최대의 매장량을 가진 사우디가 석유공급을 늘리면 유가 쇼크는 얼마간 줄일 수 있다.
미국의 이라크 공격에 대한 사우디의 군사적 도움은 이미 물 건너간 것으로 보인다. 영국 인디펜던트의 8일자 보도에 따르면 사우디 정부는 7일 미국의 이라크 공격에 자국 영토를 사용하는 것을 거부할 것이라고 공식 발표했다.
인디펜던트 보도에 따르면 알 파이잘 사우디 외무장관은 "우리는 이라크에 대한 어떤 형태의 공격에도 반대한다. 그같은 공격이 필요치 않다고 믿으며 특히 이라크가 유엔결의를 이행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미국의 후세인 제거 계획에 대해 "이라크의 지도자 교체는 이라크 국민들이 결정할 문제"라고 말해 분명한 반대의사를 밝혔다.
물론 사우디의 군사협조 거부에 대해 나름대로 대비책을 마련하고 있다. 카타르 수도 도하 근처에 거대한 공군기지를 건설하고 있는 것이다. 알 우다이드 공군기지는 활주로 길이가 3천6백m가 넘으며 생화학공격에 대비한 방호벽까지 쌓여 있다. 최대 1백20대의 미.영 전투기가 이 공군기지에서 발진할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미-이라크 전쟁에 따른 국제유가 쇼크에는 어떻게 대비할 것인가. 사실 미국경제가 침체의 늪에 빠져있는 지금, 이 문제에 대한 대비는 대단히 중요하다. 미국이 전략비축석유 재고량의 증강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석유 재고량 증대만으로는 유가 쇼크를 감당할 수가 없다. 물론 사우디가 지난 70년대처럼 고의적으로 석유감산을 단행, 유가 인상을 노릴 가능성은 별로 높지 않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라크의 공격으로 사우디의 거대유전 중 하나라도 마비될 경우 국제 석유시장에는 엄청난 혼란이 초래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부시 행정부는 무얼 믿고 이라크 공격을 거침없이 밀어붙이고 있는 것일까. 믿는 구석이 한군데 있긴 하다. 그것은 바로 러시아다. 러시아가 국제유가의 급격한 상승에 완충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3월로 러시아는 사우디를 제치고 세계 최대 산유국의 자리에 다시 올라섰다. 구 소련은 냉전시절 하루 1천2백50만 배럴 생산(전세계 생산량의 20%)으로 세계 최대의 산유국이었다. 하지만 소련 붕괴 후 석유생산량도 급격히 감소, 지난 94년에는 전성기 때의 4분의 1 규모(3백16만 배럴)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지난 2000년부터 석유증산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 드디어 지난 3월 하루 7백28만 배럴 생산으로 세계 최대 산유국의 지위를 되찾은 것이다. 러시아의 급격한 석유증산으로 국제 유가가 하락하자 사우디를 비롯한 석유수출국기구(OPEC)는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더 이상의 유가하락을 막기 위해 석유 감산에 들어갔고 러시아는 그 틈새를 비집고 국제석유시장에서 점유율을 높이는 양상이 계속되고 있다.
러시아가 석유증산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까닭은 간단하다. 외화를 획득할 수 있는 최대 수출 품목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푸틴 대통령과 러시아 석유 올리가르히들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석유증산 및 대외 수출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러시아산 석유의 최대 고객은 유럽, 미국 등 서방국가들이다.
석유 수출을 핵심으로 한 러시아의 경제회생전략과 서방국가들의 에너지 수요는 세계경제는 물론 국제정치에서의 동맹관계에서도 중대한 변화를 초래하고 있다.
이미 지난 봄 미국의 에너지 전문가 에드워드 모스와 동유럽 투자전문가 제임스 리처드는 외교전문지 '포린어페어즈' 3/4월호에 기고한 '에너지 주도권을 둘러싼 전쟁'에서 "세계 최대의 석유수출국인 사우디와 러시아의 대결 결과는 세계경제에 근본적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예측한 바 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미국의 뉴욕타임스는 지난 4일 '석유의 현실정치(Realpolik of Oil)'라는 기사를 통해 석유가 러시아와 미국 등 서방과의 관계설정에 중대한 변화를 초래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러시아가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의 동진을 묵인하고, 9.11 사태 후 러시아의 뒷뜰인 중앙아시아로 미국이 적극 진출하는 것을 애써 못 본 체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석유'라는 것이다.
이 신문은 러시아 제2의 석유기업 유코를 위해 일하는 미국인 변호사 사라 캐리의 말을 인용, "러시아 석유산업은 서방의 기술자와 기술, 투자 등을 동원해 놀라운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지금 러시아에 필요한 것은 시장뿐이다"라고 전했다. 요컨대 엄청나게 늘어난 석유를 미국 등 서방측에 팔아먹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또 9.11사태 이후 OPEC 등은 유가 하락을 막기 위해 경제적 고통을 참아가며 석유감산을 계속하는 와중에 러시아만 유독 증산을 강행하며 시장질서를 유린하는데도 서방측은 내심 이를 반기 있다. 이 신문은 또 석유자원의 최후 보고라는 카스피해 연안 개발을 놓고 과거에는 미국과 러시아가 으르렁거렸지만 요즘은 공동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동업자처럼 관계가 변했다고 지적했다.
요컨대 과거의 군사강국 소련이 이제 와서는 서방측의 에너지 안보를 보장해주는 자원강국으로 변모하면서 서방측과의 밀월을 즐기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사우디는 아직도 세계 최대의 석유매장량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석유 채굴비용도 다른 어떤 유전보다도 저렴하기(배럴당 2달러, 신규 유전은 12-15달러) 때문에 미국이 쉽사리 사우디를 포기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게 에너지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전망이다.
그러나 세계적인 석유전문가 다니엘 예르긴이 지적했듯이 석유로 인해 러시아와 서방간의 관계는 중대한 변화를 겪고 있음이 분명하다. 사우디가 9.11사태 후 석유 증산으로 국제석유시장 안정에 기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러시아의 변화 폭은 이보다 훨씬 크다는 것이다.
예르긴에 따르면 러시아는 테러와의 전쟁에서 서방측의 안보 이익에 자신의 국익을 일치시키고 있으며 나토의 동진도 받아들였고 서방측 자본이 안심하고 러시아 석유기업에 투자할 수 있도록 법과 제도 등도 정비했다는 것이다.
뉴욕타임스 기사는 이렇게 결론을 맺고 있다.
"서방측에 에너지 안보를 제공함으로써 새로이 국력을 신장시켜 가는 러시아라는 개념은 러시아에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으며 적지 않은 이익을 가져다주고 있다. 또한 수년전 러시아의 장래에 대한 전망보다도 (서방측에) 덜 위협적인 것으로 보인다."
'외교에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없다. 오직 힘만이 있을 뿐이다'라는 격언을 상기시켜주는 사례라 하겠다. 참고로 뉴욕타임스 기사의 부제는 '에너지가 러시아에서 난다면 그것도 힘이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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