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1일부터 '기간제 및 단시간 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면서 터져 나올 것으로 예상됐던 차별 시정 신청이 전무해 정부 당국을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다고 한다. 7월 16일 현재 전국의 지방노동위원회를 통해 접수된 비정규 노동자의 차별시정 신청은 단 한 건도 없었다.
이 법에 따르면, 기간제 근로자(일하는 계약 기간이 1년, 2년 따위로 기간이 정해져 있는 근로자), 단시간 근로자, 파견 근로자는 차별을 당했다고 생각될 경우 차별 처우를 받은 날로부터 3개월 안에 정부기관인 중앙노동위원회 산하 12개 지방노동위원회에 차별 시정을 신청할 수 있다.
차별 시정 신청이 한 건도 없는 이유
비정규직 차별시정 신청이 단 한건도 없는 이유는 크게 보아 다음 세 가지다. 첫째, 비정규직 문제의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별다른 홍보를 하지 않아서 이런 제도가 있는지도 모르는 비정규 노동자들이 대부분이다. 둘째, 비정규노동자들이 차별시정 제도를 알아도 사용자에 찍혀 회사에서 잘릴 게 두려워 감히 시정 신청을 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셋째 2007년 7월 1일부터는 300인 이상 종업원을 둔 사업장만 적용되기 때문에 300인 미만의 업체에서 일하는 비정규노동자들에게는 이 제도가 아직은 '그림의 떡'이다. (100~299인 사업장은 2008년 7월 1일, 5~100인 미만 사업장은 2009년 7월 1일부터 이법의 적용을 받는다.)
우리 사회의 빈익빈부익부를 심화할 것이 분명한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을 찬성하는 언론 광고를 위해 국정홍보처는 올 들어 천문학적인 액수의 국민 세금을 퍼부었지만, 비정규직의 차별 시정 신청 제도를 국민에게 홍보하는 광고를 내는 데는 단 한 푼도 쓰지 않았다. 담당 부처인 노동부와 중앙노동위원회도 '나 몰라라'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노동조합도 마찬가지였다. '비정규직 보호법'이 아니라 '비정규직 양산법'이라며 현행 비정규법에 반대했던 민주노총이야 원래부터 반대했으니 그렇다손 치더라도 현행 법률에 찬성했던 한국노총도 차별시정 제도에 관해 일반 국민은 물론 산하 노조들에조차 제대로 알리지 않았다.
노동조합의 차별 시정 신청을 가로막은 비정규법
법 조항 자체도 문제가 크다. 차별 시정 신청 자격은 비정규 노동자 당사자에게만 주어진다. 노동조합 같은 노동자 단체는 신청자격이 아예 없다. 하루하루가 버거운 비정규 노동자들이 자신을 보호해줄 수 있는 노동조합이 없는 상황에서 스스로 알아서 챙기기엔 법제도의 현실이 너무나 높고 팍팍하다.
민주노총 같은 노동조합 조직들이 정규직노동자들의 이익만 대변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던 정부나 자본은 노동조합에게 비정규직 차별시정 신청 자격을 주어야 한다는 주장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었다. 이런 사정을 돌아볼 때, 국가기관인 노동위원회에 비정규직 차별시정 신청이 전무한 현실은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하다.
2005년 봄 비정규노동자 관련 2개 법안, 즉 '기간제 및 단시간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안'과 '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중 개정법률안'이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었을 때 국가인권위원회가 의견표명을 한 적이 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비정규직의 남용을 방지하기 위해 기간제 근로자의 사용을 합리적인 사유가 있는 경우에 한하여 제한적으로 허용하도록 '사유 제한' 규정을 두어야 하며, △'동일노동 동일임금' 규정을 명문화함으로써 가장 중요한 근로기준인 임금에 있어서만큼은 차별 처우에 대한 객관적인 기준을 마련할 수 있도록 하고, △파견 근로자의 업무 허용 범위를 일정한 업종에 한하여 제한적으로 인정하는 방식으로 규율하되 사용 사업주가 파견 근로자를 사용 허용 기간을 초과해 사용할 때는 '직접 고용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조항을 유지하며, △파견 근로자의 노동3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입장을 내놓았었다.
이에 대해 당시 여당과 정부 안에서 비정규법을 책임지고 있던 이목희 의원과 김대환 노동부장관은 "인권위의 월권"이니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식으로 천박하게 반응했었다.
국가인권위, "현행 법으론 비정규직 인권 보호하기 어렵다"
2001년 유엔사회권규약위원회는 한국에서 비정규직이 급증하는 현상에 대한 우려를 표명한 바 있다.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주요 회원국들인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스웨덴, 포르투갈 등은 기간제 고용의 사유제한을 통해 비정규직 고용을 규제하고 있다. 노조 조직률이 낮고 노동시장 유연화가 심한 포르투갈, 스페인, 프랑스 등에서는 파견근로도 제한하고 있다.
이러한 해외 사정을 고려하여 국가인권위는 <2007~2011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 권고안>에서 "비정규직 고용을 합리적 사유가 있는 경우로 제한하여 비정규직 남용을 방지하고, 비정규직 고용을 허용하는 사유를 제한적으로 법률에 명시하여 객관적ㆍ합리적 사유가 있는 경우에만 비정규직 고용을 인정"해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다.
물론 노동시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를 법으로 규율할 수는 없다. 하지만, '기간제노동자는 2년 이상 쓰면 안 된다'는 현행법의 조항만으로는 비정규직의 불필요한 남용과 고용에서의 차별을 막아내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 이랜드 사태로 입증되고 있다.
2005년 4월 비정규법을 둘러싼 논란이 일었을 때, 국가인권위원회는 "정부가 비정규직 법률안을 통해 비정규직 근로자에 대한 불합리한 차별 시정 등 인권 개선을 위해 노력하려 한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하지만, 정부의 비정규직 법률안으로는 이미 과반수에 달하는 비정규직의 규모를 축소하고, 비정규직 근로자에 대한 불합리한 차별을 시정하며, 비정규직 근로자의 노동인권을 보호하기에 충분하지 못하다"고 주장했었다. 오늘의 이랜드사태는 국가인권위원회가 옳았음을 보여준다.
정부는 "비정규직법이 제대로 시행될 수 있도록 노사가 협력하자"고 말하지만, 현행법 조항으로는 "비정규노동자에 대한 불합리한 차별을 시정하고 이들의 근로조건 보호를 강화함으로써 노동시장의 건전한 발전에 이바지"한다는 입법 목적을 이루기는 불가능해 보인다.
빠른 시일 안에 노동조합에게도 노동위원회에 차별시정을 신청할 자격을 주는 방향으로 법제도의 개선이 이뤄져야 하겠고, 중장기적으로는 국가인권위원회가 권고한 △비정규직 사용 사유의 제한,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법제화, △비정규직에 실질적인 노동3권 보장 등의 내용으로 비정규법이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대기업 소유주와 주주의 고통분담이 절실하다
이상수 장관은 '비정규보호법의 안착을 위한 노사정 합의문'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비정규직법은 차별해소와 남용방지가 목적"이라고 말했지만, 현행 비정규법의 조항들을 살펴보면 그 '목적'을 뒷받침해야 할 장치들이 부족한 게 사실이다. 이상수 장관은 "2년 기한 제한조차 기업에 부담이 되기 때문에 이런 (이랜드) 사태가 발생했는데 '사용 사유 제한'을 도입하면 더 큰 혼란이 올 것"이라고도 말했다.
이랜드의 경우, 독실한 기독교도인 사장은 마치 교회에 '십일조'를 내는 것처럼 연 매출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100억 원에서 130억 원을 매년 사회에 환원한다고 한다. 이런 사정에도 회사의 능력이 안 되어 100만 원 받는 비정규 노동자를 150만 원 받는 정규직 노동자로 전환할 수 없다는 억지를 부리고 있다. 노동부는 그 흔한 국세청 세무조사 한번 요청하지 않으면서 회사가 어렵다는 주장을 앵무새처럼 되뇌고 있다.
사실 130억 원이면 2000명이 넘는 비정규직의 임금을 1년 동안 정규직 수준과 동일하게 올려줄 수 있는 돈이다. 비정규직 문제가 심각했던 포르투갈은 2001년 비정규직의 사용사유를 제한하는 법률을 도입했지만, 그 때문에 잘 나가던 기업이 망했다는 이야기는 지금껏 나오지 않고 있다. 비정규직 사용제한을 명시한 법률을 갖고 있는 다른 나라들의 사정도 마찬가지다.
IMF 이후 지난 10년 동안 노동자와 서민의 경제는 어려워졌지만, 기업 경제는 대단히 좋아졌다. 특히 노무현 정권 아래서 주가는 2000에 육박하고, 부동산 자금은 사상 최대로 풀렸고, 수출은 사상최대를 기록하고, 외환보유고 역시 세계적 수준이다. 그 대부분의 경제적 혜택이 종업원수 300인 이상 대기업의 소유주와 주주의 수중에 들어갔다. 비정규직 문제의 해법은 이들에게 '고통분담'을 요구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사실상 '십일조'와 같은 돈을 130억 원이나 내면서도 차별을 시정했다고 해서 혼란이 오는 수준밖에 안 되는 기업이라면, '사회 환원'이라며 130억 원이나 내면서도 비정규직을 '착취'해야 살아남는 수준의 기업이라면, 사장의 생색을 내기 위해 130억 원이나 내면서도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 시정에 인색한 기업이라면 국민경제 전체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 차라리 문 닫는 게 나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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