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쯤으로 기억한다. 영국의 한 유명 대학에서 고용형태 및 노사관계 관련 박사과정을 밟고 있던 분의 전화를 받았다. 노동운동 경력이 있던 분도 아니고, 오히려 정부 출연 연구기관에서 일하다가 유학을 떠난 독특한 경우라서 호기심이 발동했다.
"어렵게 영국으로 유학을 가신 분이 왜 다시 한국으로 오셔서 논문 자료를 수집하시나요?" 그의 궁금증을 풀기 전에 우선 내 궁금증부터 해소하고 싶었다. 그런데 깜짝 놀랄 만한 답을 들었다.
"교수님께 사내하청 관련 논문을 쓰겠다고 했더니, 그런 문제는 당신 모국인 한국에 가서 연구하는게 좋을 거라고 하더군요. 유럽에선 생산직에 사내하청을 쓰는 경우를 거의 구경할 수 없어요. 한국에서나 볼 수 있는 독특한 고용형태이지요."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고생하며 유럽으로 유학을 갔는데 '사내하청은 당신네 나라가 전문이오'라며 다시 한국으로 역(逆)유학을 왔다는 말인다. 그렇다면 김영배 경영자총협회 상임부회장이 <문화일보> 9월 9일자에 '사내하청은 글로벌 트렌드다'라는 제목으로 기고한 아래의 글은 새빨간 거짓말이란 뜻인가?
"세계 유수의 기업들이 사내하청을 적극 활용하고 있으며,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에서도 이러한 생산 방식이 보편화한 지 오래다. 일본 조선업체의 경우 외부 노동력 활용률이 65%에 이른다.(중략) 글로벌 생산 시스템으로 자리잡고 있는 사내하청 생산 방식을 한국만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사내하청, 韓·中·日의 특수한 고용형태
그렇다. 사내하청이라는 고용형태는 김영배 부회장의 주장과는 달리 전혀 보편적이지 않다. 한국과 중국, 일본에서나 관찰되는 매우 특수한 고용형태다. 그래서인지 김영배 부회장도 구체적 사례는 일본만 거론하고 있다. 유럽과 미국의 경우 계약직 형태로 비정규직을 사용하는 일은 있지만, 사내하청 형태의 간접고용 비정규직을 사용하진 않는다.
일각에서는 "외국에는 사내하청을 규제하는 일이 없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사실이다. 사내하청이란 제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데, 이를 규제할 이유가 있겠는가? 그래서 노동조합 관련 국제행사가 한국에서 열리게 되면 한국 활동가들은 외국에서 찾아온 활동가들에게 '사내하청'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쩔쩔 매야만 한다. 이를 표현할 적절한 외국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내하청이라는 고용형태가 너무 독특하고 신기한 것이어서, 국제노동기구(ILO)조차 '사내하청 노동자'에 해당하는 영문 공식 표기로 최근에서야 'In-House Subcontracted Worker'라는, 영어사전에도 없는 신조어를 만들어 쓰기 시작했을 정도다.
이런 당혹감은 당연할 수도 있다. 사내하청 비정규직은 제조업 생산라인에서 정규직과 똑같은 일을 담당하는데, 형식적으로 소속은 듣도 보도 못한 하청업체 소속이다. 그나마 길게는 6개월, 짧게는 2~3개월 단위로 재계약을 해야 한다. 임금 수준은 동일한 노동을 하는 정규직보다 훨씬 낮다. 이런 불합리하고 파렴치한 고용형태를 어떻게 그들에게 쉽게 이해시킬 수 있겠는가?
한진중공업에서 작년에 이어 또다시 400명의 정규직 노동자들을 정리해고 한다고 하여 최근 총파업이 시작됐다. 주요한 쟁점 중 하나는 수주 물량 대부분을 한국이 아니라 필리핀에 건설한 수빅조선소로 돌리고 있다는 점이다. 수빅조선소의 경우 1만여 명 가량의 사내하청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다. 필리핀 노동조합들이 '제조업에 사내하청을 투입하는 악질 한진 자본 규탄한다'며 한국 원정투쟁을 몇 차례 왔었다는 사실 말이다. 필리핀 같은 나라에서도 사내하청은 전혀 생소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파렴치한 고용형태를 한국 자본은 외국으로 '수출'하기에 이른 것이다.
▲ 지난 11월 현대차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울산 1공장을 점거한 후 파업을 시작하면서 '제조업 사내하청' 에 대한 공방이 지속되고 있다. ⓒ프레시안(자료) |
제발 이제 거짓말 좀 그만 합시다.
어디 김영배 경총 부회장만의 일이겠는가. 전세계에서 사내하청 사용이 보편적이라는 새빨간 거짓 주장은 학계·언론계 인사들까지 동참하고 있다.
"세계 유수의 기업들도 사내하청을 적극 활용하고 있으며,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에서도 이러한 생산 방식이 보편화한 지 오래다. 독일을 비롯한 유럽연합(EU) 회원국들은 파견근로 업종이나 기간제한은 완화·폐지하는 대신에 평등대우 원칙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이전오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문화일보> 12월 16일자 칼럼)
"사내하도급 자체가 저희 나라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모든 나라에서 있는 문제이고 흔히 예를 들면 나이키 같은 회사는 부가가치의 95%를 하청업체에서 얻는다고 하는데 …… 전세계 모든 회사들이 외부인력 활용 자체를 하고 있고요." (12월 1일 <CBS> 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에서 김영완 경총 법제1팀장)
"실제 폴크스바겐 도요타 등 선진 외국 자동차업계에선 일반화한 제도다. 국내에서도 300인 이상 제조업체의 41.2%가 사내하청을 활용하고 있고, 고용노동부도 실태 점검에서 대부분 문제가 없다는 판정을 내린 바 있다." (<헤럴드경제> 12월 16일자, 성항제 선임기자의 이슈프리즘)
위 기사를 보면 전세계에서 사내하청이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구체적인 근거 제시 자체가 거의 없다는 점부터 의심스럽지 않은가? 김영완 팀장이 사례로 든 나이키의 경우, '사내하청'이 아니라 '사외하청'을 얘기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생산과정 대부분을 외주화시켜 놓았기 때문에 부가가치 대부분을 하청업체에서 얻는 것일 뿐, 직접생산공정에서 사내하청을 사용한다는 말은 전혀 없다.
성향제 기자가 사례로 든 도요타의 경우는 사실이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사내하청은 한국, 중국, 일본에서만큼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도대체 폴크스바겐의 경우 어느 공장에서 사내하청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인지? 필자가 아는 한, 상하이폴크스바겐을 비롯한 중국공장에서만 그런 사례가 있을 뿐이다.
외국에 한 번 나가본 적 없는 필자는 불과 4년 전에야 영국 유학생과의 우연한 접촉으로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지만, 빈번하게 외국에 나가시는 분들이 이런 거짓말을 일삼아서는 곤란한 것 아닐까? 정말 책임있는 주장을 펼치시려면, 미국과 유럽에서 제조업 직접생산공정에 한국의 사내하청같은 비정규직을 얼마나 쓰고 있는지 실증적인 근거를 제시해보라.
현대기아차, 해외공장에서도 사내하청을 쓰나?
어떤 이들은 "글로벌 트렌드인 사내하청을 불법으로 만들면, 기업들은 경쟁력 제고를 위해 해외로 빠져나갈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또한 새빨간 거짓말이다. 사내하청이 정말로 '글로벌 트렌드'라면, 현대기아차가 해외로 진출한 곳에서도 사내하청을 사용하고 있을 것이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현대기아차 입장에서 해외공장에서 사내하청 활용 실태에 대한 보도자료 한 번쯤은 나왔을 법하지 않은가?
적어도 필자가 아는 바로는, 현대기아차 전세계 공장들에서도 사내하청 활용은 전혀 보편적이지 않다. 대부분의 해외공장에서 현대기아차는 생산직 노동자들을 '직접 고용'하지 한국처럼 사내하청 비정규직을 활용하지는 않는다. 이를테면 현대차 인도공장의 경우 1700여 명의 정규직, 2000여 명의 임시직과 함께 기술훈련생·실습생들이 일하고 있는데 사내하청 형태의 간접고용 비정규직을 사용한다는 얘기는 들어본 바 없다.
최근 기아자동차 미국 조지아공장(KMMG)이 내년 중반부터 3교대 생산체제로 전환하기 위해 1000여 명의 노동자들을 추가로 고용한다는 방침을 내놓은 바 있다. 기아차는 이를 위해 올해 초부터 600여 명의 직원을 추가로 고용해 한국 남양연구소에서 최종 교육훈련까지 완료한 상태라고 한다.(<연합뉴스> 11월 20일자 기사 참조) 추가로 고용하는 노동자들은 '직접 고용'하는 것일까 아니면 사내하청을 쓴다는 것일까? 당연히 '직접 고용'한다.
사실이 이렇다면 사내하청을 전혀 활용할 수 없는 미국과 유럽 자본이 한국으로 들어와야 마땅할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정반대이다. 현대기아차는 한국에서 자유롭게 사내하청을 활용하고 있으면서, 오히려 사내하청을 쓸 수 없는 미국·유럽·남미 등지에 해외공장을 진출시키고 있지 않은가!
법원이 GM대우 창원공장도 불법파견 인정한 의미
23일 다시한번 고등법원이 GM대우 창원공장 사내하청이 불법파견임을 확인하는 판결을 내렸다. 이번 사건은 현대차처럼 민사사건이 아니라 형사사건인데, 2005년에 노동부가 GM대우 창원공장 사내하청업체 전체가 불법파견이라 판정한 후, 검찰이 (현대차 불법파견에 불기소처분을 내렸던 태도와 달리) GM대우 당시 사장이던 데이비드 닉 라일리와 하청업체 사장들을 기소함으로써 재판이 진행되었던 것이다.
판결이 나오기 한달 전인 지난 11월 이 사건의 결심이 진행될 때 GM대우 사측 변호인은 불법파견 관련 법리논쟁을 벌이기보다, 사내하청을 불법으로 몰면 GM이 한국에서 마티즈와 같은 차를 생산할 메리트가 사라진다는 투의 주장을 펼쳤다. 이 또한 우스운 얘기인데, 도대체 전세계 40여 개에 달하는 GM의 생산공장 중 한국과 같은 형태의 사내하청을 쓰고 있는 공장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또한 이번 판결은 한가지 더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애초 2005년에 노동부가 GM대우 창원공장 사내하청을 불법파견으로 판정할 때, 이례적으로 불법파견으로 사용해온 사내하청 노동자 약 800여 명의 명단까지 한명 한명 작성한 바 있다. 이번 고등법원 판결은 그 노동자를 사용해온 GM대우와 하청업체가 불법파견을 행해왔다고 판결함으로써, 사실상 800여 명에 달하는 사내하청 전원에 대해 불법파견 판정을 한 것에 다름 아니다. "대법원 판결이 나도 당사자 1명에게만 해당하는 것"이라고 주장해온 고용노동부장관과 현대기아차의 말이 억지주장에 지나지 않음을 확인해준 것이다.
한·중·일 자동차산업 비정규직 중 한국이 차별 가장 심해
한국노동연구원 조성재 연구위원은 계간 '노동정책연구' 2006년 여름호에 발표한 '한·중·일 자동차산업의 고용관계 비교' 논문에서 한국·중국·일본 3개국 자동차 산업에서 정규직과의 임금격차는 유독 한국의 경우에만 심각하게 크다고 발표한 바 있다.
그는 한국의 현대차, 중국의 상하이폴크스바겐, 일본의 도요타 등 3국 자동차기업들에 대한 방문조사·설문조사 결과, 현대차 사내하청과 정규직 1년차 임금수준을 비교했더니 기본급 기준으로는 80%, 평균임금 기준 67%에 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반면 일본과 중국의 경우 비정규직의 임금이 정규직 1년차와 거의 동일했으며, 다만 복리후생이나 사회보험 등에서 혜택이 다소 낮은 수준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전세계적으로 사내하청을 쓰고 있는 독특한 국가인 한·중·일 3개국 내에서조차 차별은 한국이 1위를 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글로벌 트렌드'이고 그 트렌드를 따르지 않는 곳이 어디인지 되물어봐야할 대목이 아닐까? 진심으로, 4년 전에 만났던 그 분의 논문이 하루빨리 발표되기를 기대해본다.
현대차 비정규직 파업을 통해 사내하청 문제와 관련한 전사회적 토론이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진실된 토론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우선 거짓주장, 허위주장부터 배제해놓는 것이 필요하다. 사내하청에 대한 일부 언론과 자본 측의 주장 상당수가 사실과 다르다. '진실 게임'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문제를 제기해달라. 필자도 책임있게 논쟁에 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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