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한가한 틈에 요즘 월드컵 때문에 떠오른 생각을 적어봅니다. 지난 5월 31일 세네갈전 패배로 나와 내 친구들은 기뻐 날뛰었지요. 반항심과 죄책감이 기묘하게 얽혀 빚어낸 감정이라고 할까요. 반항심이란 지난 월드컵 이래 우리 국민들 사이에 자라난 과도한 축구 열기와 자만심에 대한 것이고, 죄책감이란 아프리카를 비롯한 제3세계에 대한 우리 세대의 죄의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난 1일 프랑스 고등사회과학원 카트린 클레망텡 교수로부터 받은 이메일은 이렇게 시작했다. 54세의 클레망텡 교수가 말하는 ‘우리 세대’란 바로 68세대. 대학시절 유럽중심주의 등 전통을 뒤집는 혁명의 분위기에서 자라난 이 세대는 국가주의를 죄악시한다. ‘프랑스의 영광’에 대중이 열광하던 4년 전의 월드컵이 이들에게는 씁쓸한 기억일 뿐이다. 편지는 이어진다.
“나는 집에서 TV를 꺼놓고 일하고 있었지만 아파트 건물이 통째로 들썩이는 함성으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바로 알 수 있었지요. 우리 아파트에는 말리 출신 사람들이 많이 사는데, 골이 터진 순간부터 경기 끝까지 ‘세네갈, 세네갈!’ 합창이 이 집 저 집에서 이어졌습니다.”
인도 전문가로서 제3세계에 특히 관심이 많은 클레망텡 교수에게 옛 식민지의 종주국에 대한 승리는 유쾌한 사건이었음이 틀림없다. 그런데 이어지는 편지를 보면 기분좋게만 생각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뒤늦게 깨우친 모양이다.
“그런데 어제 르몽드 주말판을 보니까 내가 그린 그림이 영판 엉터리였더군요. ‘흰 프랑스에 대한 검은 아프리카의 복수’ 같은 것이 아니더라고요. 프랑스 대표팀의 주축이 아프리카 출신이라는 거야 모르는 사람이 없는 사실이죠(극우 정치인 르펜 씨가 얼마나 유감스러워 하는 일인지). 더 기막힌 사실은 세네갈 선수 전원이 프랑스에서 훈련을 받고 1년 내내 프랑스의 어느 팀에선가 뛰는 선수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상황을 내가 정확히 이해한 것이라면 지금의 세네갈팀 선수 몇 명이 다음번 프랑스팀에 뽑혀 오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환상적인 대우를 받으며. 세네갈팀이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군요. 상상했던 것보다도 더 한심한 상황입니다.”
골리앗에 대한 다윗의 승리를 그는 상상했던 것일까. 순수한 축구팬에게는 세네갈의 승리가 바로 다윗의 승리다. 프랑스 대표팀에 뽑히지 못한 선수들을 모아 만든 ‘잡초팀’이 ‘거목팀’을 쓰러뜨리다니, 얼마나 재미있는 이변인가. 정치에 물든 시각으로 보니 명색은 독립했어도 현실에서는 축구조차 식민지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상황이 마음에 걸리는 것이다.
아무튼 축구에 전혀 관심이 없던 클레망텡 교수가 월드컵에는 적지 않은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어제(7일) 받은 메일에는 우루과이와의 2차전 결과에 대한 소감이 들어 있었다.
“이번에도 관전은 하지 않았지만 옆방에 TV는 켜 두었지요. 뭔가 일이 터지면 이웃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 쫓아가 보려고요. (그 사람들도 아프리카팀 상대가 아니라면 프랑스팀을 열렬히 응원한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별 소리가 안 나더군요. ...... 용케 아직 탈락은 안했군요. 여기 축구기자들이 뭐라고 하는지 알아요? ‘프랑스는 아직도 자기 운명의 주인이다!’ 이렇게 재미있는 말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인 줄 몰랐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진짜 정치 걱정으로 넘어간다. 11일의 덴마크전에서 이기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그에 앞서 9일의 의회 1차선거에서 르펜이 이끄는 극우파를 봉쇄하는 것이 더 큰 일이라고 말한다. 만약 일요일에 극우파가 득세하고 화요일에 16강에서 탈락하는 재앙이 겹친다면 프랑스는 어떤 꼴이 될 것인가, 자기가 질문을 던져놓고는 “아마 전 국민이 집단적 신경쇠약에 걸리지 않을까?” 하고 스스로 답해 본다.
정치도 선진국이고 축구도 선진국인 프랑스지만 정치에 대한 축구의 영향력은 만만치 않다. 우리 정치에는 축구가 어떤 영향을 끼칠까. 화요일 폴란드전 때 길거리에 나타난 군중의 힘은 엄청난 것이었다. 6.10 이후 15년래 드러난 최고의 힘이라고 한다. 폴란드와 우리는 정치적으로 중립관계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은 승리의 기쁨으로 고르게 덮였다. 그런데 월요일 미국전은 어떤 감정을 우리 마음에 일으킬까? 우리 국민의 미국관에 지난 동계올림픽보다 더 큰 변화를 가져올 수도 있는 분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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