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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닌 학살의 진상

<英 인디펜던트 현장 르포> 사망자 절반이 민간인

다음 기사는 영국 신문 인디펜던트 25일자에 실린 '이스라엘군이 예닌에 진입했을 때 진정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의 주요 부분을 번역한 것이다. 저스틴 허글러와 필 리브스는 두 기자 최근 5일간의 예닌 난민캠프 현지 취재를 통해 이달초 예닌에서 벌어진 이스라엘측의 공격으로 발생한 참혹한 사태들에 대한 생생한 증언을 전하고 있다.

이들의 취재에 따르면 이제까지 신원이 확인된 50명의 팔레스타인 사망자중 거의 절반이 어린이나 노인 등 민간인들이었다고 한다. 이스라엘측은 지난 10일 예닌 전투가 끝난 후에도 5일간 기자와 구호단체 요원의 예닌 출입을 금지시키면서 학살에 관련된 증거를 없앤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인디펜던트의 두 기자가 취재한 팔레스타인 희생자들의 증언을 통해 이스라엘군의 만행의 실상을 알아본다. 편집자

***"도저히 믿지 못할 정도로 끔찍하구만"**

무너진 건물 잔해 아래 깔려 있는 시체들이 썩는 냄새로 예닌에는 악취가 진동하고 있었다. 그 냄새는 제 본분을 잃어버린 한 정부, 한 군대의 비행을 알려주는 악취이기도 했다.

"도저히 믿지 못할 정도로 끔찍하구만"

테르제 회드-라센 유엔 중동특사는 (학살의) 현장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예닌은 "이스라엘의 역사에 영원히 살아남을 오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신중하기로 소문난 윌리엄 번즈 미국 특사도 폐허의 현장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이례적으로 직설적인 말을 했다.

"예닌 난민캠프에서 일어난 일들이 수천명의 무고한 팔레스타인 양민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준 것은 분명하다"

이스라엘군은 이달초 예닌 난민캠프에 대한 공격은 팔레스타인 민병대 조직을 뿌리뽑기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들은 또 사망자의 대부분은 전투요원이었다고 말한다. 나아가 일반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노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인디펜던트의 현장 취재 결과, 이스라엘측의 주장과는 다른 측면들을 발견했다. 이스라엘군의 작전이 과격파조직에 결정적 타격을 입힌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현재까지 신원이 확인된 팔레스타인측 사망자의 거의 절반은 부녀자, 어린아이, 노인 등을 포함한 민간인들이었다.

이들은 이스라엘군의 무자비한 작전에 의해 죽어갔으며 이스라엘은 대대적인 선전전을 통해 이같은 사실들을 감추려 하고 있다.

***예닌, 팔레스타인 무력저항의 중심지**

예닌 난민캠프에 대한 공격은 4월 3일 이른 새벽에 시작됐다. 이보다 1주일전 예닌에서 서쪽으로 약 48km 떨어진 곳에 있는 이스라엘의 해안도시 네타나에서 하마스 소속 자살테러 요원이 유월절을 축하하기 위해 수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여있는 호텔 안으로 들어가 테러를 감행했다. 이스라엘의 중요한 명절에 일어난 이 자살테러로 28명이 사망했다. 2000년 9월 제2차 인티파다가 시작된 이후 최악의 테러사태였다.

아리엘 샤론은 오랫동안 책상 속에 잠자고 있던 계획을 실천에 옮기는 것으로 이 사태에 대응했다. 방벽작전(Operation Defensive Shield)은 1967년 제2차 중동전쟁 이후 이스라엘군에 의한 최대 군사작전으로 발전해 갔다. 예닌 난민캠프는 이스라엘군의 공격목표중 우선순위에 있었다. 인구 1만3천의 이 도시는 35년에 걸친 이스라엘군의 점령에 대한 팔레스타인측의 폭력적 저항의 중심지였다.

도시의 벽들은 하마스, 파타, 이슬라믹 지하드 등 과격단체의 슬로건을 적은 낙서들로 가득차 있다. 급진적 이슬람주의자들과 세속적 민족주의자들이 인티파다의 대의명분 아래 서로간의 차이를 묻고 긴밀하게 협력하고 있다. 이스라엘측에 따르면 예닌 난민캠프에서 배출한 자살테러 요원은 23명이나 된다. 이곳은 또한 사제폭탄 제조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곳에는 테러요원들뿐만 아니라 아티야 루멜레, 아파프 데스키, 아마드 함두니와 같은 평범한 시민들도 살고 있었다.

***팔레스타인 전사의 완강한 저항**

이스라엘군은 손쉬운 승리를 예상했다. 병력이나 무장면에서 압도적 우세를 보였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측은 탱크, 장갑차, 불도저, 코브라 헬리콥터, 그리고 미사일과 기관총 등으로 무장한 1천명의 보병-대부분 예비군이었다-을 이 지역에 투입했다. 팔레스타인측의 병력은 2백명에 불과했다. 아라파트의 보안병력과 함께 응전에 나선 팔레스타인 병력은 대부분 하마스, 알아크사, 지하드 등 민병대 소속으로 이들의 무기는 칼라시니코프 소총과 사제폭탄이 전부였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측의 저항은 이스라엘군을 경악케 만들었다. 예닌 진입 8일만에 마침내 진압할 수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이스라엘군이 치른 대가는 엄청났다. 23명이 전사했다. 이 가운데 13명은 단 한차례의 매복 공격에 당한 것이었다. 숫자 미상의 팔레스타인 민병대가 사망했다.

그리고 가로 세로 4백, 5백m(약 6만7천평)의 거대한 팔레스타인 거주지역이 완전히 파괴됐다. 이 광경이 TV에 방영될 경우 이스라엘(의 만행)에 대한 전세계의 분노가 어떠할지는 이스라엘 당국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이 그렇게 잘 싸울지는 우리는 생각도 못 했어요"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짐을 싸던 한 이스라엘 예비군은 이렇게 말했다.

***이스라엘군, 5일간 기자·구호요원의 예닌 접근을 봉쇄**

4월 10일 사실상 전투가 끝난 후 닷새가 지나도록 기자와 구호요원들은 현장에 들어갈 수 없었다. 이스라엘군이 전투현장을 치우면서 이들의 접근을 금지시켰기 때문이다.

인디펜던트는 5일간 난민캠프의 폐허 속에서 생존자들과 장시간의 자세한 인터뷰를 가졌다. 이 인터뷰에는 인권단체인 휴먼라이츠워치(Human Rights Watch)의 선임연구원 피터 부카르트가 동행했다. 상당수 인터뷰는 붕괴 직전의 건물 안, 이스라엘 불도저에 의해 한쪽 벽이 완전히 무너져 거리가 훤히 보이는 거실 등에서 행해졌다.

인터뷰 결과 드러난 전투의 실상은 끔찍한 것이었다. 현재까지 사망자 50명의 신원이 확인됐다. 인디펜던트는 이들의 명단을 갖고 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자랑스럽게 사망자들의 신원을 확인해 주었다. 이 사람은 하마스 전사, 이 사람은 이슬라믹 지하드, 그 사람은 알아크사 여단, 저 사람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의 경호대원, 또 이들은 민간인 하는 식으로. 이들의 확인에 따르면 절반 가까이가 민간인이었다.

민간인들은 우발적 총격에 의해서만 사망한 것은 아니었다.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일부 민간인들은 이스라엘군의 의도적 총격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불도저 막으려는 노인, 제복 입은 간호사에게도 총격**

사미 아부 스바는 65세된 자신의 아버지 모하메드 아부 스바가 어떻게 이스라엘군의 총격에 의해 사망했는가를 증언했다. 모하메드는 자신의 집을 향해 돌진하고 있는 불도저의 운전기사에게 자신의 집에는 사람들이 가득 있다고 경고했다. 길거리의 총격전을 피해 전 가족이 집안에 들어와 있었던 것이었다. 그의 경고로 불도저는 돌아갔다. 그러나 그 직후 모하메드는 자신이 서 있던 장소에서 가슴에 총알을 맞고 즉사했다.

이스라엘군은 또한 부상한 사람을 도우려던 팔레스타인 간호사를 총으로 쏘아 죽였다. 부상한 하니 루멜라는 19살의 민간인으로 자신의 집 현관에서 바깥을 내다보려다 총에 맞았다. 부근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루멜라의 비명을 들은 파드와 자마는 그를 도우러 갔다. 그녀의 언니 루파이다 다마즈도 함께 갔다. 자매중 동생 파드와는 사망했고 언니는 부상을 입었지만 목숨은 건졌다. 예닌 병원의 병상에서 루파이다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새벽 3시반쯤 엄청난 폭발음 때문에 잠에서 깨었어요. 우리 집 근처에서 한 청년이 부상을 입고 신음하는 소리가 들렸지요. 그래서 동생과 함께 응급치료라도 해주려고 그리로 갔지요. 바깥에는 팔레스타인 전사 몇 명이 있더군요. 그들에게 말했지요. 내 동생이 간호사이니까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부상당한 사람을 옮겨도 되겠냐고..."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스라엘군이 총을 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다리에 총을 맞고 쓰러졌지요. 동생이 나를 도우러 왔어요. 동생에게 말했죠. '나 총에 맞았어.' 동생은 '나도 총에 맞았어' 하더군요. 동생은 옆구리에 총을 맞았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군은 또다시 동생의 가슴을 향해 총을 쏘았습니다. 동생에게 어디를 맞았느냐고 물었습니다. 동생은 대답을 못하더군요. 이상한 신음소리를 내더니 세번인가 숨을 쉬려고 애를 썼습니다."

이스라엘군이 총격을 가했을 때, 파드와 자마는 흰 간호사 제복을 입고 있었다. 루파이다 다마즈는 이스라엘 군인들이 분명히 자신들을 볼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밝은 가로등 아래 서있었기 때문이다. 다마즈는 또 이스라엘 군인들이 매우 가까운 곳에 있었기 때문에 도와달라는 자신들의 외침을 못 들을 리가 없다고 말했다. 다마즈가 팔레스타인 병사들에게 도와달라고 고함을 치자 이스라엘군은 또다시 그녀를 향해 총격을 가했다. 두 번째 총알은 그녀의 다리에서 가슴으로 관통했다.

이윽고 다마즈를 병원으로 호송하기 위한 앰뷸런스의 진입이 허용됐다. 여동생은 이미 죽은 뒤였다. 부상자 호송을 위한 앰뷸런스의 진입이 허용된 것은 이 때가 마지막이었다. 하니 루멜라도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사망했다.

루멜라의 계모에게 그의 죽음은 비극의 시작에 불과했다. 다음 날 그의 남편 아티야-44세로 민간인이다- 역시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루멜라의 계모가 남편의 죽음을 말하는 동안 어린 자식들이 그녀 옆에 달라붙었다.

"도처에서 총 소리가 났어요. 오후 5시쯤 집 건물을 둘러보았지요. 남편에게 폭탄 2개가 집안에 들어와 있다고 말했어요. 남편이 살펴보러 갔어요. 2분쯤 후에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더군요. 그런데 목소리가 이상해요. 얘들하고 같이 갔는데 그때까지 남편은 서 있었습니다. 세상에, 남편이 그런 식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은 처음 봤습니다. '나 다쳤어' 이렇게 말하더니 입과 코에서 피를 흘리더군요. 얘들은 자지라지게 울기 시작했고 남편은 쓰러졌습니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봤지만 그는 대답을 못 하더군요"

"남편은 얘들을 하나하나 찬찬히 보더군요. 그리고는 나를 바라보았습니다. 갑자기 남편의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습니다. 그때서야 남편의 머리에 총알이 박혀있는 걸 보았습니다. 앰뷸런스를 부르려고 했지요. 고함을 지르며 누군든지 앰뷸런스를 불러달라고 했어요. 앰뷸런스 한 대가 왔지만 이스라엘군이 돌려 보냈습니다."

***부상자 호송 위한 앰뷸런스 진입도 금지**

4월 4일의 일이었다. 부상자 호송을 위한 앰뷸런스 진입마저도 봉쇄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웃의 도움을 요청하고 싶었지만 외부의 격렬한 총격전 때문에 루멜라 부인은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결국 부인은 스카프를 이어 만든 로프에 7살난 아들 모하메드를 묶어 창문을 통해 외부로 보낼 수 있었다. 그 1주일 동안 이들 가족은 집안에 갇혀 남편(아버지)의 시체와 함께 지낼 수밖에 없었다.

루멜라 집에서 몇 집 떨어진 집에서 우리는 아파프 데스키에 관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녀의 여동생 아이샤는 이스라엘군이 그녀의 집을 폭파시키면서 그녀를 인간방패로 사용했다고 말했다. 혹시 매복해 있을지도 모를 팔레스타인 저격수의 총격을 피해 그녀를 앞세워 집에 접근했던 것이다. 아이샤는 이스라엘문이 현관문을 폭파시킬 때 사용했던 지뢰의 잔해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커다란 원통형 금속이었다. 아파프의 가족은 앰뷸런스를 요청했으나 구급차는 들어오지 못했다.

자말 페예드(37)는 산 채로 건물 잔해에 깔려 목숨을 잃은 케이스다. 그의 삼촌 사에브에 따르면 자말은 정신·지체 장애자이며 걸을 수도 없다. 가족들은 총격전을 피해 그를 이 집 저 집으로 옮겼다. 이스라엘 불도저가 자말이 있는 집을 향해 돌진하는 것을 보고 사에브는 이를 막으려 불도저를 향해 뛰어 갔다. 그러나 그가 불도저에 가까이 가기도 전에 불도저는 집을 뭉개버리고 말았다.

***노인·부녀자를 인간방패로 사용**

이스라엘군이 상당수 민간인들을 소개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은 또한 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을 인간방패로 활용했다. 72세의 노인 라제 타와프시는 이스라엘 병사들이 자신의 손을 묶은 다음 가택수색때 앞장을 세웠다고 말했다. 그가 손을 묶이기 전, 타와프시는 이스라엘군이 80대의 노인 아마드 함두니를 쏘아 죽이는 것을 목격했다. 함두니는 총격전을 피해 타와프시 집에 와있었다. 이스라엘군들은 폭탄으로 타와프시 집의 현관을 부순 뒤 들이닥쳤는데 등이 굽은 함두니를, 폭탄을 몸에 매단 테러 요원으로 착각했는지 즉각 총격을 가했다.

이스라엘의 학살에는 어린이들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14살 어린이 파리스 제벤은 이스라엘군에 의해 비정하게 살해당했다. 파리스의 사망은 전투 도중 발생한 사고도 아니었다. 몇시간 가량 통행금지가 해제됐을 동안 파리스는 먹을 것을 사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4월 11일이었다. 파리스가 죽었을 때 그의 옆에는 8살 난 동생 압델 라흐만이 있었다. 압델은 불안한 듯, 자신의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며 당시의 상활을 얘기했다.

"나하고 형, 그리고 또 다른 아이하고 아줌마 몇 명이 있었어요. 형이 나더러 집에 가라고 했지만 난 가지 않았어요. 우리는 탱크 앞을 걸어가고 있었어요. 근데 탱크 앞이 우리를 향해 돌고 있잖아요. 겁이 났어요. 형이 또 다시 나더러 집에 가라고 했지만 난 안 갔어요. 탱크가 총을 쏘기 시작했고 나하고 형하고 얘들은 뛰기 시작했어요. 나는 넘어졌는데 형도 넘어지는 걸 봤어요. 나는 그냥 '형이 넘어졌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근데 땅에 피가 보이는 거예요. 나는 형한테 뛰어 갔어요. 아줌마 둘이 와서 형을 차에 태웠어요."

압델 라흐만은 그 사건이 일어난 장소로 우리를 안내했다. 우리는 당시 상황을 재연해 보았다. 탱크는 약 80m 떨어진 곳에 있었다. 소년은 기관총이 딱 한번 발사됐을 뿐이라고 말했다. 압델은 입으로 그 소리를 시늉냈다. 탱크 안의 병사들은 아무런 경고도 하지 않았다고 소년은 말했다. 또 파리스를 쓰러뜨린 후에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15살의 모하메드 하와신은 캠프를 걸어 지나가다가 총에 맞아 죽었다. 그의 죽음을 목격한 알리야 주베이디는 이렇게 말했다. 당시 그녀는 이스라엘군과의 전투에서 사망한 아들 지아드의 시신을 찾기 위해 병원에 가는 길이었다. 지아드는 알아크사 여단 소속 병사였다. 모하메드와 함께 걸어가던 중 주베이디는 총소리를 들었다.

"그 아이는 문 옆에 앉아 있었어요. 나는 '총알을 피해 숨었구나' 하고 생각했죠. 그런에 그 얘가 '도와주세요' 하는 거예요.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 아이는 얼굴에 총을 맞았어요."

***휠체어 탄 장애인을 사살하고 탱크로 뭉개**

난민캠프 주변의 황폐한 거리에서 우리는 찌그러진 휠체어의 잔해를 보았다. 휠체어는 종이처럼 완전히 찌그러져 있었다. 잔해의 가운데에는 부서진 백기가 꽂혀 있었다. 두라 하산은 자신의 친구 케말 주가예르가 휠체어를 탄 채 이스라엘군의 총격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그후 이스라엘 탱크가 시신을 짓뭉개고 지나간 것이 분명했다. 나중에 하산은 다리 하나와 두 팔이 사라진 동체를 발견했던 것이다. 그의 얼굴은 두 쪽으로 갈라져 있었다.

58세의 주가예르는 첫 번째 인티파다(1987년)에서 총상을 입어 걷지도 못하고 일도 하지 못했다. 하산은 친구가 혼자 살았던 초라한 단칸방을 보여주었다. 방에는 지저분한 매트리스 하나만 달랑 놓여져 있었다. 주가예르는 휠체어를 타고 매일 하산이 일하는 주유소에 놀러 왔다. 외로웠던 것이다. 하산은 세차 일을 했었다. 주가예르의 휠체어에 백기를 꽂은 것도 하산이었다.

"오후 4시경 주가예르를 거리에까지 밀어다 주었죠."라고 하산은 말했다. "얼마 후에 탱크가 지나가더군요, 4댄가 5대였죠. 총소리가 들리더군요. 주가예르더러 길 가운데에서 비켜나라고 경고사격을 하나 보다 하고 생각했죠" 다음 날 아침이 돼서야 하산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알 수 있었다. 길가의 찌그러진 휠체어와, 그보다 한참 떨어진 풀밭에서 주가예르의 처참한 시신을 발견했던 것이다.

이상과 같은 증언들을 인디펜던트는 수없이 많이 갖고 있다. 지면 제약상 다 옮기지 못할 뿐이다. 독자적인 보고서 작성을 위해 우리와 동행한 휴먼라이츠워치의 피터 부카르트는 이들 증언의 숫자만으로도 믿을 만하다고 말했다.

"우리는 난민캠프에서 광범위한 인터뷰를 가졌다. 수십개에 이르는 목격자들의 증언은 캠프에서 벌어진 잔혹행위의 유형과 범위를 묘사하는 데 있어 서로간에 완벽한 일관성을 보이고 있다"고 부카르트는 말했다.

부카르트는 르완다, 코소보, 체첸 등 십수곳의 전쟁지역에서 인권침해를 조사해온 베테랑 요원이다.

"반복되는 목격자들의 증언은 잔혹행위에 대해 유사함을 보이고 있다. 살해당한 사람중 상당수가 어린 아이, 또는 노인들이었다. 젊은 사람들의 경우에도 민간인 사망자가 있었다. 팔레스타인 사회에서는 가족중 일원이 전투요원이라는 사실을 매우 솔직하게 말한다. 그들은 집안의 누군가가 이른바 '순교자'가 된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가족중 사망한 젊은 사람에 대해 민간인이었다고 주장한다면 그 말은 그대로 믿어도 좋다."

예닌에서 벌어진 일들은 이스라엘 내에서는 거의 아무런 관심도 받지 않은 채 스쳐 지나가고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이스라엘과 외부세계와의 관계에 심각한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 지금 유럽에서는 샤론이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팔레스타인의 국가건설의 기회를 원천봉쇄하려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점점 커져가고 있다. 특히 이스라엘측이 교육, 보건 등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의 핵심적인 기구들을 고의적으로 파괴한 것과 관련해 이같은 의심은 더욱 커져가고 있다.

이스라엘 정부는 세계가 예닌 학살의 진상을 알게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하지만 앰네스티 인터내셔널은 최근 발표된 보고서의 잠정 결론을 통해 즉결재판을 포함, 심각한 인권침해의 증거가 발견되었다면서 이스라엘에 대한 전범 조사를 촉구했다.

이 기사가 씌어지고 있는 동안 이스라엘은 예닌 학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한 유엔 안보리의 조사작업에 대한 협조를 철회했다. 예닌에서 일어난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나면 이스라엘의 이같은 반응도 결코 놀라운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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