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탑 농성이 길어지면서 두 노동자는 극도로 심신이 지친 상태였다. 지난달 21일 희망버스 행사에서 최병승 씨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이름을 헤아리면서 "그 긴 시간 동안 우리는 아직 성과를 못 얻었다. 동지들의 피값이 보상받을 수 없을까 두렵다"는 심경을 털어놓기도 했다.
두 노동자는 철탑 농성 대신 땅에서 비정규직 싸움의 '십자가'를 지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런데 목숨을 건 농성을 한 이들이 죄송하다고 해야 할 상황인지는 의문이다. 이남신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은 "죄 지은 사람(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은 백주에 대로를 활보하고, 정규직이 돼야 할 사람이 300일 가까이 철탑에 올라간 것 자체가 가슴 아픈 일"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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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 문제 심각성, 사회적으로 알렸다"
반쪽짜리 싸움이었지만, 현대차 철탑 농성이 한국 사회에 미친 파장은 적지 않다. 박점규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 집행위원은 "철탑 농성은 불법 파견 사내 하청 노동자의 문제를 사회적으로 알리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박 집행위원은 "(천의봉·최병승 씨는) 100만 명에 달할 것으로 보이는 불법 파견 노동자들에게 정규직 전환의 가능성과 희망을 보여줬다"며 "이 싸움이 부각됐기에 삼성전자서비스 불법 파견 문제도 조명됐고, 케이블 노동자들의 조직화 등으로 이어졌다"고 덧붙였다.
오민규 전국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 정책위원은 "현대차 비정규직 문제가 교착 상황에 빠졌을 때, 두 노동자는 현장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비정규직 전원 정규직 전환이라는) 원칙을 가지고 싸우자는 용기를 줬다"며 "출근하는 공장 부근을 선택하는 점에서는 정규직 노동자에게 연대를 호소했다는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현대차에서 불법 파견이 인정되고 사내 하청 노동자가 정규직으로 전환되면, 당장 현대그룹 내에서도 현대모비스, 기아자동차, 현대제철, 현대위아 등의 사내 하청 노동자들이 영향을 받을 전망이다. 현대차 비정규직 싸움이 기업과 비정규직 노동자 사이의 '대리전'이라고 불리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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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 엄단? 정부는 왜 불법 파견은 엄단 안 하나"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은 정부와 현대차가 풀어야 할 과제다. 두 노동자가 고립감과 절망감을 느낀 데는 현대차의 버티기와 박근혜 정부의 묵인이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박근혜 대통령은 당선 직후 대통령직 인수위원들에게 "비정규직 문제를 어버이의 마음으로 해결하라"고 당부했지만, 이후 '비정규직 문제'의 상징인 현대차 불법 파견 문제에 대해 발언한 적이 없다. 방하남 고용노동부 장관 역시 "불법 파견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법대로 직접 고용을 명령할 것"이라고 했지만,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경찰은 오히려 현대차 희망버스 행사에 대해 "불법 행위를 엄벌할 방침"이라며 '희망버스 합동수사본부'를 꾸렸다. 합동수사본부에는 무려 53명이 동원됐다.
이를 두고 박 집행위원은 "박근혜 정부는 군사 정권 시절의 조폭 교사와 똑같다"면서 "오랜 시간 두들겨 맞은 '왕따'가 참다 못 해서 일진과 한 번 붙었는데, 교사가 자기네 반에서 벌어진 일을 외면하다가 두들겨 맞은 친구들만 때린 것"이라고 비유했다.
이남신 소장은 "희망버스 과정에서 실질적인 법 위반이 있다면 사법 처리를 할 수 있다고 보지만, 선후가 바뀌었다"면서 "현행법을 위반하고 불법 파견한 정몽구 회장을 위시한 파견업주들에 대해서 먼저 법적인 처벌을 해야 한다. 법을 먼저 위반한 사람을 그대로 두고, 비정규직지회 간부만 사법 처리하는 것은 전형적인 유전무죄 무전유죄 논리"라고 비판했다.
박점규 집행위원은 "경찰과 검찰의 '희망버스 합동수사본부'에 들인 노력의 10분의 1만 들여서 불법 파견 사업장에 대한 수사를 한다면 불법 파견 문제는 쉽게 해결될 수 있다"며 "박근혜 정부가 정몽구 회장을 비호할 게 아니라, 불법 파견 합동수사본부를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8일 금속노조 현대자동차 비정규직지회 최병승(왼쪽), 천의봉(오른쪽) 조합원이 296일 만에 철탑 농성을 마치고 땅을 밟았다. ⓒ프레시안(최형락) |
"현대차, 법원 판결 이행해 불법 기업 오명 벗어야"
현대차로서도 '법 이행'이라는 과제는 남는다. 현대차가 '대법원 판결 인정' 대신 '신규 채용안'을 내놓는 한 정상적인 노사 관계를 기대할 수도 없고 '불법 기업'이라는 오명을 벗을 수도 없는 탓이다.
이남신 소장은 "불법 파견 노동자의 정규직 전환은 협상 대상이 아니"라며 "철탑 농성이 아니었어도 대법원 판결은 현대차가 이행했어야 할 사안"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2년 이상 된 1차 사내 하청 노동자 규모만 해도 4000-5000명인데, 현대차가 내놓은 3500명 신규 채용안은 규모부터가 납득이 안 간다"고 덧붙였다.
이 소장은 또한 "이 싸움은 불법 파견 인정이 핵심인데, 신규 채용은 불법 파견을 부정하는 안이라서 비정규직 노조로서는 도저히 받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최병승 씨도 그런 상황에서는 발목이 묶일 수밖에 없었다"며 "불법 파견을 인정하지 않는데, 혼자 정규직 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라고 반문했다.
오민규 정책위원은 "(최병승 씨는) 지노위, 중노위, 1심, 2심, 3심을 거쳐 5심제를 겪었다. 파기 환송심이어서 고등법원, 최종 대법원 판결까지 7심이 걸렸고, 대법원 판결이 나니 현대차가 중노위를 상대로 또 소송을 걸었다"고 꼬집었다. 현대차의 '버티기'가 도를 넘었다는 것이다.
오 위원은 "비정규직 노동자는 '법을 지키라'고 하려면 10년 넘게 소송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건 사실상 현대차가 법을 안 지키겠다는 얘기"라며 "반대로 노동자가 '법을 지키라'고 파업하면 회사는 곧바로 고소·고발하고 손배 가압류를 때리며, 이러한 조치는 대법원 판결은커녕 지방법원 판결이 없어도 바로 집행된다"고 비판했다.
이 소장은 "특히 주무 부처인 고용노동부가 불법 파견 문제 후속 조치를 포함해 사용자에 대한 응당한 법적인 처벌을 해야 한다"며 "정부가 개입해서 노사 관계가 정상화되도록 하는 것은 남은 과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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