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최용건의 그림에는 자연의 섭리(攝理)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무위(無爲)의 태도가 온전하게 깃들어있다. 이는 화가가 붓을 들기에 앞서 그림이란 세상의 문리(文理)와 물리(物理)를 동시에 터득하는 능력, 다시 말하여 자연에 널브러져 있는 모든 삼라만상들의 존재이유를 화가 자신의 내면을 통해 스스로 들여다볼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화가가 그림을 통해 사물과 사람이 공존하는 세계를 전해보일 수 있기에는 세상에는 고정불변의 실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리를 여하히 체득했는가에서부터 비롯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기실 그림이든 뭐든 삶다운 삶이란 깨달음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일 터이니 말이다. 허나 이는 말처럼 그리 쉽지는 않은 일이다.
최용건 화가의 그림은 깊다.
그의 그림에는 군더더기가 없다. 그의 그림 속에는 수양(修養)과 마음의 결(潔)이 고요하다. 따라서 붓질에도 마음의 파동이 고스란히 전달되어 온다.
조선화, 한국화
▲ 최용건 화가 ⓒ김상수 |
최용건의 그림은 조선화(朝鮮畵)이고 한국화(韓國畵)다. 오늘날 한국화의 그림역사가 왜곡되고 얕고 천박한 건, 어제 오늘 일도 아니다. 일본식민지 지배를 당하고 이후, 얼빠진 한국화단에 조선화 한국화는 송장치룬지 이미 오래다. 식민지 시절, 일본인들이 조선화 한국화를 가리켜서 '동양화'라고 정체성을 흐리게 의도적으로 불렀고, 해방이후에도 조선화 한국화는 없었고, 수묵화 동양화라고 부르면서 그것이 대개였다. 오늘 날 한국에 전통 수묵화는 조선화나 한국화가 아니고 일본인들이 한국화와 조선화를 깎아내리고자 부른 '동양화'를 그대로 답습하여 스스로 불렀다. 여기에는 무지한 미술식자(美術識者)들이 해방이후 미술계를 긴 시간 거드름 피운 끔직한 해악에 연유한다. 그동안 참 딱하고 무지했다. 100년 식민지 습성은 오래전부터 내면화되기 시작했다.
해방이후 60여년, 그간 수묵화는 있었으나 몇 몇 재사꾼들에 의해 화단이 사기(詐欺)와 치사(恥事)의 노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참으로 정신적으로 헐벗고 무자각(無自覺)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마디로 수묵화가들, 그들의 그림에서는 한국화가 지녀야 할 도(道)를 느낄 수가 없다. 도가 없는데 무슨 조선화고, 한국화고, 수묵화겠는가? 부끄럽게도 손톱 끝과도 같은 호말(毫末)의 천기(賤技)는 있으되 아무리 눈을 씻고 바라보아도 화도(畵道)는 없다. 조선화 한국화가 이 땅에서 오랫동안 스스로 소외되었던 것이다.
마음과 몸으로 자연을 '느끼고. 본다는 것'
한국화의 의미는 깊다. 자연과 같이 있고, 자연 속에 있고, 자연 안팎으로 그냥 있고 있을 뿐인 것, 이것이 한국화가 지향하는 도다. 도를 가리켜 빈 그릇이라고 했다. 비어 있으니 얼마든지 그 그릇에서 무엇인가를 퍼낼 수 있다고 했다. 나아가 비어있기에 넘치는 일도 없다고 했다. 한국화의 본질은 이 빈 그릇을 향한 끊임없는 사유(思惟)다. 자연 속에 육신과 생각의 갈래가 조화롭게 정배열 되어있는 것, 자연과 사람이 상극적(相剋的)이거나 대립적이지 않는 것이다.
공손과 부끄러움
최용건의 그림에는 자연 앞에서의 공손함과 부끄러움의 몸 사위가 묻어 있다. 그러면서 그의 필획에는 거침이 없다. 직관적이며 직지인심(直指人心)이다. 한 획(劃)이 동서남북, 즉시 여기 시방(時方)이고, 사방(四方)이다.
자연 앞에서의 화가는 자기 마음과 눈으로 본 만큼의 딱 그대로다. 스스로의 체험을 통한 운필이 곧 각자(覺者) 최용건의 한 획, 획이다. 그 어디에도 걸림 없이 사는 것이 화가의 바람인 듯, 그의 세상살이가 그림에 오롯이 들어앉아있다.
무형(無形)에서 유형(有形)으로, 유형에서 다시 무형으로 붓질이 가게 되어 있다. 이는 자연의 대상(對象)이 지니고 있는 물질(物質)속의 영(靈)을 형상화하기 때문인 것이며 이것이 곧 기운생동이기도 하다.
며칠 전 잠시 짬을 내어 최용건의 화가로서의 깨달음을 듣기 위해 강원도 인제 그의 화실을 찾았다.
하늘밭 화실 - http://www.hanlbat.co.kr/
▲ 최용건 화가 작업실 ⓒ김상수 |
▲ 최용건 화가 작업실 ⓒ김상수 |
이 여름에, 하늘밭 화실에서는
김상수 - 덥습니다.
최용건 - 서울은 더 덥겠지요? 어떻게? 갑작스럽게 연극공연을 준비하신단 얘길 들었습니다. 8월 8일부터 공연이 시작되지요? 준비는 잘 되고 있습니까? 서울에서의 공연은 만 9년 만이지요?
김상수 - 한 달 보름 전에 새로 희곡을 쓰고 지금 연습중입니다. 9년 만에 서울에서 공연을 하게 됐습니다. 갑자기 이루어진 연극공연입니다. 여긴 그래도 선선한 바람이 부는군요.
최용건 - 이곳만 해도 해발 500m 산간마을이라 그렇게 더운 줄은 모르고 지내고 있습니다. 저는 따가운 볕을 피해 아침저녁으론 틈틈이 밭일도 하지요. 시골로 들어온 지 15년이 다 되어 가지만 매번 느끼는 것이, 일과 더불어 사유 활동을 해야 삶의 심지가 깊어지고 강해질 수 있으리라는 생각입니다. 노동에는 사특한 생각을 거두게 하고 생각을 정련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육체노동이 뒷받침되어 주지 않은 예술작품이란 공소하고 나약한 관념의 그림자일 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김상수 - 삶의 일각 일각이 새롭겠습니다.
최용건 - 그렇습니다. 명리(名利)에 연연하지 않는 한, 그러나 이승에 머무는 동안 축적해두었던 삶의 감동만은 여한 없이 모두 분출시키고 싶습니다. 그런 후 빈 마음으로 이 골짝을 떠나 홀가분히 하늘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김상수 - 벌써 하늘로 돌아간다고요?
최용건 - 하하, 모르지요. 인명재천이라니까....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삶, 주야장천 막힘없이 흘러가는 내린천을 끼고 생활하는 환쟁이가 더 이상 흉중에 무슨 여한이 그리 많아 허구한 날 붓을 들어 번잡을 불러들이겠습니까? 다 부질 없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오는 것이나 가는 것이나 마음대로 되진 않겠지요.
김상수 - 세상에 고정불변의 실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부정할 수 없는 불변의 진리가 있다면, 사물과 사물사이에는 끊임없이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주란 대화로 가득 차있으며 대화란 다름 아닌 움직이는 활기, 곧 기운을 얘기하는 것이겠지요.
사의(寫意)의 세계
최용건 - 그렇습니다. 기운이란 곧 우주의 실체라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화가란 기운을 포착하여 평면 위에 시각화하는 하는 사람을 말함이고....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일찍이 지금으로부터 천오백년 전에 중국 진(晉)나라시대의 화가이자 화론가인 사혁(謝赫)이 고화품록(古畵品錄)에 정리해놓은 그림평가의 준칙인 화육법(畵六法) 중 기운생동(氣韻生動)을 가장 먼저 언급한 것은 대단한 탁견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여 이 기운생동을 논외로 하고서는 진정한 예술을 이야기할 수가 없다고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유로움을 지향하겠지만 귀신 놀음 같은 다분히 자의적(恣意的)인 비구상회화는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아름다움이란 중도적인 묘처의 상태에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인데, 중도적 아름다움이란 곧 나와 대상이 대화를 나누며 공존할 때라야 비로소 얻어 질 수 있는 신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사의(寫意)의 세계라고도 하지요. 그러니까 사의의 세계란 대상을 철저히 묘사를 하는 극사실이라던가, 대상을 철저히 배제하는 비구상 작업 등, 극에서 극으로 좌충우돌하면서 균형을 잃는가 하면, 번뇌 망상에 사로잡혀 편집병적인 증세를 보이는, 나아가 끊임없이 모순이 모순을 자초하며 악순환의 고리를 벗지 못하는 서구적인 미술 사조를 저는 우려합니다. 그러니까 역동적인 좌충우돌의 양상을 발전이라 믿고 있는 그들에 비해 중도적, 사의적 경계의 심화를 발전이요, 격조에 이르렀다고 믿는 우리의 전통적 사유와 시각은 크게 다르다 할 것입니다. 따라서 한국화에 있어서 사의적이라고 하는 개념은 고루할지 모르지만 시대에 따라 새롭게 해석이 가능한 동양인들의 높은 심미안이요 지혜라 할 것입니다.
김상수 - 그림은 잘 되고 있습니까?
최용건 - 시간이 날 때마다 부지런히 그림을 그리지요. 화탁 위엔 항상 종이가 놓여 있습니다. 그렇다고해서 매일 붓을 들고 있는 건 아닙니다. 화선지를 올려놓고서는 몇 날 동안 주변을 배회하다가 어느 순간 그림을 그리고픈 충동이 벅차오르면 먹물을 찍어 붓을 휘두르지요. 대상을 순식간에 낚아채는 식입니다. 화가에 있어 영감(靈感)이란 전시(戰時)의 군령(軍令)과 같은 것이어서 명령이 떨어지면 바로 붓을 들어야 합니다.
화선지 반절에 있는 우주
김상수 - 대체로 작은 그림들이 많은 데 큰 그림을 그리지 않는 이유라도 있나요?
최용건 - 큰 그림, 소위 사람들이 얘기하는 '대작'은 그리 내키지 않습니다. 제겐 별 의미가 없어서입니다. 큰 규모의 그림이 웅장하다거나 위대해 보이기보다는 오히려 우직하고 미련스럽게만 느껴질 뿐입니다. 그래서 화선지 반절 이상의 큰 그림은 거의 그리질 않고 있습니다. 가령 서예에 있어서 '메 산(山)자'를 크게 썼다고 해서 결코 산이 더 위대해 보인다거나 높아 보이지 않는 것처럼, 아니면 작은 사이즈의 경전보다 두터운 사이즈의 경전이 더욱 메시지를 성스럽고 심오하게 담고 있다고 여기질 않는 이유와 같아서입니다. 혹시 현실 재현적인 의미가 강한 서구적 사실주의 작품이라면 생생한 현장감을 여실하게 불러일으킨다고 하는 점에 있어서 어느 정도 그림 크기에 비례하여 감동도 달라질 수가 있을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사의(寫意)의 세계를 지향하는 한국화의 경우에는 작품의 크기가 작품이 지니는 예술성에 어떠한 영향도 줄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저의 기본 생각입니다.
김상수 - 무리하지 않는다는 얘기로 들립니다.
삿된 망상으로부터 자유
최용건 - 삶이란 최종 한가로워야 하리라 봅니다. 그러자면 살아가면서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지 않도록 해야겠지요. 섭리를 거스르는 데는 인간의 오판과 욕심 때문일 것이며 이는 결국 모든 재앙과 우환의 근원이 될 겁니다. 자연의 섭리대로 살 때 비로소 우리의 마음은 새털구름이 빗긴 가을 하늘처럼, 또는 시골 간이역사 주변의 풍경처럼 마음이 한가로워 질 수 있을 겁니다.
김상수- 자연의 소리들, 바람소리 그리고 계절이 바뀌는 기운, 어떻게? 신의 소리는 안 들립니까?
최용건 - 신은 인간의 언어로 우리와 소통을 하지 않습니다. 신은 경전이나 교리로 결코 그의 뜻을 말하지 않지요. 신은 오로지 그의 영혼을 불어넣어 만든, 이 세상의 모든 물상들의 언어, 다시 말하여 꽃의 언어로서, 바위의 언어로서, 여울과 구름의 언어로서 직접 우리들에게 무한의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형상들마다 신의 모습이 아닌 것이 없으며, 귓전에 울리는 모든 소리들마다 신의 음성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신의 소리가 전 방위로부터 들려 올 때라야 비로소 우리는 머릿속에서 삿된 망상이 사라져 한 마리의 새처럼 자유롭게 허공을 날아오를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저는 더 이상 신과 같은 궁극개념을 찾아 방황하는 것은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인간성이 교활해지면 붓놀림도 교활해진다.
김상수 - 이곳 깊은 산에서는 자연의 소리도 아주 깨끗하게 들리겠군요.
최용건 - 가끔씩 늦은 밤이면 앞산으로부터 부엉이 소리도 들려오곤 하는 데 신비감과 함께 고립감을 깊게 하여주는 산촌의 밤이 좋습니다. 나를 찾아 깊은 사색의 시간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명리에 밝은 일부 화가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화가들은 조직사회나 저잣거리에 머무르기를 싫어했습니다. 중국 송대의 량카이가 그랬으며 청대의 팔대산인과 '수선도(水仙圖)'로 유명한 황신이 그랬습니다. 그리고 오원(吾園) 장승업이가 그랬고, 일본의 셋슈가 그랬습니다. 그런데 왜 화가들은 자꾸만 무리들의 곁을 떠나려 하는가? 한마디로 무리들과 어울리면 두뇌가 교활해지기 때문입니다. 두뇌가 교활해지면 인간성이 교활해지고, 인간성이 교활해지면 붓놀림도 교활해집니다. 나아가 붓놀림이 교활해지면 결국 화가는 마음에도 없는 자기 기만적인 그림을 그리게 되지요. 세상에서 자기기만보다 더 괴로운 일이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물론 교활함도 하나의 능력이라 여기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사항이지만….
뼈 속 깊이 사무치는 화장(畵匠)들의 고독
김상수 - 쉽고도 어려운 얘기네요.
최용건 - 그래서 맑은 적혈구를 지닌 진정한 예인들은 직장과 조직을 떠나 저만치 격외인(格外人)으로 지내게 됩니다. 조직과 같이 이미 만들어진 틀 속에서 사는 삶은 적절치 않기 때문입니다. 상명하복(上命下服)식의 경직된 삶 속에서 무엇을 창조해낼 수 있겠습니까? 무리들을 벗어나 스스로 자신만의 삶을 만들어 갈 수 있는 자유로운 환경이 예인들에겐 생존조건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화장(畵匠)들은 뼈 속 깊이 사무치는 고독을 부여안고 살아가야만 싱싱한 생명을 태동시킬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김상수 - 적요(寂寥)가 숙명이어야 하겠지요.
눈이 내리는 날 밤, 골짝 어디에선가 선한 사람들끼리 귓속말로 속삭이는
최용건 - 숙명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연에 살다보면 사계절이 다 좋은 것 같습니다. 눈이 내리는 날 밤이면 골짝 어디에선가 선한 사람들끼리 귓속말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도 같고요.... 그럴 때면 그림을 그리다 말고 집안을 서성이곤 하지요. 때로는 마당에 나가 골짝 사이로 사라져가는 대청봉을 바라보곤 합니다. 높은 산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외경 감을 갖게 하지요. 아름다움이 극에 이르면 사람의 마음을 놀라움에 휩싸이도록 하는 것인지.... 하지만 세상에 아름다운 것이 어찌 대청봉뿐이겠습니까?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 그 자체가 노래며, 시이며, 그림이 아니겠습니까? 가슴을 붉게 태우는 저녁노을에서부터 발아래 밟히는 한 알의 조그만 모래알에 이르기까지, 그 어느 것 하나 신의 언어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신의 뜻이 궁극에 이르러 빚어낸 완벽한 예술이죠. 살아가면서 세상에 대한 문리(文理)가 트일 때 기쁨과 함께 우리의 눈과 입과 귀에서는 자연스레 노래와 시와 그림이 되어 흘러나옵니다.
우화등선(羽化登仙)의 40년 걸음
김상수 - 화업에 들어선지 40년이 넘으셨지요?
최용건 - 벌써 40여년이 지났습니다. 40년이란 짧지 않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그림 그리기가 여전히 객쩍기만 하니, 아무래도 가야할 길이 아직은 멀었는가 봅니다. 사람들이 나의 그림을 놓고서는 다소 낯설어 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으니 말입니다. 심지어는 엉뚱하게도 내 그림을 보고 추상화인가? 라고,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 들어서는 사람들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방편으로 대중들이 이해하기 쉽고 접근하기 쉬운, 그러니까 입문과정에서 연마하였던 폭포가 낙하하고 안개가 자욱하게 드리워진 전통산수화를 그려보기도 합니다.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기초를 연마할 때의 가슴 설렘은 여전합니다.
동양화의 구조 속으로는 사의(寫意)라고 하는 개념 외에 사실이라거나 추상 또는 비구상이라고 하는 개념의 세계는 끼어 들 수가 없게끔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의의 세계야말로 사실의 한계를 넘어서는, 구상과 비구상의 결핍을 모두 어루만지며 형성된 원융하고도 원만한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지구상의 모든 예술은 사의의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 라고 하는 것이 옳은 이야기인 듯싶습니다. 사의의 세계를 얻기 위해 아직도 서구인들은 구상에서 비구상으로 또는 제 3의 지대로 좌충우돌하면서 방황을 하고 있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서예의 필법 전개과정과 그림의 필법 전개과정은 동일합니다.
서예의 초서가 내 화법
서예가 붓을 들어 글을 쓰는 것처럼, 동양화도 그림을 마치 글씨를 쓰듯 그립니다. 물론 서예도 그림을 그리듯 글씨를 쓰고 있는 것이고요. 서화동원동체(書畵同源同體)란 말은 그래서 나온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화가가 산수화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산수를 쓰고 매, 란, 국, 죽을 쓴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서예에 전, 예, 해, 행, 초의 과정이 있듯이, 그림에도 그러한 필법의 전개과정이 있습니다. 전통산수화의 필법이 해서나 행서쯤에 해당된다면 나의 본격작업은 초서에 해당합니다. 나의 그림은 추상도 비구상도 아닌, 단지 휘갈겨 그린 초서체에 불과한 그림이라는 얘깁니다. 해, 행서가 지상에 발을 딛고선 글씨라 한다면 초서는 지상으로부터 초월하려는 천상지향적인 글씨로서 우화등선(羽化登仙)이랄까? 나의 본격작업은 몸무게를 줄여 천상으로 오르고자 하는 억새풀의 열망이 반영된 그림이라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다만 약간 낯설게 보여 지는 까닭은 휘갈겨 쓴 초서체의 글을 선뜻 판독하기가 까다롭듯이 저의 그림도 휘갈겨 쓴 초서체에 해당되는 그림인 때문입니다.
김상수 - 서예에서 초서란 자유로움입니다. 거침없고. 그러나 기초의 탄탄함과 가장 기본이 갖추어 질 때야 시작할 수 있지요. 그러니 해독도 가능하고요.
최용건 - 그렇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중심은 중도(中道). 묵화(墨畵)의 정신은 중도의 세계로 돌아감에 있을 겁니다. 그림에 있어 중도의 세계란 사실(寫實)도 비구상(非具象)도 아닌, 사의(寫意)의 세계, 곧 사물과 사람이 공존하는 세계입니다. 일찍이 북송대의 문인으로서 서화와 시문에 뛰어났으며 독서가 만 권에 달하여도 율(律)은 읽지 않는다고 할 만큼 천성이 자유인인 소식(蘇軾)은 그림을 그릴 때 사실적인 표현에 얽매이는 것은 어린아이와 같은 짓이라 했거늘, 그렇다고 해서 사실을 도외시한 채 내면의 혼만을 드러내려 하는 것은 미망을 쫓아 헤매는 광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사물에 치우치면 사실의 세계, 사람에 치우치면 비구상의 세계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라도 지나치고 치우침은 상궤를 이탈한 것이고 병이 됩니다. 중도의 세계, 사실도 비구상도 아닌, 중도적인 사의의 세계 속에서만 이 세상은 온전하고도 건강한 모습을 드러내 보일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경계를 일러서 사의의 세계, 묵화의 세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림 팔아주기를 구걸하지 말아야
김상수 - 시골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고, 수입도 일정하지 않을 텐데, 그림 그리기와 생활의 방편에서, 균형은 어떻습니까?
최용건 - 생각해 보건 데, 월급생활이란 것과는 거리가 먼 전업작가(專業作家)의 작품에서는 알싸한 야성(野性)의 향기 같은 것이 풍겨 나와야 제 맛이 납니다. 생명보험에 든 것처럼 생계문제에 있어서 안전한 생활을 보장받고 있는, 월급직 겸업작가의 그림과 그렇지 아니한 전업작가의 그림사이에는 필시 차이가 있으리라 생각되는데, 분재화와 야생화에서 느껴지는 차이쯤이 아닐까 합니다. 아파트 발코니에서 가꾸어지는 분재화는 분재화대로의 넉넉하면서도 기품 있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한다면, 야생화는 사람들의 손길을 타지 않는, 맑고 강인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어 바라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서늘한 감동 같은 것을 느끼게 해 줍니다. 그런 점에서 미루어 볼 때, 이런 산골에 들어와 비정형의 자연과 어울리는 저의 삶이 청청한 작품세계를 창출해 내는데 큰 도움이 되어 주리라 믿습니다. 유리온실의 막을 벗어나 봄이면 따뜻한 빛을 여과 없이 받아들이고, 여름이면 천둥 번개 소리를 들으며, 가을이면 서리를 맞으며, 겨울이면 눈을 뒤집어쓰고 월동을 하는 구절초와도 같이 매운 야생화의 모습처럼 저는 후자의 길을 걸으며 싱싱한 하늘의 울림을 쫓고 싶습니다.
화가의 삶이 설사 그 것이 눈곱만큼의 미미한 정도라 할지라도 세상의 권력적 속성과 유착하기 시작할 때 필경 허무해지는 것이라 믿고 있으니까요... 모쪼록 화가는 화가답게 살고 싶다, 이게 저의 소망입니다. 화가란 타인으로부터 혹 그림 팔아주기를 구걸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빌어먹든 굴러먹든, 스스로 알아서 밥 벌어먹고 살 일이고, 살다가 깨달음이 오면 붓을 드는 것이며, 자내증(自內證)을 실현함으로 해서 삶의 기쁨을 구가하는 인생인 겁니다. 아시다시피 화가의 평생 화두란 기의 응집과 흩어짐입니다. 기가 응집하여 삼라만상이 탄생되듯, 화가의 가슴속에 기가 응집되어야 비로소 한 획의 운필이 모양새를 갖추어 마침내 그림으로 현현하게 됩니다. 따라서 화가는 살아가면서 가슴속 깊이 정처 없이 떠도는 기의 이합집산을 잘 헤아려 살펴야 합니다. 그러다 어느 날 뇌성벽력과 함께 기의 응집이 이루어지는 순간 붓을 잡는 거지요. 그러나 그러한 순간은 일 년에 한 차례 올 수도 있고, 한 계절에 한차례 올 수도 있고, 아니면 하루에 서너 차례의 기회가 찾아 올 수도 있는, 불확정성의 노동입니다. 그것이 화업인 것이며, 최소한 동양사회에서 바라보고 있는 화가에 대한 고전적 이해였던 것입니다. 고전이란 과거에도 그랬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질서와 가치니까요.
그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평생 수 백, 수천 점의 그림을 그렸다고 하는 화가에 대한 풍문이 들려 올 때면, 저로서는 도저히 납득이 되질 않습니다. 도대체가 어떻게 그런 일들이 가능할까? 미상불 그러한 사람들의 그림을 대하다 보면, 그 것이 그 그림 같고, 그 것이 그 그림 같은, 전혀 특화가 되어 있지 않는, 지루함을 보이기 십상인데... 그런 투의 작업을 하느니 차라리 흐르는 물소리에 귀를 틔며 앞산이나 바라보며 지내는 것이 끊임없이 개과천선을 하려는 화가의 삶에 훨씬 더 신선한 자극제가 되어 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해보곤 합니다.
조화로운 마음
김상수 - 도시에서 그림 그릴 때와 이곳 산 속에서 그림 그릴 때, 가장 큰 차이는 뭔가요?
최용건 - 그림 그리는 일도 도회에서보다는 이곳에서 한층 더 즐거워 졌는데, 도회에서 생활할 때에는 그림이 마치 내 인생에 주어진 무슨 과제인 양 여겨져 몹시 힘들고 괴로웠습니다. 하지만 물 흐르고 새 지저귀는 계곡에 들어와 살고부터는 그림이란 자연과의 조화로운 삶이 빚어낸 조화로운 마음의 성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하는 점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 연후에야 비로소 그 놈의 몹쓸 숙제가 사라지면서 한가롭게 다시 붓을 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연발생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와 생계벌이 수단으로서의 그림을 그리는 화공과는 차이가 있을 겁니다. 그리고 순수성과 자유라고 하는 두 가지 테제가 보장되지 않는 한, 어떠한 직업도 화가에게 있어서는 목숨과도 같은 자존을 파멸시키는 치명적인 영어(囹圄)의 생활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자연환경에 둘러싸여 비록 넓지는 않으나 옥수수, 감자밭을 일구고 민박을 쳐 조수익(助收益)도 올리며 살아가는 이 생활이 더없이 만족스럽습니다.
김상수 - 농사와 그림 그리기는 상보적인지요?
최용건 - 그렇습니다. 밭 갈고, 파종하고, 잡초관리하고, 수확하는 영농과정 중, 가장 하기 즐거운 작업은 뭐니 뭐니 해도 쟁기 날을 번쩍이며 경운기로 밭을 갈아엎는 일입니다. 그 작업은 마치 그림을 그릴 때 온 힘을 다하여 붓에 농묵(濃墨)을 묻혀 운필 하는 행위와 본질적으로 궤를 달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묵화에서는 붓끝을 칼끝에 비유하여 봉(鋒)이라 하는데, 한마디로 필력이 지배(紙背)를 철(撤)할 때에 손으로 전해져 오는 쾌감, 다소 과장된 표현일는지는 몰라도 천하를 갈아엎을 때의 기분이 그러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림을 그릴 때는 가슴속에 물소리가 차오를 때입니다. 그 때를 기다려 마치 그리움을 향해 수류탄을 투척하듯이 그림을 그립니다.
김상수 - 그림에 잡티나 기교가 보이지 않습니다.
최용건 - 평생, 부적처럼 신기(神氣)가 감도는, 그런 그림 딱 한 점만이라도 나의 붓 끝에서 나와 준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김상수 - 그림이 안 될 땐 어떤 때입니까?
최용건 - 그림이 되고 안 되고는 그 날의 일진에 달려 있는 것이지 저의 의지와는 전혀 무관한 듯합니다. 그저 천지신명의 조화에 모든 것을 내 맡길 수밖에는요. 화가가 득의 작을 얻는다는 일은 미천골 심마니가 산삼뿌리를 얻는 일 만큼이나 아득한 불확정성의 노동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가슴에 먹을 갈아 그리는 그림, 가슴에 붓을 담가 그리는 그림, 묵화의 길을 걷는다는 사실이 성패에 관계없이 기쁘기만 합니다. 그저 저에게 주어진 분수만큼만 그리다 사라지면 그것으로 족하니까요. 그리고 화가가 지해(知解)에 집착하면 그림은 망가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림이란 논리의 전개가 아니니까요.
김상수 - 최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그림의 세계는 아득한 명(冥)의 세계에 다다르는 지경인 것 같습니다.
예술도 어렵지만 삶이 더 어렵다.
최용건 -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황홀한 음악은 자연의 소리처럼 음계를 벗어나 존재하는 것일 겁니다. 진리가 언외(言外)에 있는 것처럼, 기운(氣韻)이 법외(法外)에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화가의 가슴을 칭칭 결박하고 있는 만법의 쇠사슬이 끊겨져 나갈 때라야 비로소 화가는 그림다운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화장(畵匠)의 목숨이란, 곧은 절개를 심지로 하여 부지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따라서 화가들은 스스로를 적절히 가두어 지낼 필요성도 있을 겁니다. 화인(畵人)이 저자거리와 너무 가까이하여 지내다보면 운필이 민망해지기 마련이지요. 다시 말하여 많은 구경꾼들로 둘러싸여 지내다 보면, 끝내는 비천한 재주를 보이게 된다는 얘깁니다.
김상수- 참 어렵습니다. 때때로 예술도 어렵지만 삶이 더 어렵습니다.
이웃집 개가 먹다버린 소 뼈다귀처럼
최용건 - 얼마 전에 해도 저물어 방에 불을 켜고 앉아 책을 뽑아들었습니다. '동양화론선'. 오랜만에 회화이론서나 읽어볼까 해서 펼쳐든 책입니다. 그러나 몇 페이지를 넘기지 않아 마음도 내키질 않고 해서 책장을 다시 덮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붓을 들어 그림을 그려야 할 화가가 부질없이 말수만 많아질까 보아서였습니다. 물론 이렇다, 저렇다, 입 밖으로 말을 내놓지는 않겠지만 말입니다. 이론에 밝으면 말이 많아지는 법이고, 말이 많아지다 보면 미상불 그림이 건조해지기 십상입니다. 명나라시대에 남경예부상서(南京禮部尙書)라고 하는 고위관직을 지낸 바 있는, 화가이자 화론가로서, 막시룡과 더불어 동양화단에 소위 말하는 남종화니 북종화니 하는 남북분종론(南北分宗論)과 남종화를 높이 평가하고 북종화를 장이의 천기(賤技)로 업신여긴 야심찬 논조의 상남폄북론(尙南貶北論)을 주창한 동기창의 그림이 그 대표적인 좋은 예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의 산수경을 바라보노라면 운필과 용묵(用墨)이 삭막하여 이웃집 개가 먹다버린 소 뼈다귀처럼 암석과 수목들이 앙상한 모습으로 나 뒹굴고 있어 한마디로 갑갑합니다. 세인의 이목을 끌만한 다부진 발언으로 인해 본인 그림에 대한 주목성을 부각시켰는지는 몰라도... 아무튼 사공이 많으면 배가 물을 떠나 산으로 올라가듯, 화가가 이치에 밝아 수다스러워지면 그림이 가슴을 떠나 머리위로 올라가 앉습니다. 아무리 작가로부터 자상한 설명을 듣고 들어도 감흥이 피어오르지 않는 난해한 작업들을 바라볼 때면 전공자인 나도 수용하기가 불편한데, 일반 감상자들의 입장에서야 그 바라보는 곤혹스러움이 오죽할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마침내 이 시대의 동기창들은 뿌리고, 부시고, 깨고, 뒹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훗날에 몰려올 치기에 대한 부끄러움은 무슨 요설로 다 감당할 것인지. 삶이란 살고, 살고, 또 사는 것이며, 그림이란 그리고, 그리고, 또 그리는 것일 뿐입니다.
김상수 - 한 여름인데, 산봉우리를 타고 불어오는 바람은 벌써 절기가 바뀌는 기운입니다.
(☞바로 가기 : 필자 홈페이지)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