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자동차는 파업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생산차질액까지 미리 추산해 파업을 주동한 노동조합 지도부를 업무방해 혐의로 경찰에 고소하고, 파업 참가 조합원에 대해서는 '무노동 무임금' 원칙을 적용한다고 엄포를 놓았다. 청와대의 지시를 받은 경찰 역시 금속노조 지도부 23명에 대해 핸드폰 문자메시지와 퀵 서비스라는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출석 요구서를 보냈다. 이도 모자라 체포영장을 발부받아 강제구인에 나선 상황이다.
정부, '금속노조 파업'을 '민주노총 총파업'으로 둔갑시켜
노동부, 법무부, 산업자원부 장관도 28일 (둔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정치적 의도가 있는 것인지) 민주노총과 금속노조를 구분하지 얺고 "금속노조의 파업"을 "민주노총의 총파업"으로 둔갑시킨 담화문을 냈다. 그들은 이번 파업을 "근로조건 개선과는 관계없는 정치 파업으로 명백한 불법이며 (…) 조합원의 의사도 묻지 않고 강행하는 것은 절차적으로도 불법"이라고 규정했다. 나아가 "노동조합 집행부는 물론 집행부가 아니더라도 불법 파업을 주도하는 세력에 대해서는 '무관용의 원칙'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불이익이 반드시 따르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3개 부처 장관 담화문에서 정부는 "민주노총"이 "조합원들의 의사도 묻지 않고 파업을 강행해서 불법"이라고 했다. 하지만, 국민과 국회의 의사를 묻지 않고 FTA를 강행하는 정부의 불법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정부 스스로 절차적 민주주의를 내팽개치면서 역설적으로 노동조합에게 절차적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모습은 볼썽사납다.
정부는 이번 파업이 "근로조건 개선과는 관계없는 정치파업이라서 불법"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의 바탕에는 FTA가 노동자의 근로조건에 별다른 변화나 영향을 가져오지 않을 거라는 자기기만적인 인식이 깔려 있다. 미국과 FTA를 하게 되면 혜택 받는 계층이 생기고, 손해 보는 계층이 생기는 게 당연한 데도 말이다.
FTA 찬성론자나 반대론자 모두, FTA의 최대 수혜계층이 대기업과 부유층이라는 데 인식을 같이 한다. 다만 찬성론자는 FTA로 대기업과 부유층에 더 많은 부가 쌓이면 '넘쳐흐르는 물이 바닥을 적시듯' 중소기업과 하층계급에게도 혜택이 돌아갈 것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반대론자는 FTA가 체결되면 빈익빈 부익부가 심해지면서 중산층이 몰락해 '20대80의 사회'를 넘어 '10대90의 사회'가 등장할 것으로 우려한다.
한미 FTA가 노동자의 근로조건과 무관하다고?
미국과의 FTA 체결은 좋은 방향이든 나쁜 방향이든 국민의 절대다수를 이루는 노동자의 근로조건에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다. 이번 FTA 저지 파업을 주도하는 금속노조의 15만 명 조합원 가운데 임금이 올라가는 조합원도 생기겠지만, 내려가는 이도 생길 것이다. FTA는 기업 간 경쟁을 심화시킬 것이기 때문에 노동시간과 작업강도의 변동도 가져올 것이다. FTA는 법제도에도 바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국민건강보험 같은 거시적인 제도에서부터 작업장의 보건안전 같은 미시적인 환경에 이르기까지 노동자의 근로조건과 생활에 다양한 변화를 가져올 게 뻔하다.
FTA가 근로조건 개선과 관계가 없다는 이야기는 "우리가 먹는 밥이 우리가 누는 똥과 관계가 없다"는 이야기만큼이나 황당한 것이다. 국민이 내는 세금으로 꼬박꼬박 월급을 받는 (그것도 법정 최저임금의 10배, 노동자 평균임금의 5~6배가 넘는 월급을 받는) 고급관료의 근로조건이야 FTA가 체결되더라도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겠지만, 일반 노동자의 사정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FTA가 문제인 것이다.
한미FTA가 체결되더라도 먹고사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는 팔자 편한 장관들의 담화문은 다음 대목에서 절정에 이른다.
"특히, FTA로 최대 수혜를 받을 것으로 예상되는 완성차 부문에서 파업을 추진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근로조건이 열악한 영세·협력업체 근로자들의 어려움을 도외시한 무책임한 행동입니다."
노무현 정권 들어 정부는 틈만 나면 '대기업 노동조합의 이기주의'를 욕해왔다. 대기업 노동조합이 자기 이익만을 위해 파업하고 활동한다고 비난해왔다. 그러던 정부가 이제는 "최대 수혜를 받을 것으로 예상되는 완성차 부문"의 노동조합들이 자기만의 이익이 아닌 중소영세업체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어려움을 가중시킬 게 뻔한 한미 FTA를 저지하기 위한 파업에 나선다고 야단이다.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이 자기 이익을 위한 파업에 나서면 '이기주의'고, 자기보다 형편이 못한 노동자들을 위한 파업에 나서면 '불법적인 정치파업'이라고 흥분하는 정부의 처사를 두고 뭐라고 해야 할까. 당하면서 닮는다고 했던가. 자기 입장이나 주장과 맞지 않으면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딱지를 붙이고 발목을 잡는 행태가 <조선일보>만의 것은 아닌 듯해 씁쓸하기 짝이 없다.
국어사전에도 없는 '정치파업'이란 말
사실 '정치파업'이란 말은 노동운동에서 사용하는 용어가 아니다. 주로 극우파나 극좌파가 즐겨 쓰는데, 극우파는 모든 형태의 파업을 불온시하고 불법화하기 위해, 극좌파는 파업을 국가권력의 타도로 이어가기 위해 '정치파업'이란 말을 즐겨 사용한다. 자기 사업장에 해당하는 직접적인 문제가 아닌데도 일으키는 파업을 두고 노동운동에서 흔히 쓰는 말은 '동맹파업', '동정파업', '연대파업'이다.
'경제파업', '사회파업', '문화파업'이란 말이 터무니없듯이, '정치파업'이란 말도 내용 없는 빈말이다. 파업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로 일일이 쪼갤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경제적인 요구를 갖고 시작하는 파업도 자연스럽게 정치적인 성격을 띠게 마련이며, 자연스럽게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파장과 영향을 가져오며, 결과적으로 노동자의 정신과 의식을 새롭게 구성한다. 그래서 노동운동사를 보면 "파업은 노동자의 학교"라는 격언이 자주 등장한다.
우리 헌법과 노동법은 노동자들과 노동조합에게 단체행동권, 즉 파업권을 보장하고 있다. 물론 파업권을 무제한으로 허용하는 것은 아니다. 살인, 상해, 불법감금 같은 폭력행위나 시설파괴 행위를 동반한 파업은 철저하게 금지된다. 국제노동기구(ILO)의 기준도 마찬가지다. 한미 FTA 저지를 위한 금속노조의 파업에서 살인, 상해, 불법감금, 시설파괴 행위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구속 노동자 수, 김영삼 정권보다 훨씬 많아
최장집 교수는 27일 <프레시안> 등이 주관한 강연에서 노무현 정부가 김영삼 정부보다 못하다고 평가했다. 1987년 이후 등장한 3개의 민간정부를 비교할 때 정당 민주주의 측면에서 김영삼 정부가 가장 낫고, 그 다음이 김대중 정부고, 노무현 정부는 최악이라는 것이다. 이는 국회의 심의는 물론 여당(대통령 스스로가 사실상 붕괴시켰다)과의 정책 조율도 없이 행정부가 일방적으로 국가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하는 정치 현실을 지적한 것이다(☞관련 기사 : "'제왕적 대통령', 한국 민주주의의 가장 큰 문제").
노동운동의 입장에서도 동일한 평가가 가능하다고 본다. 다른 것은 다 접어두고 구속 노동자수를 보더라도 노무현 정부 4년 동안(2003~2006년) 구속된 노동자수는 837명으로 김영삼 정부 5년 동안(1993~1997년)의 632명보다 200명 넘게 많았다. 참고로 김대중 정부 (1998~2002년)에서 구속된 노동자수는 892명이었다.
이틀에 노동자 한명씩을 구속해온 노무현 정부의 임기가 아직 반년 정도 남았고, 2007년 상반기 통계가 반영되지 않았음을 감안한다면 노무현 정부에서의 구속 노동자 수는 노태우 정권 시절의 1600여 명 이래 사상 최대치를 기록할 게 분명해 보인다.
ILO 핵심 노동 기준, 제87호와 제98호 거부하는 노무현 정부
'관료와 전문가 집단만의 참여', '상류층과 중산층만을 위한 민주주의'에 도취된 노동부, 법무부, 산자부 장관들은 담화문에서 "최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우리의 노사관계 법·제도가 다른 선진국과 견주어 손색이 없다고 인정하여 지난 10년간 지속되어온 우리나라 노사관계에 대한 모니터링을 종료했다"고 떠벌였다.
OECD가 한국 노사관계에 대한 모니터링을 종료한 건 맞지만, "한국의 노사관계 법제도가 다른 선진국과 견주어 손색이 없다고 인정한" 것도 아니다. 뒤 대목은 한국정부의 자기만족적인 해석일 뿐이다.
OECD에 노사관계 자문을 해주는 TUAC(노동조합자문회의)는 한국의 노동법과 노사관계 개혁이 아직 끝나지 않은 의제(unfinished agenda)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TUAC는 "한국 정부가 OECD에 가입할 때 약속한 바, 즉 결사의 자유와 단체교섭 같은 기본권을 국제기준에 맞게 고치는데 실패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ILO도 6월 중순에 끝난 총회에서 한국 정부가 핵심 국제노동기준인 ILO협약 제87호(결사의 자유)와 제98호(단체교섭권)를 비준한다고 약속했음에도 이를 지키지 않고 있음을 상기시켰다. 미국의 FTA 추가 협상 요구로 유명해진 국제노동기구 협약 제87호와 제98호는 선진국은 물론 중진국이나 후진국도 비준하고 있는 대표적인 국제기준이다.
이런 기초적인(fundamental) 협약들도 비준하지 않고 있는 한국 정부가 자국의 노사관계 법제도를 "선진국과 견주어 손색이 없다"고 대놓고 말하는 모습을 보면서 전임 노동부 장관이었던 김대환 씨가 국가인권위원회에 했던 말이 생각나는 걸 왜일까? 그는 비정규직의 평등권을 인정한 국가인권위원회의 결정을 두고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조롱했었다.
사법부 판결 전에 행정부가 '불법' 운운
대한민국 헌법은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완수하게 하여,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함으로써"라고 그 전문(前文)에 밝히고 있다.
정부는 한미 FTA가 한국 경제를 업그레이드해 국리민복을 가져온다고 주장하지만, 금속노조는 한미 FTA가 헌법 정신에 정면으로 위배된다는 입장이다. 한미 FTA에 찬성하는 국민도 있지만, 한미 FTA에 반대하는 국민도 많다.
한미 FTA는 정부도 인정하듯이 국민생활과 나라경제에 엄청난 변화를 몰고 올 것이다. 그런 변화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런 변화가 누구에게 혜택이 되고 누구에게 손해가 되는지, 무엇보다도 그런 변화를 받아들일 건지 말 건지에 대해서 국민의 의견을 물어보는 과정이 없었다.
금속노조의 파업은 한미 FTA 비준에 앞서 관료만의 '참여'가 아닌 국민의 '참여' 과정을 거치라는 요구에 다름 아니다. 노동조합의 통제 하에 소속 조합원이 집단적으로 노무제공을 정지함으로써 한미 FTA에 대한 자기의 의견을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 가지 시대적 의미를 지닌 금속노조의 단체행동을 두고 사법부에서 판결하기도 전에 행정부가 나서 불법 운운하는 것은 국민기본권에 대한 침해고, 사법부의 권위와 독립성에 대한 도전이다.
한미 FTA 저지를 위한 금속노조 파업과 이를 둘러싼 노무현 정부의 대응을 보면서 1997년 IMF 경제위기 이후 내용적으로 악화되어가는 노동기본권과 민주주의의 현실을 보는 것 같아 착잡하기 그지없다. 이런 마음이 드는 것은 필자만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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