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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의 중동 평화 전망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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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의 중동 평화 전망 <5>

미, '팔' 국가주권 결코 인정 안 해

이런 점을 고려해 보면, 지난 30년동안 미국의 중동정책을 예측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미 정책의 기본적인 요인은 교섭거부주의(rejectionism)의 극단적인 형태였으며 지금도 그렇습니다. 여기서 제가 이 용어를 다소 새로운 의미로 정의하여 사용하고 있음을 밝혀야만 하겠군요. 원래 “거부주의자”(rejectionist)라는 용어는 전통적으로 서방 담론에서 순전히 인종차별적인 의미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이 용어는 유태인의 국가주권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이 용어를 인종차별주의적인 의미로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 용어는 팔레스타인인들의 국가주권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일컫습니다. 따라서 팔레스타인인들의 주권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거부주의자들입니다. 미국은 지난 30년 동안 비인종차별주의적인 의미에서. 거부주의자들 진영을 이끌어왔습니다. 사실은 미국이 이끌어온 거부주의자 진영에서 미국만이 유일한 주요 멤버였으며, 지금도 그렇습니다.

***미, 팔레스타인의 국가주권 거부**

1967년 전쟁은 아주 위험했습니다. 거의 핵전쟁 국면까지 갔었으니깐요. 그래서 외교적 해결책이 있어야 한다는 합의를 보게 되었습니다. 주로 미국과 다른 열강에 의해서 제시된 외교적 해결책이 바로 UN 결의 242조였습니다. 주의할 것은 바로 UN 결의 242조가 거부주의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결의는 이스라엘이 국제적으로 인정된 국경 내에서 평화와 안전을 누리며 살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하라고 요구하고 있지만, 팔레스타인의 권리에 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난민 문제에 대한 아주 모호한 언급만 있을 뿐입니다. UN 결의 242조는 그 지역에 현존하는 국가들 사이에 합의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그 합의란 이스라엘이 점령 지역에서 완전히 철수하는 대가로 완전한 평화를 깃들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UN 결의 242조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미국의 공식적인 정책은 이랬습니다. 철수에는 국경에 대한 사소한, 상호적인 조정을 포함할 수 있다. 아마도 여기 저기 구불구불한 국경선을 쫙 펴는, 그런 정도겠지요. 그러나 그게 전부였습니다. 물론 점령지역에의 정착이나 개발은 금지되었습니다. 이 결의에 미국측의 해석이 제네바 협정 위반이라는 사실에는 논쟁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세계 여론은 만장일치를 보았습니다. 이스라엘과 미국만 빼고 말입니다. 이 문제에 관해서 미국은, 나치에 의해서 자행된 종류의 범죄를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국제법과 협약을 반대한다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표명하기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미국은 이 결의안에 관한 투표에서 기권을 했습니다. 미국의 기권과 이스라엘의 반대를 제외하면 이 결의안은 만장일치로 유엔을 통과했습니다.

미국은 1971년까지 UN 결의 242조의 이러한 해석을 고집했습니다. 1971년에, 매우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사다트 대통령이 이집트에서 권력을 잡았고 UN 결의 242조에 의한, 즉 미국측 해석에 의한 해결책을 제시했습니다. 이스라엘측의 완전한 철수와 완전한 평화를 맞바꾸자는 것이죠. 사실 그의 입장은 이보다 훨씬 더 적극적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영토에서만 철수해도 완전한 평화를 보장하겠다는 것이었죠. 골란 고원이나 여타 이스라엘 점령 지역에 대해서는 ‘나 몰라라’였습니다. 물론 그의 제안 역시 완전히 거부주의적이었습니다. 팔레스타인인들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으니까요.

UN 결의 242조를 거부할 것인지 받아들일 것인지에 대해 미국은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사다트의 제안은, 이스라엘이 말했듯이, “진정한 평화안”이라고 여겨졌으며, 당시 이스라엘 주미 대사였던 이츠하크 라빈이 그의 회고록에서 말한 것처럼 “평화로의 이정표”였습니다.

***“협상은 있을 수 없다. 단지 힘만이 있을 뿐이다”**

미국은 결정을 내려야 했습니다. 미국 내에 의견대립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헨리 키신저가 이겼고, 미국은 키신저의 “교착” 정책을 채택했습니다. “협상은 있을 수 없다. 단지 힘만이 있을 뿐이다” 이 정책을 채택함으로써 1971년 2월에 미국은 효과적으로 UN 결의 242조를 거부하면서 철수란 “미국과 이스라엘이 결정한 범위 내에서의 철수”를 의미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미국의 세계 통치하에 놓여 있는 UN 결의 242조가 1971년 이래 갖는 실질적 의미였습니다.

공식적으로 미국은 클린턴 행정부 때까지 UN 결의 242조를 지지했습니다. 클린턴은 미국의 결의들이 효력이 없다고 천명한 최초의 대통령입니다. 하지만 그때까지 적어도 말로는 미국은 UN 결의 242조를 수락했었습니다. 말뿐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실제로는 미국은 키신저의 해석을 따랐습니다. 미국의 모든 대통령에게 UN 결의 242조가 실질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이스라엘과 미국의 결정에 의한 부분적인 철군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카터는 미국이 UN 결의 242조를 지지하며 앞으로도 그러리라고 재천명했습니다만 한편으로는 미국의 전체 대외 원조 중 절반을 이스라엘에 쏟아 부었고 (캠프 데이비드 합의의 일환으로), 이는 곧 이스라엘이 점령 지역을 계속해서 이스라엘에 통합해 나갈 수 있도록 하면서 동시에 UN 결의 242조의 의미있는 이행을 차단했습니다(게다가 북쪽의 인접 국가까지 공격을 했지요). 예견했던 그대로 말입니다.

***평화를 거부해 온 '평화과정'**

국제체제에 대한 거부주의적 태도는 1970년대 중반 경에 변했습니다. 1970년대 중반에 이르면 매우 폭넓은 국제적 합의가, 실제로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더불어 팔레스타인인에게도 국가주권을 부여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안전보장이사회는 새로운 결의안에 대해서 논의하였는데, 여기에는 UN 결의 242조가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스라엘이 철수할 지역에서 팔레스타인 국가를 세울 수 있다는 조항을 첨가하였습니다. 미국은 이 안에 거부권을 행사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이 결의안도 역사로부터 거부를 당했습니다. 이 사실은 역사책을 뒤져보더라고 거의 찾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1971년 2월의 사건도 예외가 아닙니다. 열심히 찾아보면 누군가가 이 사실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례들은 사실상 역사적 기억에서 제거되었었죠.

미국의 거부권 행사는 계속됐습니다. 이에 대한 기록을 전부 다 훑어보지는 않겠습니다. 1980년에도 미국은 비슷한 안보리 결의안에 거부권을 행사했습니다. 비슷한 유엔총회 결의안에도 해마다 거부권을 행사했습니다. 대개는 미국 단독으로 했지만(물론 이스라엘은 행동을 함께 했죠), 종종 다른 친미 국가들과 더불어서 그랬죠. 유엔 총회 결의안에 대한 미국의 일방적 거부권 행사는 사실상 이중 거부권이었습니다. 그 결의안은 효력을 상실했고, 역사에서조차 거부되어서 기록조차 남지 않았으니까요. 미국은 다른 협상 노력을 차단했습니다. 유럽과, 아랍국가들과, 팔레스타인해방기구 등 그 어떤 다른 주체라도 말입니다. 이런 미국의 행태는 걸프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평화적이며 외교적인 해결책을 방해하는 이 같은 과정을 일컫는 말이 있는데, 오늘날과 같은 오웰의 시대에 여러분들도 그게 뭔지 짐작이 가죠. 바로 “평화 과정”(peace process)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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