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킨슨은 두 시간 내내 무대 위를 뛰어 다니고 점프를 했다. 누구도 따라하지 못한다던 디킨슨의 보컬은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힘이 넘쳐흘렀다. 스티브 해리스(베이스)의 손가락 관절에는 기름칠을 해둔 것만 같았고, 데이브 머레이(기타)의 팔뚝에는 용수철이 달려있는 듯 했다. 이들이 얼마나 몸 관리를 잘 해왔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헤비메탈 영웅들이 무협지 주인공처럼 소화되던 시대가 한국에 있었다. 10일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첫 내한 공연을 가진 아이언 메이든은 그 시절을 소환했다. 90년대 록과 힙합의 대두로 퇴물 판정을 받았던 헤비메탈 신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나이가 믿기지 않는 에너지를 과시했다. 그 동안 봐 온 젊은 록 밴드들의 무대가 이들 앞에서 차라리 할아버지의 그것으로 연상될 지경이었다.
▲ ⓒ액세스엔터테인먼트 제공 |
예정된 저녁 8시를 살짝 넘겨 이들에게 첫 그래미를 안겨 준 <새틀라이트 15...더 파이널 프런티어>가 화려한 뮤직비디오를 대동한 웅장한 소리로 무대를 가득 채웠다. 이어 역시 지난해 발매된 신보에 실린 <엘 도라도>가 관객의 환호를 자아냈다.
이들이 직접 공수해온 무대장치가 빛을 발했다. 이들의 마스코트 에디의 얼굴을 비롯한 각종 그림을 채운 거대한 현수막이 곡이 바뀔 때마다 변하며 무대 이미지를 장식했다. 디킨슨은 대형 록 라이브에서나 볼 수 있던 대형 무대 장치 위아래를 쉬지 않고 뛰어다니며 관객들의 환호를 유도했다.
공연의 첫 번째 절정은 이들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1984년 앨범 [파워슬래이브]에 수록된 <2 미니츠 투 미드나이트>와 신보의 수록곡 <탈리즈만>이었다. 나이 든 직장인 팬들이 적잖이 공연장을 찾았는데, <2 미니츠…>의 후렴구에서 공연장이 가장 거대하게 울렸다.
이제 내한하는 뮤지션들이 거의 공통적으로 하는 "다시 오겠다"는 말이 언제 나올까 궁금했는데(아마도 나오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예상보다 이르게 <탈리즈만>이 끝난 후 디킨슨은 이 말을 내뱉었다.
초반의 질주하는 분위기는 <커밍 홈>에서 잠시 쉬었고, 디킨슨의 재가입 후 나온 두 번째 앨범 [댄스 투 데스]의 동명 타이틀곡이 이어진 후 가장 거대한 함성이 울렸다. 특유의 하강하는 느낌의 오프닝으로 이들의 대표곡 중 하나인 <트루퍼>가 시작되자 객석의 진동이 느껴졌다.
쉬지 않고 연달아 공연을 이어가던 이들은 전성기의 마지막을 상징하는 곡 <피어 어브 더 다크>와 데뷔앨범 수록곡 <아이언 메이든>을 끝으로 무대 뒤로 사라졌다. <아이언 메이든>이 연주되는 동안 이들의 마스코트 에디가 무대 위로 올라와 박수를 자아내기도 했다.
앙코르 무대는 이들의 팬이라면 누구나 예상 가능했던 이들의 대표곡 <더 넘버 어브 더 비스트>로 시작됐다. 누구나 할 것 없이 'lml(록팬들이 손가락으로 만드는 제스처)'을 만들며 환호한 후로 이들은 <할로우드 비 다이 네임>과 <러닝 프리>를 연주하고 공연을 마쳤다.
▲ ⓒ액세스엔터테인먼트 제공 |
공연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디킨슨은 열광적으로 반응하는 3000여 관중들을 보고도 힘이 나는 듯했다. 이들이 전성기를 맞이한 후로 좀처럼 맞닥뜨리지 않았을 '초라한' 수의 관객들이었으나, 디킨슨은 공연 내내 후렴구를 따라 부르는 관객들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좌석에 앉은 팬들이 조용히 공연을 관람하자 의자에 앉아있는 그들의 모습을 따라하거나 "저기 녹색의자에 앉은 사람들은 뭐야? 아~뮤지션들?"이라고 농담을 하는 등 가볍게 불만을 표하기도 했다.
확실히 남성들의 비율이 높았다. 같은 날 영국의 싱어송라이터 코린 베일리 래의 공연이 열리는 바람에(더군다나 그곳에는 아이유도 참석했다) 안 그래도 많지 않은 관람층이 흩어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모처럼 맞은 대형 헤비메탈 공연에 열정적으로 호응해 무대와의 좋은 호흡을 이어갔다.
액세스엔터테인먼트 관계자는 "공연이 끝난 후 멤버들이 '아시아 공연 중 가장 감명 깊었다'고 만족감을 표했다"며 "디킨슨도 컨디션이 좋지 않았지만 혼신의 힘을 불살랐다"고 말했다.
언제나 아쉬움이 남는 체조경기장의 사운드는 역시 이날도 공연의 옥의 티가 됐다. 이들의 사운드는 강력한 가운데도 섬세하게 조율된 게 매력인데, 그 맛을 느끼기는 힘들었다.
공연시장 규모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곤 하지만, 적은 관객수도 아쉬운 부분이었다. 더군다나 공연이 직장인들의 회식이 몰린 목요일 저녁이었다는 점도 문제였다. 디킨슨이 "다시 오겠다"고 말했으나, 사실상 성사되기란 불가능하다. 표가 많이 팔리지 않은 탓에 주최 측인 액세스엔터테인먼트가 이번 공연으로 큰 손해를 봤기 때문이다.
이제 이들은 전용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고, 다시는 한국을 찾지 않을 것이다. 이날 이들의 처음이자 마지막 내한공연을 지켜본 3000여 관객은 분명 행운아다. 이들은 60여만 명의 '더 파이널 프런티어 투어' 관객 중 하나다. 메탈리카도 우습게 여기던 해리스의 호언장담은 과연 사실이었다.
세트리스트
Satellite 15... The Final Frontier
El Dorado
2 Minutes to Midnight
The Talisman
Coming Home
Dance of Death
The Trooper
The Wicker Man
Blood Brothers
When the Wild Wind Blows
The Evil That Men Do
Fear of the Dark
Iron Maiden
앙코르
The Number of the Beast
Hallowed Be Thy Name
Running F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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