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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팅턴을 통해 보는 미국의 세계전략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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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팅턴을 통해 보는 미국의 세계전략 <2>

"이젠 국가안보가 인권에 우선"

1927년 뉴욕시에서 태어난 새뮤얼 헌팅턴은 퀸즈의 아스토리아 섹션 및 브롱크스의 중산층 구역에서 성장했다. 그는 호텔업 관련 잡지를 내는 리처드 토마스 헌팅턴과 단편소설 작가인 도로시 샌본 필립스의 무녀독남이었다. 외할아버지 존 샌본 필립스는 폭로 전문 잡지인 ‘매클루어스’(McClure's)의 공동 편집인이었다.

헌팅턴은 신동이었다. 그는 16살에 피터 스투이베산트 고교를 졸업하고 예일대학에 입학, 2년반만에 ‘최우등’으로 졸업했다. 그는 미 육군 복부를 마치고 시카고대 정치학과에서 석사, 하버드에서 박사학위를 땄다.

그는 현재 자신이 앓고 있는 당뇨병인 23살때인 1950년, 박사 논문을 쓰느라 4개월 동안 고생한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그때 이후 헌팅턴은 매일 6일 차례 혈당 검사를 하고 3차례 인슐린을 맞고 있다.(인터뷰를 하던 도중 그는 자신의 혈당을 체크하고 스스로 인슐린 주사를 놓았다. 혈당치를 보고 나서 그는 “좋았어, 오늘 점심에는 샐러드 한 접시와 와인 한 잔을 마실 수 있겠구만”이라고 말했다)

그의 박사 논문 ‘고객주의’(Clientalism)는 외할아버지의 폭로 보도 전통에 따라 씌어졌다. 이 논문은 연방기구들이, 특히 주간통상위원회(Interstate Commerce Commission)가, 어떻게 자신들의 규제 대상인 기업들에 의해 농락당하고 있는가를 묘사하고 있다.

“당시 우리는 모두 리버럴이었고 그중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신(神)이었지”라고 헌팅턴은 내게 말했다. “달리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지” 심리학적으로 보아 그 당시 헌팅턴의 세계는 뉴딜의 흔적을 여전히 갖고 있었다. 하지만 튀는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에는 상식처럼 받아들여졌던 (노동자의) 집단교섭이라든가 최저임금제 등을 강력하게 반대하는 학생이 하나 있긴 했었지. 우리들 모두에겐 엄청난 충격이었지” 이 학생은 결국 서부의 스탠포드 법대로 옮겼는데, 그가 누군가 하면 현재 미 대법원장을 맡고 있는 윌리엄 렌퀴스트이다.

***뉴욕 출신의 신동, 23살때 박사 학위**

당시 하버드 정치학과에는 칼 프리드리히와 윌리엄 얀델 엘리오트 등 2명의 거목이 있었다. 둘중 보다 자유주의적인 칼 프리드리히는 독일 출신으로 구 서독의 헌법 제정에 참여했던 학자이다. 헌팅턴은 엘리오트를 따랐다. 남부 출신의 엘리오트는 옥스퍼드에서 공부한 보수적 철학자로 워싱턴 경험도 풍부했다. 그는 소련에 대해 강경 대응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으며 도덕적 상대주의를 경멸했다.

헌팅턴은 “엘리오트 교수는 1주일에 한번씩 대학원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워싱턴에서 하버드로 오곤 했다‘고 회상했다. 엘리오트에게 깊은 영향을 받은 또 다른 학생으로는 헌팅턴과 키신저가 있다. 헌팅턴은 이렇게 회상한다.

“엘리오트 교수의 사무실 바깥에서 초조하게 교수님을 기다리고 있던 우리는 한 학생을 가르치느라 늦은 시간까지 교수님이 사무실을 나서지 못하는 것을 보고는 ‘도대체 어떤 놈이길래’ 하고 분노하곤 했다. 엘리오트 교수는 이 학생에 대해 대단한 기대를 걸고 있었는데, 마침내 문이 열리더니 오동통한 학생 하나가 교수님 사무실에서 나왔다” 이 학생이 바로 키신저였다.

키신저는 나폴레옹 전쟁 이후 오스트리아 재상 메테르니히가 어떻게 안정된 국제질서를 구축해냈는가를 묘사한 자신의 첫 저서 ‘회복된 세계’(1957)를 엘리오트 교수에게 헌정했다.

키신저에 따르면 “엘리오트는 위대한 이론가는 아니었지만 학생 자신이 갖고 있으면서도 스스로는 모르는 재능을 꿰뚫어 볼 줄 아는 좋은 스승이었다” 키신저가 쓴 칸트에 관한 논문을 읽고 나서 엘리오트는 키신저에게 “자네는 아주 명석한 정신을 갖고 있구만. 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와 같은 소설을 읽어 볼 필요가 있네”라고 조언했다. 엘리오트 교수는 그런 식으로 학생들의 지적 성장을 도왔다.

헌팅턴의 책들에는 과감하면서도 냉철한 문장들로 가득 차 있다. 그의 왜소한 체구와 조심스러운 행동거지는 그의 책의 과감한 결론들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그의 외모는 ‘언제 이 사람을 만난 적이 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할 정도로 결코 인상적이지 않다. 대머리에, 끊임없이 눈을 깜박이고, 불안한 듯 열쇠를 만지작거리며,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 보며 말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연약한 외모 속에는 누구도 모를 강인함이 감춰져 있다. 브레진스키는 “샘은 매우 수줍은 사람이지요. 술집에서 수다를 떠는 형의 인간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와 논쟁을 하다 보면 그가 매우 확신에 차 있고 끈질기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라고 말한다.

***맥아더 해임사건 계기, 첫 저서 '병사와 국가' 집필**

학문 연구의 초창기부터 헌팅턴의 관심은 근대 세계의 거창한 문제들에 쏠려 있었다. 그의 지적 역량은 언제나 현실적 관심사에 투입됐다. 헨리 키신저의 첫 저서가 19세기초 유럽사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반면, 헌팅턴의 첫 저서는 그가 대학원생때 미국에서 벌어진 일에 의해 시작됐다.

‘병사와 국가’는 1951년 해리 트루만 대통령이 명령불복종을 이유로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을 해임한 사건에서 비롯됐다. 맥아더의 정치적 행동은 헌팅턴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부분적으로 이같은 행동은 직업군대의 원칙을 해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이후 군은-미 연방 상원 및 다른 보수적 기관들과 함께-미국의 자유주의적 가치에 대한 조셉 매카시의 공격을 방어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성채였음이 드러났다. ‘병사와 국가’는 일부 단순한 평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군사주의를 옹호하기 위해 씌어진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군과 사회의 관계에 관한 깊이 있는 분석이다.

헌팅턴에 따르면 미국은 1812년 전쟁부터 진주만 피습에 이르는 동안 외적의 침략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국가안보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그것은 현명한 정책에 의해 확보된 것이 아니라 지리적 조건에 의한 결과였다.

안보에 대한 걱정도 없고 자원이 풍부한 신대륙에서 마음껏 경제적 팽창을 할 수 있었던 만큼, 미국의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아무런 모순 없이 확고하게 뿌리내릴 수 있었다. 미국의 자유주의적 제도들에 대한 위협이 전혀 없었으므로 그것을 애써 방어할 이유도 없었고 따라서 진정한 보수주의도 필요 없었다.

***국가 안보가 확보돼야 자유주의 꽃피울 수 있다**

건국 초기 해밀튼이나 아담스 같은 보수주의자들이 필요했던 것은 미국이 프랑스와 영국, 스페인 등의 영토에 둘러싸여 있고 영국 함대의 위협을 받는 등 안보에의 위협이 상존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 수십년동안 심각한 규모의 외적의 위협이 전혀 없었으므로 ‘인간을 사악한 존재로 보는’ 보수주의자들의 견해는 휴면기에 들어갔다.

실제로 1915년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볼티모어 선에서 미 합참이 독일과의 전쟁 가능성에 대한 실질적 대비에 나섰다는 기사를 읽고 나서 ‘분노로 얼굴이 하얘지고 온몸을 떨었다’고 한다. 윌슨 대통령은 또 측근에게 만일 언론 보도가 사실이라면 군 참모들을 모두 퇴역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헌팅턴은 이렇게 말한다. “자유주의는 군대 조직과 군대의 기능을 잘 알지도 못할뿐더러 이에 대해 적대적이다”

물론 20세기초, 미국에서는 해밀튼류의 현실주의와 개입주의가 아주 짧은 기간동안 빛을 발한 적이 있다.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이 추구했던 공격적 대외정책이 그것이다. 그러나 미국적 정신 속에 너무도 깊이 각인돼 있는 권력정치(power politics)에 대한 혐오로 말미암아 1차대전후 윌슨 대통령의 대외정책이 실패하고 난 다음에는 “대외개입정책을 포기하고 자유주의적 고립주의로 회귀하고 만다.”

군대와 사회의 화해가 가능하다는 현실주의적 철학을 내세웠던 해밀튼의 뒤를 이을 사람이 나타나지 않음에 따라 1차 세계대전 이후 2차대전까지의 기간 동안 미국의 군대는 병영 속으로 숨어버렸다.

***"근대 군대는 국가를 위해 폭력을 관리하는 전문직"**

헌팅턴은 우리들에게 근대적 군 장교란, 국가라는 고객을 위해 폭력의 관리를 주 임무로 하는 일종의 전문직임을 상기시킨다. 전쟁은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현상이지만 직업군인이 탄생한 것은 나폴레옹전쟁 때였다. 미국의 건국 지도자들은 필요에 따라 군복을 입고 벗었으며 군인과 민간인 사이의 차이를 거의 느끼지 못했다.

미국의 헌법은 정부에 대한 ‘객관적인 문민 지배’의 원칙을 규정하지 않고 있다. 이 역시 지리적 조건에 의한 우연적 결과였다. 외적의 위협이 없다 보니 미국의 상비군은 소규모의, 정치적으로 약한 집단으로 남아 있었으며 전쟁이 끝날 때마다 규모를 축소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진주만 피습과 원자탄의 개발, 그리고 2차대전 때 정점에 달한 기술의 발달로 인해 이제 더 이상 지리적 조건은 외적의 침략에 대한 방벽이 될 수 없다. 경우에 따라서는 안보가 자유주의적 가치에 우선할 수도 있는 때가 온 것이다.

민주주의가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자유주의적 가치는 직업 군대를 잠식할 수 있다고 헌팅턴은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자유주의의 핵심은 개인주의이며, 자유주의는 개인의 이성과 도덕적 존엄성을 강조한다.” 반면 군인은, 그 직무의 본질상, 인간의 비합리성과 인간관계에서의 폭력적 갈등의 가능성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국가안보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리버랄은 자기 표현을 찬양한다. 반면 국가안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군인들은 복종을 강조한다. 때때로 민주사회의 군대가 독재체제의 군대보다 잘 싸우는 것은 민주 군대의 경우, 중간 계급의 장교들이 위험부담이 큰 결정을 내릴 여지가 크기 때문이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성공이나 아랍 군대에 대한 이스라엘 군의 우위는 민주 군대의 이런 경향으로 설명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군대가 속속들이 자유주의적이라고 한다면, 기술적으로 강력하며 비자유주의적인 적들의 공격으로부터 자유사회를 방어하는 데 결정적으로 필요한 효율성을 결여할 우려가 크다.

***"보수주의만이 군대 전문화에 도움"**

헌팅턴은, 오직 보수주의만이 군사적 전문화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보수주의는 고대 사회를 지배했던 군사 윤리로부터 유기적으로 성장해 온 사상이다. 보수주의는 국제관계에서 힘이 최우선 요소임을 인식한다. 보수주의는 기존 제도들을 받아들이며 제한된 목표를 추구한다.

보수주의는 거대한 계획을 기피한다. 보수주의는 다른 누구에게 권하거나 강요할 만한 보편적 가치 체계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군인과 마찬가지로 보수주의자들은 인간은 오직 경험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을 뿐이라고 믿는다. 이들이 역사 연구를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미 국방대학원은 역사를 핵심 교과목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군의 보수주의는 본질적으로 반동적인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헌텅턴은 말한다. 19세기 유럽에서 군의 전문직화는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장교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군이 사회의 귀족적 기반에 도전한 것이다.

평등주의적인 미국에서는 군과 사회의 역학 관계가 다를 수밖에 없다. 미국은 이미 민주화가 이루어졌으며 외적의 위협도 없다. 미국의 군대는 유럽에 비해 사회로부터 보다 고립됐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사회조직에 비해 훨씬 귀족적이 돼갔다. 사회가 자유주의적이 돼 갈수록 군대는 고립되고 비난을 받았으며, 이에 대한 대응으로 군은 더욱 보수화됐다고 헌팅턴은 지적한다.

헌팅턴은 이렇게 말한다. 미국의 위대함이란 미국의 자유주의가 외부세계와 관계를 맺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바로 그것에 있다고. 그에 따르면 “미국의 민족주의는 이상주의적 민족주의다. 이 민족주의는 다른 국민에 대한 미국 국민의 우위를 선포함으로써 정당화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상들에 대한 미국적 이상의 우위를 선포함으로써 정당화된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대외정책이란 그때 그때 자신들의 국익에 부합된다는 판단에 따라 프랑스가 결정하는 모든 것들이다. 반면 미국의 대외정책은 보편적 원칙이라는 기준에 의해 판단된다. 이 때문에 리버랄들은 미국이 분명한 자신의 국익을 수호하고자 할 때는 평화주의를 내세워 반대하는 반면, 인권을 수호하고자 할 때는 보다 공격적으로 나설 것을 요구한다고 헌팅턴은 설명한다.

헌팅턴에 따르면 직업군인들은 제한적이며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갈등의 현실을 인정하는 반면 “자유주의적 경향은 전쟁과 평화를 절대화하고 양자택일화 한다.” 리버랄들은 인도주의적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전쟁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가장 열심히 지지한다. 리버랄들이 국방 예산의 삭감을 추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주기적으로 위험천만의 대외정책을 요구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병사와 국가’를 읽어본 독자라면 냉전의 결말이 불투명했던 70년대와 80년대에 일관되게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를 과소평가해 왔던 지식인과 오피니언 리더들이 90년대 들어 (냉전에 비해) 미 국가안보와의 관련은 훨씬 작은 반면 자유주의적 원칙들에 대한 침해가 극명하게 드러났던 보스니아와 코소보 사태에 나토가 적극 개입할 것을 요구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군은 국가안보 이외의 이유로 전쟁해선 안돼"**

헌팅턴에 따르면 자유사회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군사적 통제의 한계를 명확히 규정하는 것이다. 나아가 다가올 불확실성의 수세기 동안 그 한계를 명백히 규정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군과, 군에 의한 정부에의 조언을 철저하게 직업적(전문직) 차원으로 묶어두는 것이다. 따라서 군인은 국익이 걸려 있을 때만 정부에 대해 전투를 제안해야 한다. 만일 군인이 그 외의 이유로-인도주의적 이유를 포함해-전투를 하게 된다면, 정부의 상급자들은 군에 대해 여러 다른 이유로 전투를 수행하라고 압력을 가하게 될 것이다.

1993년 당시 합참의장이었던 콜린 파월 장군은 보스니아에 대한 미국의 군사 개입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일부 인사로부터 ‘정치 장군’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헌팅턴을 읽은 독자라면 파월에 대해 달리 생각했을 것이다.

만일 국가 영토가 적의 직접적 위협에 직면해 있지 않다면 직업군인은 “승리가 확실할 때를 제외하고는 전쟁 개입을 제안해서는 안 된다”고 헌팅턴은 썼다. 따라서 미 국익에의 영향이 불분명하고 승리의 전망이 불확실할 경우에는 전쟁을 벌여서는 안 된다는 ‘파월 독트린’은 사실 제대로 된 직업군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평범한 진리에 불과한 셈이다. 직업군인이라면 정치적이어서도 안 되지만, 아무리 정당한 명분이라 하더라도 도덕적 명분을 위해 전쟁에 나서서도 안 되는 것이다.

냉전 시작 이후 10여년간을 관찰하면서 헌팅턴은 자유사회와 새롭고 거대한 군대조직간에는 끊임없는 긴장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이 둘은 공존의 길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트루만 대통령을 이처럼 새로 형성되는 질서, 즉 국내적으로는 자유주의적이지만 대외 관계에 관한한 철저하게 보수적인 질서의 전위로 파악했다. 나아가 민간기업들이 군과 여타 사회간의 가교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그는 관찰했다.

대다수 사람들은 거대기업들이 보수적 실용주의, 나아가 군산복합체와 동일시하고 있다. 그러나 헌팅턴은 이같은 이미지가 냉전이 만들어낸 가공물(架空物)에 불과함을 드러냈다. 그는 자본가들의 세계관을 ‘기업 평화주의’(Business Pacifism)란 말로 표현했다.

종교적 도덕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의 결합이 대부분의 미 기업가들로 하여금 권력정치보다는 국제 무역과 다자간 조약이 훨씬 중요하다고 믿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냉전의 종식과 함께 이같은 세계관은 새로운 중흥기를 맞고 있다. 미국 기업의 권위주의적 중국과의 점증하는 경제적 교류를 우려하는 리버랄과 신자유주의자들은 이제 새삼스럽게 헌팅턴의 이 오래 전 주장을 곱씹어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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