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아프간 마자르 이 샤리프 부근에서 일어난 탈레반 포로 ‘학살’ 사건은 그 엄청난 규모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 진상조차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있다. 사건 직후 메리 로빈슨 유엔 고등판무관과 앰네스티 등이 심각한 우려와 함께 진상규명 등을 촉구했으나 미국, 영국 등 당사국들은 ‘포로들의 무장 폭동에 대한 정당한 진압’이라며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있다.
특히 미국언론은 이 사건으로 인한 CIA 요원 1명의 죽음만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있을 뿐, 약 6백명으로 추정되는 탈레반 포로의 죽음에 대해서는 제대로 언급조차 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반면 일부 서방 언론인들은 이번 사건은 미·영의 ‘전쟁범죄’라며 서방측의 이성적 대응을 촉구하고 있다.
영국의 타임스와 가디언, 그리고 미국의 AP통신 등의 보도를 중심으로 이제까지 드러난 이번 사건의 진상을 재구성하는 동시에 이번 사건에 대한 서방언론의 상반된 시각을 게재한다. 편집자
마자르 이 샤리프 부근에 있는 칼라이 장히 요새에서 탈레반 포로의 폭동이 일어난 것은 지난 11월 25일 오전 11시 20분경이었다. 이 포로들은 북부 도시 쿤두즈에서 북부동맹군에 저항하다 항복한 탈레반 병사중 아프간 출신을 제외한 외국인 병사-파키스탄, 체첸, 아랍인 등-8백명으로 이들은, 항복 직후 이 요새로 후송됐다. 수천명으로 추정되는 아프간 출신 탈레반들은 고향으로의 안전 귀향이 보장돼 풀려났다.
영국의 타임스가 폭동 현장의 한 목격자를 인용, 보도한 바에 따르면(11월 28일) 폭동은 미 CIA 요원 2명이 탈레반 포로 수십명을 상대로 테러조직 알카에다에 대한 조사를 벌이면서 시작됐다. 타임스는 “단 2명의 요원이 수십명의 탈레반을 상대로 심문을 벌인 이유가 무능, 과신, 또는 의무감 때문인지는 미스테리”라고 말했다.
현장에서 서로를 마이클과 데이비드로 지칭했던 2명의 CIA 요원은 모두 아프간 복장에 회색 수염을 길렀으며 페르시아러를 썼다. 이 가운데 마이클이 한 탈레반 병사에게 아프간전쟁에 참전한 이유를 묻자 이 병사는 “너희들을 죽이러 왔다”며 마이클에게 달려들었다. 마이클은 이 병사를 권총으로 쏴 죽이고 또 다른 탈레반 병사 3명을 더 죽였다. 그러나 목격자에 따르면 마이클 역시 “탈레반들에게 맞고 밟히고 물려 뜯겨 (현장에서) 죽었다.”(마이클의 신원은 후에 CIA의 군사작전 담당 간부인 쟈니 마이크 스팬으로 밝혀졌다)
포로들의 완강한 저항에 놀란 마이클의 동료 데이비드는 최소한 1명 이상의 탈레반을 사살한 뒤 요새 본부로 도망쳐 위성전화로 우즈벡 주재 미 대사관으로 구조를 요청했다. “마이클이 죽은 것 같다. 우리는 상황 통제력을 잃었다. 헬리콥터와 병력을 보내달라”는 내용이었다. 이때가 11월 25일 오전 11시 20분이었다.
CIA 요원 데이비드에 따르면 수백명의 탈레반 포로들은 현장에 있던 북부동맹군 간수 20명을 살해한 뒤 그들의 무기를 빼앗았다. 또 무기고를 덮쳐 소총 30정과 탱크 요격 로켓포 2정과 수류탄 투척기 2대 등을 확보했다. 한편 데이비드의 구조 요청을 받은 미국측은 약 3시간 후에 미국과 영국의 특수군 병력을 랜드로버에 태워 현장에 급파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미군 전투기와 무장 헬기 등을 동원한 대규모 공습과 함께 포로 소탕전이 벌어졌다.
한 보도에 따르면 미군의 공습은 폭동이 진압된 11월 27일까지 사흘간 약 30여차례 계속됐으며 포로들의 사망은 대부분 공습에 의한 것이었다고 한다. 현장에 있던 미·영 특수부대 요원들이 포로들의 위치를 정확히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이미 26일 밤 생존 포로의 숫자는 1백여명 정도로 줄었으며 27일에는 폭동진압이 완료됐다.(이후 미 뉴스위크의 보도에 따르면 생존 포로의 숫자는 86명으로 알려졌다)
상황이 종료된 후 폭동과 관련하여 제기된 최초의 의문은 포로들의 두 손이 등뒤로 묶여져있었다는 점이었다. AP통신의 버트 허만 기자는 11월 28일 폭동 진압 직후 현장에 있었던 AP 사진기자의 말을 빌어 사망한 포로 약 50명의 두 손이 검은 천으로 묶여져 있었다고 보도했다. 또 북부동맹군 병사들이 사망 포로들의 손에 묶인 천을 가위 등으로 잘라내고 있었다고 전했다. 또 다른 보도에 따르면 폭동 이전, 약 2백50명의 포로들이 두 손을 묶였다고 한다. 이는 전쟁포로에 대한 인도적 처우가 아닐뿐더러 포로들에게 즉결처형의 공포를 심어주었을지도 모른다는 지적이다.
또 탈레반 포로들을 쿤두즈에서 마자르 이 샤리프로 후송하면서 이들에 대한 무기 압수 수색이 허술했다는 지적도 있다. 특히 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칼라이 장히 요새 도착 당시 탈레반 포로를 태운 트럭중 최소한 2대에 대해서는 무기 수색을 하지 않았다. 실수였는지, 고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만일 고의였다면 무장 폭동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느냐는 의혹도 살 만한 대목이다.
실제로 포로들이 도착한 24일 밤 체체 출신의 탈레반 병사가 북부동맹군에 접근, 수류탄을 터뜨림으로써 그 자신은 물론 북부동맹군 지휘관 2명과 간수 수명의 목숨을 빼앗았다. 탈레반 포로들을 관장했던 북부동맹군의 압둘 도스툼 장군은 포로들에 대한 비인도적 처사를 부인하면서 포로들이 먼저 자신들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기 때문에 진압이 불가피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에 주재하면서 미군의 대변인 역할을 하고 있는 켄톤 케이스는 “수많은 사망자가 발생한 데 유감을 표명한다”고 말하면서도 미군의 공습은 “학살이나 보복이 아니며” 포로들의 무장 폭동에 대한 “정당한 전투행위”였다고 말했다. 진압에 참여했던 영국의 한 관리도 “수류탄과 소총 등으로 무장한 포로들의 봉기에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며 진압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앰네스티 인터내셔널을 비롯한 국제 인권단체들은 소총 몇십자루로 무장한 포로들의 봉기에 전투기와 무장 헬기 등을 동원한 진압 조치가 과연 적절한 조치였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과잉 진압이 아니었느냐는 것이다.
또 쿤두즈 항복 당시 아프간 출신 탈레반의 안전 귀향은 보장하면서 외국인 출신 탈레반에 대해서는 엄격한 조치를 고집했던 미국의 의도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측도 있다. 즉 이들이 본국으로 돌아갈 경우, 반미 감정의 확산을 우려한 조치가 아니었느냐는 것이다. 도날드 럼스펠드 미 국무장관은 항복 협상 초기부터 외국인 출신 탈레반은 “전투현장에서 사살되든가, 아니면 포로가 되든가 둘중의 하나만 선택할 수 있다”는 강경한 입장을 고수했다.
탈레반 포로에 대한 ‘학살’ 행위는 마자르 이 샤리프에서만 일어난 것은 아니다. 로이터 통신 보도에 따르면 아프간 남부에서도 항복 탈레반 병사 1백60명이 미군이 보는 앞에서 북부동맹군에 의해 즉결 처형 당했다.
또 미 시사주간지 타임은 지난 11월 12일 북부동맹군에 의한 마자르 이 샤리프 함락 직후 약 9백명의 탈레반이 북부동맹의 무차별 공격을 받아 파키스탄 출신 대학생 등을 포함, 약 4백명이 사망하고 3백25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2백여명의 행방은 알 수 없는 상태라고 보도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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