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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좋은 시절이 온다'는 정치인들, 틀렸다면?

[월러스틴의 '논평'] 경제위기는 시스템의 구조적 모순

일어나지 않고 있는 경제 회복
(The Economic Recovery That Isn't Happening)


대부분의 정치가들과 전문가들은 자신들의 정책처방을 따르기만 하면 더 나은 시절이 올 것이라고 장담하기 마련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들의 이해관계에 맞기 때문이다. 현재 전 세계 경제 위기에 대한 이들의 반응도 예외 없이 이러한 행태를 보여주고 있다. 미국의 실업, 유럽 국가들의 자금조달 비용 상승, 또는 중국·인도·브라질의 갑작스런 성장 둔화 등 현재의 이러저러한 문제들에 대해 이들은 중기적으로는 좋은 날이 올 것이라고 장담한다. 그것이 시대의 대세다.

하지만 그러한 낙관이 틀렸다면? 가끔씩 일말의 정직함이 나타날 때가 있다. 지난 7일 앤드류 로스 소르킨은 <뉴욕타임스> 기사에서 "투자자들이 주식 시장을 떠나는 이유에 대한 보다 솔직한 설명은 주식 투자가 밑지는 장사라는 데 있다. 한 세대에 걸쳐 투자자들이 돈을 벌지 못하고 있다"고 썼다. 또 지난 10일 제임스 매킨토시는 <파이낸셜타임스>에서 비슷한 주장을 펼쳤는데, "경제학자들은 현재의 대불황(Great Recession)이 경제 성장에 영구적 타격을 가했다는 점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투자자들은 보다 비관적이 됐다"고 지적했다. 그 외에도 <뉴욕타임스>는 14일 더 빠른 거래에 드는 비용의 상승을 다룬 기사에서 "(투자자들은) 자산 거품과 전 세계 경제의 불안정성 때문에 지난 10년 간 거의 수익이 나지 않았던 시장에 흥미를 잃었다"라고 전했다.

극소수 투자가들이 믿을 수 없이 많은 돈을 벌어들이고 있다는 관측이 지배적인 가운데 어떻게 주식 투자는 밑지는 장사라는 평가가 나오게 됐을까? 장기적으로 볼 때 주식 투자로 얻는 이익은 물가 상승을 감안하고도 높은 수준이며, 특히 채권 투자보다 높다는 것이 오랫동안 투자의 기본 상식이었다. 주식의 단기, 혹은 중기 변동성이 더 크다는 점에서 파생되는 위험에 대한 보상이라는 것이다. 계산법은 다양하지만 일반적으로 지난 세기에 주식에서 얻는 이득은 채권 수익보다 훨씬 더 높았다. 물론 주식을 오랫동안 보유한 경우에 한해서 말이다.

그런데 같은 기간 동안 주식 투자에 따른 수익 수준이 국내총생산(GDP) 증가분의 약 2배라는 점은 덜 알려져 있다. 이에 따라 일부 소수 분석가들은 이러한 놀라운 주식투자 수익을 폰지 게임(실제 경제성장이 뒷받침 되지 않은 과도한 수익창출이라는 의미)이라고 칭했다. 또한 주식 투자의 놀라운 수익 창출이 1970년대 초 이후, 즉 세계화, 신자유주의, 금융화 등 다양하게 불리던 시대에 일어났다는 점이 드러났다.

그렇다면 이 시기에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우리는 먼저 1970년대 이후 시대가 자본주의 세계 경제에서 생산량·생산성, 그리고 전 세계적 잉여가치 창출이라는 측면에서 자본주의 역사상 가장 크게 확장됐던 시대 이후에 왔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프랑스가 이 시기(1943~1973년)를 '영광의 30년'(trente glorieuses)으로 부르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나의 분석으로 이는 콘드라티에프 순환 A 단계(상승기)에 해당된다. 실제로 이 시기에 주식을 보유한 사람들은 큰 돈을 벌 수 있었다. 생산자들 대부분, 임금노동자들도 형편이 좋아졌고 정부 수입도 크게 늘었다. 이 시기 세계체제로서의 자본주의는 대공황과 엄청난 파괴가 초래됐던 2차 세계대전 이후 대단히 새로운 활력소를 얻은 것으로 보였다.

애석하게도 그런 호시절은 영원히 계속되지 않았고, 계속될 수도 없었다, 우선 (영광의 30년 동안) 세계 경제의 확장은 소위 '선도 산업' 안의 몇몇 유사 독점체제(quasi-monopolies)를 기초로 했다. 독점은 경쟁자들이 세계 시장 진입에 성공해 입지를 약화시킬 때까지만 지속된다. 경쟁이 심해지면 가격(경쟁의 장점)도 떨어지지만 수익률(경쟁의 단점)도 마찬가지다. 세계 경제는 이후(1970년대~2012년 이후까지) 30~40년의 '영광스럽지 못한' 세월 동안 장기 경기침체 단계로 진입했다. 이 시기 (거의 모두의) 부채가 증가했고, 전 세계적으로 실업이 늘어났으며, 대부분의 투자자들이 주식 시장에서 채권 시장으로 후퇴했고 특히 미국 재무부가 찍어내는 국채로 몰렸다.

미국 국채는 물론 안전하지만 어떤 가치도 창출하지 않은 채 전 세계 금융 활동을 조정하는 소수의 은행과 헤지펀드를 제외하면 (나머지 투자자들에게) 수익률이 매우 높은 것은 아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들이 어떤 상태에 처했는지를 보여준다. 세계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양극화됐고, 실질임금은 1970년 수준에서 상당히 낮아졌으며(여전히 1940년대 찍은 저점보다는 위에 있다), 정부의 수입 역시 줄어들었다. 일련의 부채 '위기'가 세계체제의 또 다른 부분을 빈곤에 빠트리고, 다른 부분으로 이어진다. 그 결과 우리가 유효 수요(effective demand)라고 부르는 것은 전 세계적으로 바닥을 드러냈고, 소르킨은 이를 두고 '시장은 더 이상 자본축적을 위한 수익의 원천으로서 매력적이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음, 적어도 현재 미국이나 서유럽 국가들처럼 점점 더 큰 곤경을 겪는 나라보다 더 힘을 내고 있는, 소위 신흥국이라고 불리는 나라들이 있다고 항변할지 모르겠다. 신흥국 리스트는 길며 연속적이다. 처음에는 일본과 한국, 대만, 남유럽 국가들과 아일랜드가 리스트에 포함됐고, 그 다음 브릭스(BRICs, 특히 중국, 인도, 브라질)가 들어갔다. 터키와 인도네시아가 뒤를 이었고, 현재 여러 아프리카 국가들이 포함됐다(는 주장이 있다). 문제는 이들 대부분이 일시적으로만 성장한 것으로 나타났고, 서서히 '곤경'에 빠져들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딜레마의 핵심은 시스템의 근본적인 모순 중 하나다. (이윤 폭이 올라가는) 단기 상황에서는 가장 효율적인 경제주체의 소득이 최대화됨으로써 장기적으로 구매자들을 몰아낸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과 지역이 세계 경제에 진입할수록 '조정'되고 '개선'되는 이윤 폭은 좁아지며, 투자자들과 소비자, 정부는 점점 더 곤란한 선택지에 직면한다.

지난 세기에 걸친 수익률이 GDP 증가율의 두 배라는 점을 기억하라. 이런 현상이 한 번 더 반복될 수 있을까? 나 자신 뿐 아니라 시장의 잠재적 투자자 대부분에게도 상상하기 힘든 일로 보인다. 이는 미국과 유럽에서 매일 같이 관찰되며, 그리고 곧 '신흥경제'에서도 보게 될 한계를 만들어낸다. 지탱하기에는 너무 높은 부채율이다.

한편으로 '긴축'이라고 불리는 강력한 정치적 결정이 있다. 그러나 긴축은 사실상 현존하는 복지(연금, 의료보장제도, 교육 관련 지출)를 삭감하는 것이고, 이는 이러한 복지를 보장하는 정부의 역할을 줄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더 적게 받으면, 그들은 분명 더 적게 쓸 것이고, 판매자들은 고객을 찾기 더 어려워진다. 이는 더 낮은 유효수요를 의미한다. 때문에 생산 부문은 여전히 (주식에서 나오는) 수익성이 낮고, 정부는 여전히 더 가난한 상태가 될 것이다.


▲ 스페인의 긴축 반대 시위 장면. ⓒAP=연합뉴스

이는 악순환의 과정이다. 쉬운, 또는 받아들일 수 있는 탈출구는 없다. 사실상 출구가 없다는 말이다. 이것이 우리가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구조적 위기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리고 현존 시스템이 분기점에 다가감에 따라 그 위기는 혼란스럽고 매우 격렬하게 요동치게 된다. 이에 따라 우리들은 현재 우리가 속해 있는 시스템을 이어받아 어떤 시스템을 만들 것인가를 놓고 매우 길고 치열한 투쟁을 하게 될 것이다.

정치인들과 전문가들은 이러한 현실을, 그리고 이 현실이 제기하는 선택을 직시하려 하지 않는다. 심지어 소르킨같은 현실주의자들도 경제가 '활력소'(a shot in the arm)를 얻고, 대중이 '장기적으로는 믿음을 가질 것'이라며 자신의 분석을 끝낸다. 당신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기꺼이 당신에게 (거짓말로 속여) 브루클린 다리를 팔 것이다.


* <월러스틴의 '논평'>은 세계체제론의 석학 이매뉴얼 월러스틴 예일대 석좌교수가 매달 1일과 15일 발표하는 국제문제 칼럼을 전문번역한 것입니다. <프레시안>은 세계적인 학자들의 글을 배급하는 <에이전스글로벌>과 협약을 맺고 월러스틴 교수의 칼럼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8월 15일 논평 원문보기)

* 저작권 관련 알림: 이 글의 저작권은 이매뉴얼 월러스틴에게 있으며, 배포권은 <에이전스 글로벌>에 있습니다. 번역과 비영리사이트 게재 등에 필요한 권리와 승인을 받으려면 rights@agenceglobal.com으로 연락하십시오. 승인을 받으면 다운로드하거나 전자 문서로 전달하거나 이메일로 보낼 수 있습니다. 단 글을 수정해서는 안 되며 저작권 표시를 해야 합니다. 저자의 연락처는 immanuel.wallerstein@yale.edu입니다. 월러스틴은 매월 2회 발행되는 논평을 통해 당대의 국제 문제를 단기적인 시각이 아닌 장기적인 관점에서 조망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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