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례에 걸친 답사를 3월에 끝내고 2월 초에 있었던 '마을에 관한 이야기 캠프'를 5~6회에 걸쳐 실었다.
이번에는 그 동안 나나 <예마네>에서 관계를 맺었고 답사를 했던 마을들, 예컨대 정부(농수산식품부)에서 발주한 '신문화공간 조성사업'에 우리와 서귀포시가 공동으로 기본계획서를 짜서 올린 것이 공모에서 선정된 서귀포시 표선면의 가시리와 서귀포 출신 건축가 이승택이 공공미술프로젝트 사업으로 벌려온 서귀포시의 월평마을, 농촌체험마을로 잘 알려진 경기도 이천시 율면의 부래미마을, 공주 봉현리의 교육공동체, 사)충남교육연구소가 벌이는 마을사업 등에 대해 쓸 생각이다.
이 마을들은 지난 번 답사처럼 답사계획을 세워 떠 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사진 자료와 대담자들의 녹취가 없거나 부족한 채로 쓸 수밖에 없었다.
이 마을들은 우연하게도 정부의 발주사업(프로젝트사업)과 관계가 있는 마을들이다. 이 마을들을 둘러보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마을의 발전에 이런 정부의 지원이 도움이 되는 건지, 오히려 소문대로 마을의 분란과 갈등을 초래하는 지는 나로서도 정확하게 진단 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살펴 본 바에 의하면 마을에 대한 지원은 약이 될 때도 있는 것 같고 독이 될 때도 있는 것 같다.
우리가 이미 답사를 갔던 마을들에도 정부의 지원을 받았던 마을들이 상당 수 있었다. 그런 마을들에서도 성공도 있었지만 실패도 있었다. 오히려 지원을 아예 생각지 않는 마을들이 자활과 자립, 자치의 의지는 더 있어 보였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정부의 지원(중앙정부, 지방정부, 공공기관과 기업 등의 지원을 포함)과 외부 전문가의 개입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이들 서너 개의 마을에서 나는 이러한 지원으로 인한 성공과 실패의 사례들을 같이 고민해 보고자 한다.
제주도 표선면 가시리와 '신문화공간 조성사업' (1)
우리가 2009년도 2월에 서울의 문래동에 '예술과 마을 네트워크'라는 비영리 단체를 만들어 사무실을 막 열고 있을 때 제주도 서귀포시에서 급하게 연락이 왔다.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라는 마을에 농수산식품부에서 발주한 '신문화공간 조성사업'에 같이 기본계획을 짜줄 수가 없냐는 거였다.
서귀포시의 연락은 희망제작소 등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다 제주도에서 활동을 다시 시작한 이지훈과 우리 연구소를 같이 하기로 한 지금종 등이 이 사업을 제주도 서귀포시와 연결 시켰기 때문이다.
농수산부에서 발주한 '신문화공간조성사업'은 공모시간이 열흘 정도 밖에 남지 않았을 때였다. 준비기간이 짧아 공모에 응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지만 전국에 기초자치단체에서 마을 주민들의 문화적 삶에 활력을 불어 넣어, 농어촌의 문화적 발전을 꾀하겠다는 농수산부의 이 번 사업의 발주 취지가 마음에 들었다.
더군다나 정부에서 시행하는 농촌개발사업이 하드웨어 중심으로 문제가 많음을 알고 있었지만 이 번 사업은 주로 주민들이 주체적으로 그들의 삶을 향상시킬 수 있는 문화적 소프트웨어, 휴먼웨어 중심으로 사업의 개념을 설정해 놓았다. 이를 담을 수 있는 주민들의 문화거점(공간)인 하드웨어가 포함되어 있는 것은 물론이다.
가시리 현장에 내려가랴 주민 대표들을 만나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마을의 대표들과 주민들의 의견을 들으며 마을의 현황을 파악하는데 주력했다.
▲ 가시리에는 기업이나 개인 등이 기업형으로 운영하는 기업목장이 3 곳 있다. 왼쪽부터 제동목장, 가시목장, 혜림목장과 그 너머 번널오름의 모습. |
'가시리'마을은 우리가 흔히 육지에서 보던 그런 마을들과는 달랐다. 한마디로 엄청난 부자마을이다. 우선 마을 주민들의 공동목장이 200만평이 넘는다는데 우리는 혀를 내둘렀다. 아니 어떻게 그런 큰 땅이 개발되지 않은 채 남아 있을 수가 있는가?
제주도의 웬만한 땅은 서울의 기업들과 재력가들에 의해 대부분 개발되거나 소유권이 넘어 간 상태다. 여기 가시리마을의 공동목장이 제주도 내에 개발되지 않고 남아 있는 유일한 큰 땅이라고 한다.
또 가시리는 제주도의 행정구역이 독특해서인지 리(里) 단위에 1200여 명이 살고 있다. 주민의 수로 보면 육지의 작은 면 단위에 해당한다.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가 말한 가장 이상적인 마을 공동체는 100 명 내외의 주민들이 있는 마을이라고 했는데 그에 비해서 턱 없이 큰 마을이다.
100명 내외의 주민들이 사는 육지의 보통 마을에 비교해 주민 수가 너무 많긴 하지만 200만평의 공동목장을 품고 있는 이 마을을 생각하면 우리가 짜는 마을의 '신문화공간 조성사업'의 기본계획이 꼭 선정되어 이 마을에서 '마을살리기'의 성공사례가 만들어졌으면 하는 바람이 절실했다.
이 공동목장은 조선시대에 왕실에 올려 보내는 말을 기르던 곳이었다고 한다. 우리는 기본계획을 짤 때 지금까지 비워진 채로 방치해 놨던 이 공동목장을 주목했다. 이 방대한 목축터에는 5개의 오름이 있고 한 가운데 20 여 평 되는 목감막(목축인부들이 사용하던 시설)이 2채 있다.
우리는 이 목감막(1채는 지금도 사용하고 있고 또 1채는 건물 뼈대만 남은 채 방치돼 있었다)을 잘 이용해 목축박물관으로 개조하는 계획을 기본계획에 포함시켰다.
항상 그렇지만 마을에는 무수한 이야기가 있다. 주로 선조들과 주민들의 살아 온 내력들이다. 주민들의 살아 온 내력과 이야기들이 마을의 주요한 가치다. 현존하는 자기의 정체성은 살아 온 내력을 자기와 다른 사람들이 같이 공유할 때 생기는 것이다. 즉 자기의 삶을 다른 사람들과 같이 나눌 때 서로 그 가치를 인정해 주는 것으로 마을 공동체가 유지 되 왔다.
지금은 선조들 때부터 주민들의 살아 온 내력들은 옛날처럼 농한기에 어느 집에 모여 서로 돌려가며 이야기를 나누며 풀 수 있는 기회가 다 없어져 버렸다. 그 이야기를 소리로 구성지게 하면 민요가 되고 신이 나서 어깻짓을 하면 춤이 된다. 이 이야기들을 거슬러 올라가면 신화와 만나게 된다.
지금 우리가 '목축'과 '신화'를 바탕으로 짠 기본계획은 우여곡절 끝에 많이 수정된 채로 마을의 추진위원회와 계약을 맺어 시행의 단계에 놓여 있다. 결과적으로 우리의 최초 콘셉트는 반만 관철이 된 셈이다. '목축박물관'은 들어가 있는데 '신화'와 관련된 아이템은 빠져 버렸다.
또 그 이외에도 이 사업을 뒷받침 하는 서귀포시의 행정처리가 매끄럽지 못해 우리는 단지 최초의 기본계획을 짜는 것으로 그 사업에서 손을 떼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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