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그룹이 강조하는 것처럼, 이번 인수전에 현대차그룹의 압력이 작용했다는 정황도 여러 군데서 나타난다. 통상적으로 입찰심사에는 재무적 요소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비가격 요소의 심사 비중을 키울 경우 자의적인 해석의 여지가 넓어져 비리 의혹이 제기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현대건설 채권단의 본래 태도도 대동소이했다. 그런데 현대건설 매각 최종 입찰일을 나흘 앞둔 지난달 11일, 유재한 정책금융공사 사장이 돌연 "비가격 요소도 중요해진다"는 입장의 보도자료를 뿌렸다. 현대그룹이 승리한 이후 현대차그룹은 매각 주관사인 외환은행과의 거래를 끊겠다고 채권단을 압박했다. 현대그룹 측이 "우선협상대상자 선정 이후 현대차가 입찰규정상 '이의제기 금지' 조항을 어겼다"며 "채권단이 처음부터 현대차그룹에 주려다 안 되니 뒤늦게 판을 뒤집었다"고 분통을 터뜨리는 이유다.
이미 현대차그룹으로 방향을 튼 채권단이 현대건설이 보유한 현대상선 지분 8.3%를 현대그룹이 보유할 수 있도록 유도하겠다는 당근을 제시했으나, 현대그룹이 이를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채권단이 지분 변동을 두고 이래라 저래라 할 능력이 없고, 의혹들이 생긴 마당에 백기를 들 심정도 아닐 테다.
그러나 현대그룹의 편을 들어주기도 어렵다. 아니, 이번 인수전에 참여한 현대그룹과 현대차그룹 모두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두 그룹이 현대건설을 필요로 했던 건 과거 현대그룹의 상징을 되가져와 정통성을 이어간다는 측면 외에도 그룹 경영권 승계 도구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라는 의심이 그간 많았다. 현대그룹은 시아주버니 그룹(현대차)과의 경영권 싸움에서 이기기 위한 도구로, 현대차그룹은 정몽구-정의선으로 이어지는 경영권 승계의 새로운 구심점으로 각각 현대건설을 필요로 했다는 게 골자다.
개별 그룹의 지분 구도와 경영권 승계 시나리오를 볼 때 매우 설득력 있는 설명이다. 기업 인수에서 가장 중요한 개별기업의 성장성, 계열사간 시너지 효과 등은 결국 뒷전이었던 셈이다.
어찌보면 진정 '비가격적인' 요소를 두고 한국의 거대한 두 재벌그룹이 경영판단을 한 근원에는 결국 '제왕적 지배력'을 가진 총수경영이 자리잡고 있다. 오직 총수일가의 안정을 위해 계열사들이 대규모 자금을 끌어들여 그룹의 미래 성장잠재력을 깎아먹는 출혈 경쟁을 벌이는 게 이번 현대건설 인수전의 밑그림이다.
현대그룹이 22일 각 언론사에 자료로 배포한 <월스트리트저널>의 보도를 보면, 이 신문은 "(이미 현대엠코를 보유한) 현대차그룹이 시너지가 거의 없는 건설사를 인수하려는 건 불확실한 전략이고, 정 회장은 잘못된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는 현대그룹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비판이다. 현대그룹은 '오직 총수일가의 지배력 강화를 위해' 정확한 내역을 알기 어려운 대규모 자금을 끌어들였고, 현대차그룹은 '오직 총수일가의 경영권 승계를 위해' 막대한 연구개발비를 투입해 성장력을 더 끌어올려야 할 자동차 산업의 미래를 갉아먹으려 하고 있다.
이번 인수전에서 현대그룹 계열사인 현대증권과 현대차그룹의 주축인 현대차그룹 노조가 모두 현대건설 인수를 반대했던 이유다.
결국 이번 인수전이 누구의 승리로 끝나든, 확실해지는 것은 단 하나다. (이 단어는 조심해서 써야 하지만) 여전히 한국의 재벌그룹을 움직이는 논리는 '전근대적'이다. 토지 등의 자산을 오직 핏줄에 따라 대물림하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은 조선시대가 끝난지 100년이 지나도록 사라지지 않았다. 한반도에서 이런 논리가 통하는 영역은 오직 두 곳, 북한과 재벌뿐이다.
▲서울 종로구 연지동 현대그룹 사옥. 현대건설 인수를 위해 현대그룹이 나서자 시장은 '승자의 저주'를 우려했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처참한 실패에도 불구, 이번 인수전에서 확인된 건 총수 일가의 안위가 한국 재벌그룹에 얼마나 중요한 판단요소인가를 재확인한 것밖에 없다. ⓒ뉴시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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