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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는 노자와 중요 지점에서 일치”

신영복 고전강독 <97> 제9강 장자(莊子)-2

장자에게 끼친 노자의 영향에 대하여는 상반된 견해가 있습니다. 노자의 영향이 절대적이라는 견해와 '장
자'와 '노자'는 각각 달리 발전되었고 다른 경로를 통하여 계승되어 왔다는 견해가 그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노자'보다는 오히려 '장자'를 노장철학의 주류로 봐야 한다는 주장도 없지 않습니다. '장자'에는 '노자'를 직접 인용한 부분이 없다는 것이지요.

'노자'와 '장자'가 다른 경로를 통하여 발전되어 왔다는 주장은 특히 그 서술형식이 판이하다는 점을 근거로 들고 있습니다. '노자'의 서술방식은 여러분들도 읽어서 아는 바와 같습니다. 사설(辭說)을 최소화하고 있는 엄숙주의(嚴肅主義)가 기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내용에 있어서도 최소한의 선언적 명제(命題)에 국한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하여 '장자'는 만연체(蔓衍體)의 이야기 구조를 기조로 하면서 허황하기 짝이 없는 가공(架空)과 전설(傳說) 그리고 해학(諧謔)과 풍자(諷刺)로 가득 차 있습니다. 두 책의 제1장이 그러한 차이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노자'의 제1장 기억하지요? "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입니다.

이에 비하여 '장자'의 첫 구절은 "북쪽 깊은 바다(北冥)에 물고기 한 마리가 살았는데, 그 이름을 곤(鯤)이라 하였다. 그 크기가 몇 천리인지 알 수가 없다. 이 물고기가 변하여 새가 되었는데 이름을 붕(鵬)이라 한다···" 로 시작됩니다.

이 첫 구절의 차이가 사실 노장(老莊)의 차이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노자는 도(道)의 존재성(存在性)을 전제합니다. 도(道)를 모든 유(有)의 근원적 존재로 상정하고 이 도(道)로 돌아갈 것(歸)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하여 장자는 도(道)를 무궁한 생성변화 그 자체로 파악하고 그 도와 함께 소요(逍遙)할 것을 주장하는 것이지요.

'노자'를 우리는 민초들의 정치학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하였지요. 그리고 그러한 관점에서 확인하였습니다만 '노자'에게는 그러한 사회성과 정치성이 분명하게 있는 것이지요. '장자'에는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러한 차이를 확대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장자'와 '노자'는 가장 중요한 점에서는 서로 일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치성은 노장(老莊)의 사상적 연관성이나 노장사상의 특징이라기보다는 크게는 동양적 세계관의 본질에 연유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계의 모든 사물과 현상들은 궁극적 실재(a basic oneness)의 구현(具現)으로 간주하는 것이지요. 이 점에 있어서 노자와 장자는 차이가 없음은 물론입니다.

그러나 '장자'는 노자의 상대주의(相對主義) 철학사상에 주목하고 이를 계승하지만 이를 심화해 가는 과정에서 노자로부터 결정적으로 멀어져 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개인주의적인 세계 즉 '정신의 자유'로 옮겨갔다는 것이지요.

그것을 도피(逃避)라고 할 수는 없지만 어떻든 노자의 관념화(觀念化)인 것만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루쉰(魯迅)의 '호루라기를 부는 장자'가 바로 장자의 그러한 면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호루라기를 부는 장자'는 '장자' '지락(至樂)'에서 소재를 취하여 장자의 상대주의 철학을 풍자한 희곡형식의 작품입니다. 이 자리에서 그 내용을 자세히 소개할 수는 없습니다만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5백년 전에 친척을 찾아가다가 도중에 옷을 모두 빼앗기고 피살된 한 시골 사람이 다시 부활하여 장자와 대화를 나눕니다. 간절하게 옷을 원하는 그 사람에게 장자는 그의 고답적인 철학을 펼칩니다.

"옷이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법. 옷이 있다면 그 역시 옳지만 옷이 없어도 그 역시 옳은 것이다. 새는 날개가 있고, 짐승은 털이 있다. 그러나 오이와 가지는 맨몸뚱이다. 이를 일러 '저 역시 옳기도 하고 그르기도 하며, 이 역시 옳기도 하고 그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야기의 전개는 위급해진 장자가 급히 호루라기를 꺼내어 미친 듯이 불어서 순경을 부릅니다. 현장에 도착한 순경은 옷이 없는 그 사람의 딱한 현실을 생각하여 장자가 옷을 하나 벗어서 사내가 치부만이라도 가리고 친척을 찾아갈 수 있게 하자고 제안합니다. 그러나 장자는 그러한 순경의 제안을 끝내 뿌리치고 순경의 도움을 받아 궁지를 벗어납니다.

이 이야기는 작품의 전편을 '발가벗겨진' 분위기로 이끌고 가면서 사내의 절실한 당면의 현실인 '옷'과 장자의 고답적인 사상인 '무시비관(無是非觀)'을 극적으로 대비시킴으로써 장자철학의 관념성을 드러냅니다.

이 작품의 정점은 장자가 미친 듯이 호루라기를 불어 그의 지지자인 순경을 부르고 순경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하는 대목입니다. 장자가 호루라기를 불다니 여러분도 상상이 가지 않지요?

그러나 나는 장자와 호루라기라는 그 극적 대비에서 바로 루쉰의 대가적 면모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첫째는 장자와 호루라기라는 극적 대비를 통하여 장자의 허구성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그 하나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장자의 무시비(無是非)란 결국 통치자에게 유리한 또 하나의 정치적 현실임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호루라기는 역시 권력(權力)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호루라기는 군사적 권력이지요.

이상과 같은 부정적 평가보다는 장자에 대한 긍정적 평가가 훨씬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특히 유묵(儒墨)의 천명(天命)사상이나 천지론(天志論)에 대한 장자의 비판입니다.

그것은 반체제적인 부정철학(否定哲學)일뿐만 아니라 장자사상은 궁극적으로 체제부정(體制否定)의 혁명론이며 해방론이라는 입장이 그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장자의 해방은 어디까지나 관념적 해방이며 주관적인 해방임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장자철학은 노자의 '모순대립(矛盾對立)'적 구조를 한층 심화하여 공간적, 시간적인 상호연관성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에서 사상적 영역이 새롭게 확장된 것은 인정된다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노자의 사회성과 실천성이 거세될 수밖에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통치자를 옹호하고 있다는 비판은 지나친 것이라 하더라도 그 점은 부정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장자'는 그 전편을 흐르는 유유자적하고 광활한 관점을 높이 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이론(理論)과 사상(思想)뿐만 아니라 모든 현실적 존재도 그것은 드높은 차원에서 조감(鳥瞰)되어야 할 대상입니다.

나 자신을 포함한 세상만물까지도 우물 속에 있는 작은 조각에 불과한 존재임은 물론입니다. 세상만사, 세상만물이 모두 부분(部分)이고 찰나(刹那)라는 것을 드러내 보이는 근본주의적 관점이 장자사상의 본령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 장자에 대한 올바른 독법(讀法)이 있다고 생각하지요. 공자와 맹자의 세계는 지극히 상식적인 세계입니다. 이 상식의 세계란 본질에 있어서 기존(旣存)의 논리입니다. 기존의 논리를 승인하는 구도입니다. 상당부분 복고적이기까지 하지요. 그것은 답습(踏襲)의 논리이며, 기득권(旣得權)의 논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장자는 이 상식적 세계와 세속적 가치를 일갈(一喝)하고 일소(一笑)하고 초월(超越)하고 있습니다. 초월적 시각은 매우 귀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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