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계조사·설문조사의 맹점 중 하나는 설문 문항이 어떻게 설계되느냐에 따라 설문지 작성자의 의도대로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위 보고서는 '파견근로자 사용에 대한 노동시장 수요조사'라는 명목으로 사용자들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를 인용하고 있는데, "파견대상업무가 전면 확대되었을 때 파견수요가 늘어나는가" 여부를 핵심 문항으로 하고 있다. 아니, 파견대상업무가 확 늘어난다는데 당연히 사용자들 입장에서는 파견노동자를 쓸 일이 더 늘어난다고 답하지 줄어든다고 하겠는가?
그러나 오늘 얘기하려고 하는 것은 단순히 설문조사가 제대로 설계되었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다. 파견 허용업종이 늘어나면 비정규노동, 불안정노동이 늘어날 것이라는 당연한 우려를 반복하려는 것도 아니다. 겉으로는 '파견허용 확대'를 얘기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프로세스의 뒷면에 숨어있는 것, 즉 이명박 정부가 만들어내려고 하는 '노동유연성 강화'의 핵심이 무엇인가 하는 지점이다. 그 핵심을 알고 나면 파견허용 확대 계획은 그저 빙산의 일각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마침내 표면에 오른 제조업·건설업에의 파견 허용
1998년 7월 1일 파견법이 시행된 이래로 파견노동과 관련하여 민주당 정권이건 한나라당 정권이건 차이를 보이지 않는 부분이 있다. 바로 파견 허용업종을 지속적으로 늘려가다가 종국적으로는 파견법이 원천적으로 금지하고 있는 제조업과 건설업까지 파견노동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겠다는 계획이다. 특히 파견노동 금지의 보루로 간주되고 있는 제조업에까지 파견을 허용한다는 것은 사실상 모든 업종에 자유롭게 파견노동자를 사용하도록 문을 활짝 열어준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이웃나라 일본에서 10여 년 전에 제조업까지 파견의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가 엄청난 청년 실업과 불안정노동, 묻지마 범죄 등 심각한 사회적 문제를 낳았다. 최근 일본 정부 차원에서 제조업 파견과 한시적 파견을 금지하는 법 개정에 나섰다. 한국에서 제조업을 비롯해 파견허용업종을 전면적으로 열어줄 경우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에 대한 얘기는 생략하도록 하겠다. 국제 표준과 추세에 역행하는 이명박 정부의 정책방향이 어디 한두 개이던가?
그러나 분명히 달라진 점이 하나 있다. 그동안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는 지속적으로 파견업종을 확대하겠다는 얘기를 해왔다. 비록 속내는 제조업으로까지 파견을 허용하고 싶더라도 공식적으로는 "제조업 파견허용은 현 시점에서 전혀 검토하고 있지 않다"는 입장을 내보내곤 했다. 제조업 파견 허용은 단순한 파견업종 확대 문제와 달리 강력한 민주노조가 들어서 있는 제조업 노동조합들의 반대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파견업종 확대문건에서는 공공연하게 제조업까지 파견을 허용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제조업만 얘기했지만 건설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보고서는 파건허용업종 확대와 관련한 4가지 시나리오를 제시하고 있는데, 이 중에서 시나리오 4의 경우에만 시행령 개정을 통한 허용업종 확대를 하는 계획이고, 나머지 시나리오 1~3의 경우에는 본법인 파견법을 개정해야만 가능한 건설업·제조업까지로의 파견 허용을 포함하고 있다. 이렇게 대담한 계획이 공식 보고서의 형태로 공개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 노동부의 '파견대상 업무 및 파견근로자 활용실태조사' 보고서에 제시된 4가지 시나리오. |
노동유연화의 MB 버전 : 고용서비스 선진화
제조업·건설업까지 파견을 허용하겠다는 계획이 공개적으로 나온 것 자체도 충격적이지만 사실 이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는 노동유연화 계획표에 있는 하나의 각론일 뿐이다. '비즈니스 프렌들리' MB 정권이 추구해온 총론적인 계획은 훨씬 대담하다.
이명박 대통령이 '노동유연성'을 국정 최대 과제로 제시한 시점은 지난해 5월 7일 비상경제대책회의에서였다. 당시 이명박 대통령은 그저 캐치프레이즈 수준에서 '노동유연성 강화'를 얘기한 것이 아니었다. 이 회의에서 보고와 논의가 이뤄진 후, 다음날인 5월 8일자로 노동부·기획재정부·한국개발연구원 공동 명의로 하나의 방침이 발표됐다. 바로 '고용지원 분야 서비스산업 선진화 방안(이하 고용서비스 선진화 방안)이다.
고용서비스 선진화 방안의 핵심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국가나 공공부문이 담당해야 할 실업해소, 일자리 알선, 직업소개 업무를 대폭 줄이고 민간 직업소개소를 활성화하여 이관하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민간 고용서비스 부문(직업소개 등)의 규제를 대폭 완화하는 것이 필요한데 여기에는 직업소개 수수료 제한 자율화, 즉 수수료 상한선을 폐지하여 직업소개 자본가들의 이윤을 늘려주는 것이 핵심이다.
또한 '파견허용업종 확대'를 통해 어떤 업종에서건 자유롭게 직업소개와 근로자파견을 할 수 있도록 규제를 풀어주는 것도 포함된다. 다시말해 파견허용업종 확대는 고용서비스 선진화 방안이라고 하는 MB 정권의 고용정책 총론의 일부분일 뿐이며, 오히려 더욱 주목해서 봐야 할 대목은 민간 고용서비스 부문의 규제를 풀어주는 대목이다.
쉽게 말해 민간 직업소개소 설립을 장려하고 지원하겠다는 것에 다름없다. 그러면 어째서 국가가 해야 할 실업 해소, 직업 알선 업무를 민간에 떠넘기려 하는 것일까? 그것은 리먼브라더스 사태 이후 격화되는 세계대공황으로 인해 제조업 자본의 이윤율이 떨어지게 되자, '직업소개업'이라는 신규 업종을 활성화하여 자본가들의 이윤율을 만회해주겠다는 것이다. 즉 직업소개소를 차려서 대형화함으로써 수십만·수백만 노동자들로부터 수수료를 받아 챙겨먹는 돈벌이 수단을 제공하는 것이다.
노융(勞融)산업 육성 : 노동력을 사고 파는 자본가 살리기
지난해 6월 18일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은 한국개발연구원(KDI)을 비롯한 9개 국책 및 민간 주요 경제연구기관장들을 만나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하반기 경제운용 방향 등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를 가진 바 있다. 이 자리에서 박기성 당시 노동연구원장은 "자금을 중계하는 금융(金融)서비스처럼 노동을 중계하는 '노융(勞融)서비스' 산업을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고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기성 전 원장은 한때 "노동 3권을 헌법에서 삭제해야 한다"는 말로 논란을 빚었고 지난해 노동연구원 노동조합에 대한 단협해지로 연구원들의 장기파업 원인을 제공했던 전력이 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노융산업'이란 말은 생소한 단어이긴 하나 그의 말을 풀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돈을 빌려주는 산업이 금융산업이라면, 노융산업은 노동력을 사고 파는 산업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노동력을 돈처럼 사고 파는 물건처럼 취급하는 것 자체가 놀랄 일 아닌가? 게다가 박기성 전 원장의 발언은 고용서비스 선진화 방안이 발표된지 꼭 한 달 만에 나온 말로 MB 정권의 고용정책이 일관된 맥을 갖고 추진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면 도대체 고용서비스 선진화와 파견허용업종 확대는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현재 한국의 민간 고용서비스 산업, 즉 직업소개업의 실태를 보면 대다수가 일용직 노동시장 또는 초단기 고용시장에 몰려 있는 상황이다. 물론 파견업의 경우도 고용기간 2년 미만의 단기 고용시장에 몰려 있기는 하나, 그래도 직업소개업이 집중되어 있는 분야보다 고용기간이 '상대적으로' 긴 편이다.
이명박 정권은 바로 이 파견업 시장과 직업소개업 시장을 통합하려는 것이다. 어차피 파견업이나 직업소개업이나 노동력을 사고 팔기는 마찬가지이니, 이 시장들을 통합해주면 직업소개소나 파견업체를 대형화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되면 그동안 직업소개업이 너무 영세하여 이윤율이 낮아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재벌을 비롯한 거대 자본이 이 시장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할 것이다.
그 결과는 어떠한 현실로 다가오게 될까? 조금 비꼬아 얘기하자면 이제 제조업 대공장 문 앞에 직업알선소를 차려놓고 하루하루 공장에 필요한 인력을 조달하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 아니, 복잡한 제조업 공정들에 숙련도도 높지 않은 일용직 사용이 가능하겠느냐고? 이미 몇몇 지역의 소규모 공단에서는 파견업체들이 수십명씩을 모집하여 작은 공장들에 하루하루 투입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이미 유사한 일이 벌어지고 있기도 하다. 2년 전부터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사내하청 중 5~10퍼센트가 일당제 고용형태로 채워지고 있다.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연월차를 쓰거나 예비군 훈련 등으로 출근을 하지 못하는 일이 벌어지면 곧바로 아르바이트생이 투입되어 하루하루 일을 땜질하는 일도 많다.
파견허용업종 확대의 프로세스
여기서 이런 질문을 하는 이들이 있을 수도 있다. 아니, 제조업에는 파견이 금지되어 있다면서 어떻게 일당제로 파견을 쓴다는 말인가? 파견법에 따르면 제조업과 건설업은 파견이 원천적으로 금지되는 업종이기는 하지만 '3개월 미만의 임시·간헐적 업무'에 한해서는 제조업과 건설업에도 파견이 가능하다.
그렇기에 '일용직 파견'이 현실화된다면 굳이 파견허용업종을 늘리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제조업·건설업에도 파견노동자를 쓸 수 있다. 어차피 3개월 지나고 나면 잠시 해고했다가 1~2주 뒤에 다시 3개월짜리 파견직으로 사용하면 그만이니 굳이 기간에 구애받을 필요도 없다. 그리고 그 기간 어겼다고 정부가 파견업주의 위법행위를 적발하여 처벌하려고 애쓰지도 않는데 더더욱 법을 지켜야 할 이유가 없어진다.
그렇다면 다른 질문. 3개월 미만의 업무에서 자유롭게 파견노동자를 사용할 수 있는데 굳이 정부가 여론악화를 감수하면서까지 파견허용업종을 늘리거나 제조업·건설업으로 확대를 위해 파견법 개정이라는 카드를 밀어붙일 이유가 있는가?
그렇다. 단순히 파견허용업종 확대의 문제라면 이명박 정부나 자본가들은 파견법 개정에 목을 맬 필요가 없다. 지금도 얼마든지 제조업·건설업에 파견노동자를 자유롭게 사용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MB 정권이 추구하는 것은 단순히 파견허용업종 확대가 아니라 민간 직업소개소를 늘리고 활성화하여 정규직을 대폭 줄이고 단기고용 노동자들을 늘리겠다는 훨씬 야심찬 계획이다.
그래서 정부도 당장 파견허용업종 몇 개를 늘리는 데에 목을 매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파견허용업종을 늘려야 할 필요성, 민간 고용서비스 시장과 직업소개소를 확대해야 할 필요성을 광범하게 선전하는 쪽에 초점이 맞춰져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대응 역시 단순히 '파견허용업종 확대 반대한다' 수준에 머물러서는 곤란하다. MB 정권의 총론에 맞서는 우리의 총론이 세워져야 한다.
선진화 매트릭스 : 일당제와 아르바이트생으로 채워지는 노동시장
여기에 이러한 논의가 지난해 5~6월에 집중되었던 점을 상기해보자. 그때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가? 쌍용자동차에서 3천명에 달하는 대규모 구조조정 공격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럼 이제 우리의 추리는 한발짝 더 나아갈 수 있다. MB 정권의 고용정책이 앞에서 말한 일당직, 아르바이트생 고용형태를 대규모로 늘리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당직, 아르바이트생을 대규모로 투입할 일자리는 어떻게 만들겠다는 것인가? 바로 쌍용자동차에서 벌어진 것처럼 정규직에 대한 대대적인 정리해고를 통해서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 파업 당시 쌍용자동차 노동자들 ⓒ프레시안 자료사진 |
1998년 IMF 경제공황을 전후로 한국의 노동시장은 비정규직이 전체 노동자의 60퍼센트 가량을 차지하게 되었다. 비정규직이 소수자가 아니라 노동계급의 보편적인 존재형태가 되었다는 말이다. 뒤집어서 말하면 당시 자본가들은 정규직의 일자리를 비정규직으로 대체함으로써 경제공황을 벗어날 수 있었다.
이제 IMF 경제공황보다 더 길고 파괴적인 세계대공황이 전개되고 있다. 이번에 자본가들이 선택한 길은 더욱 참담하다. 정규직이건 비정규직이건 가리지 않고 다수의 일자리를 일당직이나 아르바이트생으로 쓸 수 있도록 구조를 바꾸겠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고용서비스 선진화'의 실체이다.
영화 '매트릭스'는 극도의 정보 통제를 통해 인간들이 실제로 살아가는 끔찍한 삶의 실체를 보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매트릭스가 제공하는 정보와 신호만을 받게 하여 '이 세상은 살만한 것'이라는 가공의 인식을 심어주는 세상, 즉 실체와 인식의 극단적인 분리를 보여준다. "고용서비스를 개선하여 일자리 알선을 더 잘하도록 하겠다"는 미명 하에 '선진화'라는 말로 포장되어 있지만, 결국 일당직이나 아르바이트생 등 초단기 고용 노동자층을 대규모로 양산하는 끔찍한 미래 사회의 실체가 바탕에 깔려 있다.
노동부의 '파견대상 업무 및 파견근로자 활용실태조사' 보고서가 폭로된 후 민주노총·금속노조를 비롯한 각급 노동조합과 사회단체들의 "파견허용업종 확대 음모 반대한다"는 기자회견과 성명서가 줄을 이었다. 물론 그런 활동은 필요하고 더 확대되어야 마땅하겠지만 MB 정권이 추진하는 고용정책의 총론이 무엇인지에 대한 제대로된 분석 속에서 대응방향이 나와야 할 것이다.
'매트릭스'에서는 자신들이 살고 있는 끔찍한 삶의 현실적 실체가 무엇인지를 알게 된 이들이 매트릭스로부터 해방되기를 꿈꾸며 저항에 나서게 된다. 어쩌면 핵심은 여기에 있다. '선진화'라는 포장에 속지 말고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는 사람들을 조직하고 저항에 나서는 것. 일당직, 단기계약직, 파견직으로 내몰리고 있는 이들 속에서 현실을 직시하는 이들이 탄생하는 것이야말로 MB 정권의 고용정책 총론에 맞서는 확실한 길이다. '매트릭스' 1편의 엔딩 크레딧과 함께 RATM(Rage Against The Machine)이라는 그룹이 부른 한 곡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Wake 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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