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국이네를 비롯한 원 주민들은 나쁘지 않다는 표정들이다. 서울로 빠지는 길이 하나 더 생기면 땅값도 좀 오르지 않겠느냔 것이 대체적으로 그들의 생각인 것 같았다.
그러나 외지에서 들어온 나 같은 사람들 생각은 틀렸다. 대금산 아래를 뚫고 터널이 생기고 길이 지나가면 자연을 훼손할 뿐 만 아니라 동네도 두 동강으로 갈라지고 농촌 고유한 맛은 사라지고 또 다른 개발바람이 불 것은 보지 않아도 뻔했다. 나는 이 도로가 생기면 이 두밀리에서 뜰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그 당시 손학규 도지사에게 이메일도 보내고 이 마을에 갖 들어 온 국회 사무처 직원 등 주민 몇 명이 민원(?)을 올려 겨우 동네 가장자리로 돌아가도록 설계변경을 할 수가 있었다. 이 관통도로는 그 후 시행청인 경기도가 예산이 부족해선지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 공사를 하지 못하고 있다.
또 최근엔 이런 일도 있었다.
고압 송전탑이 마을을 가로 질러 간다는 것이다. 마을에 좋지 않은 일은 마을 한 가운데 내 걸리는 반대 펼침막을 통해 알게 된다. 그런데 이 펼침막은 절골이 있는 3반 입구 도로 위에 만 걸려 있었다.
나중에 용국이 부부에게 들은 얘기로는 그 고압 송전탑이 3반, 절골마을 위로 지나간단다. 반과 반 사이는 대충 1~2Km 씩 떨어져 있다. 그러니 시급한 것은 3반, 절골마을이었고 다른 마을 들은 상대적으로 '소 지붕 위의 닭 쳐다보듯'하고 있었다.
술 마시다가 송전탑을 남의일 보듯이 하는 용국이 부부에게 기어이 한마디 했다. '내가 알기론 말이야. 이 고압송전탑이 지나가면 그 밑에 사는 사람들이 백혈병 등 좋지 않은 병이 생길 확률이 높은데... 그리고 생각해봐 경관으로 봐도 좋을 게 없고...
나중에 땅을 팔아야 되는 경우에도 뭔 마을 한 가운데 송전탑이 지나가는데 누가 땅 값을 제대로 쳐 주기나 할라구? 그러니 두밀리 전체가 나서 한꺼번에 반대를 하고 저쪽(마을 옆 쪽)으로 돌아가도록 하는 게 수야. 암 그게 수지.'
땅 값 운운 하니 그제야 부부의 표정이 좀 달라졌다.
또 이런 희한안 일도 있었다.
몇 년 전 어느 날, 내가 사는 4반 마을 입구에 생뚱맞은 펼침막이 내 걸렸다. 제목이 '두밀리 장뇌삼 작목반 장례식'이었다. 아니 이건 또 무슨 장례식 플랜카드? 그 전년부터 동네 주민들이 장뇌삼 작목반을 만들고 대금산 일대에 장뇌삼을 심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무슨 심각한 문제가 생긴 모양이다. 동네 문제를 제일 많이 알고 있는 주민 아무개씨를 만나 그 펼침막의 정체에 대해 물었다. 그랬더니 대번에 나에게 설명을 해준다. 마치 펼침막을 내건 주민들과 같은 생각이라는 듯이.
작년에 동네 주민들 중 몇 명이 산립조합(?)에서 몇 억 원의 저리 대출을 받아(아마 여기에는 농협이나 지자체의 지원금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장뇌삼을 대금산 일대에 심었다.
그런데 장뇌삼을 심은 땅이 군 땅인데 제대로 허가를 안 받았을 뿐 아니라 심은 장뇌삼 묘목도 부실한 묘목이라 제대로 크지 않는 것이 도처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누가 이를 투서해서 이 사업의 문제가 들어 났다. 투서의 고발자로 작목반의 주체세력(?)들이 마을의 한 두 주민을 지목하자, 갈등이 표면화되고 고발을 했다고 지목당한 주민들이 이 펼침막을 내걸고 마을의 문제로 비화시킨 것이 이 '장례식 펼침막'의 전모다.
얼마 안 있다 이 문제의 '장례식 펼침막'은 철거했지만 두고두고 내 뇌리에 주민들 간의 갈등과 소통부재의 사례로 남아 있다.
들어온지 10년 동안 이런 저런 사건들을 만나고 동네 주민들과 얘기를 나누면서, 주민들이 자기의 생업(주로 농업)에 바쁜 핑계로 마을의 공동문제에는 무관심하다는 걸 알았다.
마을의 주민 총회인 대동회에도 몇 번 참석한 적이 있다. 다른 마을과 비슷하게 1년에 한 번 열리는 대동회도 이장의 주도로 일방적으로 해 치우는 식이었다. 작년도 사업보고와 결산, 금년도 사업계획과 예산안, 임원(이장, 청년회장, 노인회장, 부년회장 가운데 요즘은 이장을 선거로 뽑는다고 한다)선출, 기타 안건 등으로 처리하는데 거의 일사천리였다.
이제 그 좋던 두밀리 마을은 몇 년 전부터 들어오기 시작한 펜션(다들 알다시피 처음엔 주민들이 운영하는 민박집으로 시작했다)들이 벌써 3, 40개가 넘어서 마을이 어수선하다.
옆집 용국이 사촌되는 용환아저씨(그는 이 마을의 상쇠였다)도 세상을 뜨고 얼마 안 있으면 경기북부 간선도로 공사도 시작 될 것이다. 마을 원 주민들 사이에 관혼상제 등 재래식 문화전통에는 서로 상부상조하는 강한 전통이 아직도 남아 있고 자기들의 생업에 온 정성을 바치지만 마을의 공통 문제에는 관심이 덜하다. 마을의 미래에 대해서도 모여서 의논하거나 걱정을 하는 것 같지도 않다.
나처럼 일주일에 한번 정도 들어 와 있는 사람이 그렇게 마을일에 개입할 여지도 없다.
답답한 마음에 술 한 잔 같이 하면서 용국이 부부에게 농 삼아 한 말 건넨 적이 있다.
'내가 얼마 안 있으면 은퇴를 하는데 그 때 여기 아예 눌러 앉아 이장 출마를 하면 그때 용국이가 지지해 주겠나?' 용국이가 받는다. '아 내가 밀어 드릴테니 하슈.'
그러더니 한 일 이 주 있더니 나에게 용국이가 진지하게 한마디 한다. '알아봤더니 (이 마을)이장은 60세 이상은 안 된다네요.'
두밀리 마을은 주택업자가 파헤치고 펜션들이 몇 십 개 들어 왔지만 아직도 넉넉한 편이다. 인간들이 좀비처럼 여기저기를 갉아 먹어도 자연은 아직도 우리를 품어 준다. 그러나 그 한계는 곧 들어 나지 않을까?
마을을 품고 있는 자연의 생태계 문제는 둘째 치더라도 더욱 큰 문제는 바로 마을 주민들끼리의 소통의 부재다. 마을의 문제를 공론화 할 수 있는 회의 구조 자체가 없다. 무슨 문제가 생기면 '장뇌삼 작목반 장례식' 경우처럼 플랜카드부터 내건다. 마을의 지도자가 없다는 점도 문제다. 또 펜션 등 외지인이 증가해 원 주민들과 따로 따로 사는 것도 소통부재의 원인이다.
두밀리 마을도 모든 주민들이 마을의 문제를 자기의 문제로 인식하고 적어도 주민들끼리 자치적인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는 날은 과연 올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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