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지난 1일 이란을 제재하는 법안에 서명하자, 국내 시중은행들은 일제히 '7월 9일 이후 이란과의 모든 금융거래를 금지한다'는 공문을 발송했다. 무역대금 결제가 막힌 셈이다.
A사 관계자는 "피해가 커질 것 같으니 은행에서 '공문발효 이전에 개설된 신용장(L/C)은 전과 동일하게 선적, 결제가 가능토록 해줄 것'이라고 했는데, 그게 무슨 소용이냐"고 답답해 했다.
임시방편으로 기존 계약분에 대한 제재 조치가 완화됐지만, 9일 이후 계약분에 대해서는 무역 결제를 금지하는 게 마찬가지니 결국 이란과 거래가 불가능하단 얘기다.
이 관계자는 "9일 이후에도 (이란의) 거래처에서 우리에게 내줄 신용장을 개설하려 했는데 이란의 거의 모든 은행이 제재 대상에 포함돼 안 된다더라"며 "이란에만 20년 넘게 수출했지만, 이번처럼 강경한 조치는 처음"이라고 혀를 찼다.
▲지난 1일(현지시간)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이란 핵 제재안에 서명하고 있다. ⓒEPA=연합 |
"수출업체 죽으란 소리"
미국과 유럽연합(EU)이 연달아 이란에 경제 제재 조치를 내리면서 2000여 곳이 넘는 국내 이란 수출업체들에 비상이 걸렸다. 현금 거래가 되지 않으니 수출업체로서는 살 길이 막혀버린 것이다.
A사의 경우 이란의 대형 완성차 조립업체에 핵심부품을 공급해왔다. 당연히 핵 관련 제품이 아닌데도 국내 은행들은 미국, EU의 보복을 두려워해 지나치게 엄격한 잣대로 기업들을 옥죈다는 게 기업인들의 주장이다.
이 관계자는 "신규 제품 개발에 참여한 업체의 2차, 3차 피해가 얼마나 클지 은행에서 상상이나 해봤는지 모르겠다"며 "수십년 간 피땀 흘려 쌓은 이란업체와의 관계까지 잃게 됐다. 이대로라면 회사의 존속 여부가 위협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란의 자동차 시장은 매우 커, 현지에 있는 기아자동차 공장은 프라이드 모델의 한해 생산량만 50만 대에 달한다.
중동시장 비중이 특히 큰 건설업계도 심상찮은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미국의 제재안이 발표된 지난 1일 GS건설은 "작년 10월 이란 국영회사인 파스석유가스공사(POGC)에서 수주한 1조4161억원 규모의 가스탈황시설 공사 계약이 미국 및 유엔(UN)의 제재로 인해 파기됐다"고 공시했다.
GS건설의 작년 매출액이 7조3769억 원이니, 제재안으로 인해 이 회사는 한해 매출의 5분의 1에 달하는 대형 프로젝트를 앉아서 잃게 된 셈이다. 국내 건설업계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이란 시장에 진출했던 대림산업 역시 향후 전망이 불투명한 상황이다.
이와 관련, 코트라(KOTRA) 관계자는 "정확한 집계는 어렵지만 이미 3억~4억 달러 정도의 결제 대금이 묶인 것으로 파악된다"고 밝혔다.
"정부서 해결책 못 내면 이란시장 잃을 것"
문제는 한국만이 유독 미국 눈치를 살피고 있어, 국내업체의 피해가 다른 나라에 비해 더 두드러진다는 점이다.
기업인들의 말을 종합하면, 일본의 경우 국내 심사를 거쳐 핵무기 관련 품목이 아닌 것만 확인하면 종전처럼 정상적인 수출을 허용하고 있다. 다른 나라 역시 마찬가지다.
한 기업인은 "중국은 이란과의 거래를 금지할 필요도 없다는 입장"이라며 "미국의 제재안에 불복해 오히려 제재 조치의 반사이익을 고스란히 누리고 있다"고 강조했다.
상대적으로 강경한 수출 제재를 받는 한국기업이 피해를 보는 동안 한국과 비슷한 수출시장을 공유하는 일본과 중국 등이 이익을 누리게 됐다는 얘기다.
특히 지정학적 위험에 대한 대비력이 떨어지는 중소기업의 피해가 더욱 클 것으로 우려된다. 국내 최대 자동차 부품업체인 현대모비스는 그나마 두바이 현지법인을 통해 이란에 부품을 공급하고 있다. 물류, 배송, 재정 부문에 대한 현지 보험에도 가입해 당장 금전적 손실은 최소화할 수 있다.
그러나 A사와 마찬가지로 위험 대비책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중소기업들은 앉아서 손실이 늘어나는 것을 볼 수밖에 없다. 정부에서 보다 정밀한 조치를 내놓지 못한다면 100억 달러에 달하는 교역시장에서의 경쟁력이 순식간에 뒤흔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일단 정부는 지난 12일 관련부처 합동으로 현대자동차·대우인터내셔널·LG상사 등 대기업과 회의를 마련해 대책마련에 나섰으나 아직 이렇다할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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