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이곳이 아주 좋은 모범을 보여준다고 해서 왔습니다." (노무현 대통령, 2003년 6월 24일 한국산업기술대학을 방문한 자리에서)
"기술력도 없는 기관이 산업자원부라는 배경을 믿고 지역 중소기업들을 괴롭히기나 했지. 진작 망했어야 할 기관이 5년이나 갔으니 나라꼴이 정상이 아니지…." (시화공단 입주 중소기업의 한 대표, 2006년 4월 10일 전화 인터뷰)
5년 간 정부로부터 52억 원을 지원을 받았지만 사업이 끝나자마자 파산한 한 사단법인이 구설수에 오르고 있다. 2003년 6월 24일에는 이 사업이 노무현 대통령에게 산학협력 모범사례로 소개됐었다. 5년 동안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5년간 52억 지원 받고도 빚만 15억…지원 끊기자 바로 '파산'**
지난 2000년 경기도 시화공단에 있는 한국산업기술대학(총장 최홍건)이 사단법인 형태로 설립한 '나노-TIC(초정밀가공기술혁신센터)'가 지난해 파산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나노-TIC는 산자부로부터 47억5000만 원, 시흥시로부터 5억 원을 지원받는 등 5년 간 총 52억5000만 원의 지원을 받았었다.
나노-TIC는 시화공단 내부에 있는 금형, 렌즈를 제작하는 중소기업과 공동으로 기술을 개발하고 해당 기술을 이전하는 등 지원을 하는 기관이다. 1999년 12월 설립된 뒤 산학협력의 성공모델로 홍보된 이 기관은 2003년 6월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방문해 "아주 좋은 모범을 보여주는 곳이 있다고 해서 왔다"고 돌아보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그때부터 이 기관은 회복불능 상태로 접어들고 있었다.
최근 〈프레시안〉은 한국산업기술대학이 이 나노-TIC에 대해 작성한 2004년 12월 자체 감사 결과 보고서와 2005년 2월 D회계법인에 의뢰해 실시한 회계분석 보고서를 입수했다. 이 문건들에는 52억 원이 넘는 '혈세'를 쏟아붓고도 나노-TIC가 파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수십억 원 현금거래…외상거래 업체는 받은 적 없어**
우선 D회계법인의 회계분석 결과를 보면 2004년 6월 30일을 기준으로 나노-TIC의 누적결손금은 15억 원이나 됐다. 52억5000만 원의 정부 지원금과 전기·수도·전화요금 면제 등의 파격적인 혜택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파산을 선언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이에 대해 당시 D회계법인은 "2001년 3월 28일부터 2004년 6월 30일까지 검토 결과 매년 순손실을 보고 있다"며 "이런 손익구조 하에서는 계속적인 영업활동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한국산업기술대학은 자체 감사 보고서에서 불투명한 회계처리를 이런 부실경영의 큰 이유로 꼽고 있다. 5년 간 운영되면서 단 한 번의 예결산은 물론 이사회나 총회도 없었다. 그러다보니 모든 것이 주먹구구식으로 이뤄졌다. 단적인 예는 빈번한 현금거래다. 기관장(한국산업기술대학교 현 모 교수)이 회사 돈을 자기 돈처럼 현금으로 넣었다 뺐다 한 것은 물론 거래처와도 현금거래가 주로 이뤄졌다.
D회계법인의 실사 결과 4년 간 현금계정이 98억 원이 넘었지만 가지급금과 가수금 등이 많아서 그 실체를 파악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이 회계법인은 "거액의 금액이 현금으로 입출금되는 경우가 많다"며 "특히 대표이사에게 가지급금 및 가수금 거래가 빈번해 회사의 자금이 외부로 유출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거액의 외상대금도 수시로 현금으로 지급하고 있어서 상대방이 이를 실질적으로 받았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는 형편이다. 2004년 7월 9일 이 기관은 S정밀을 상대로 2500만 원의 대금을 현금으로 지불했다고 밝혔으나 이 같은 돈 거래는 없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누군가가 쓰지 않은 돈을 쓴 것처럼 보이기 위해 회계장부를 조작했을 가능성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직원들 급여는 '펑펑'…'유령회사' 만들어 용처 불분명한 현금 입금**
이렇게 회계가 불투명하다보니 국민의 소중한 혈세는 쌈짓돈 쓰듯이 허비됐다. 2001년부터 2004년까지 전체 매출액에서 급여가 차지하는 비율은 평균 46%로 정밀·광학기기를 생산하는 동종업계와 비교했을 때 턱없이 높은 비율을 나타냈다. 다른 정밀·광학기기의 전체 매출액에서 인건비가 차지하는 비율은 평균 15% 내외였다.
이밖에도 곳곳에서 돈이 샌 정황이 나타난다. 2003년도 급여대장에는 급여로 3억9000만 원이 지급된 것으로 명시돼 있으나 정작 장부에 나타난 금액은 4억여 원이다. 나머지 1000만여 원은 아무런 증빙 없이 직원들에게 지급된 것이다. 급여를 모두 개발비 명목으로 처리해 지급한 것도 2000여만 원이나 됐다.
더욱더 납득할 수 없는 것은 이 기관의 이 모 고문을 대표로 하는 나노엔지니어링이라는 '유령회사'를 만들어 외주가공비 명목으로 1억2400여만 원을 지급한 사실이다. 다른 거래업체에 대해서 수 개월 밀린 외상대금과 직원 급여도 지급하지 못하는 상태에서도 나노엔지리어링에 대해서는 최우선적으로 송금이 됐다. 더구나 이 고문에게는 2004년에만 아무런 증빙자료 없이 영업비 명목으로 7000만 원이 송금됐다. 고문비 명목으로 월 230만 원을 꼬박꼬박 챙기면서도 소득세도 내지 않았다.
***고가 장비 가져다 놓고 기술력도 없어…거래 끊기자 '덤핑'도**
이렇게 돈을 펑펑 쓰고도 정작 이 기관은 주변 중소기업들로부터 원성만 샀다. 고가의 장비를 들여다 놓고도 기술력이 없어서 시화공단 내 중소기업에게 기술지원을 해주기는커녕 사업의 장애물로 인식됐다.
당초 이 나노-TIC는 고도의 정밀도를 요구하는 렌즈 등의 가공 및 금형업체와 이 제품을 받아 직접 생산하는 업체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고 기술을 지원해주기 위해 설립됐다. 하지만 정작 이 나노-TIC를 통해 주문해 받은 렌즈의 금형은 불량품인 경우가 많고 납품도 지연돼 인근 중소기업으로부터 원성을 사왔던 것으로 확인됐다.
자체 감사 보고서는 "최고의 장비와 지원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으면서도 한 번 금형을 맡겼던 고객이 납품지연과 품질불량 등을 이유로 다시 거래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며 "이렇게 거래가 끊기자 다른 민간기업과 경쟁하기 위해 가격을 싸게 불러 금형업계의 질서 혼란을 초래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인근 중소기업의 한 대표는 10일 〈프레시안〉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기술력도 없는 기관이 산자부라는 배경을 믿고 지역 중소기업들 괴롭히기나 했지. 진작 망했어야 할 기관이 5년이나 갔으니 나라꼴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 아니겠느냐"고 한심한 전시행정을 꼬집었다.
***산자부 연차마다 평가는 꼬박꼬박 실시…모두 다 '합격점'**
그렇다면 이렇게 터무니없는 기관이 왜 5년간이나 유지될 수 있었을까?
노무현 대통령이 방문한 2003년을 기준으로 보면 이 기관은 이미 3년 연속 영업이익에서는 손실을 보고 있었다. 당장 2003년에는 그 액수가 11억여 원이나 됐다. 정부로부터 해마다 10억 원을 지원 받으면 고스란히 '까먹는' 구조였던 셈이다.
하지만 정작 산업자원부의 평가는 찬사 일색이었다. 이미 이 기관이 몰락의 조짐을 보이던 2002년 평가 점수는 200점 만점에 175.2점, 2003년에는 146.8점을 부여받았다. 기관이 청산 절차를 밟고 있었던 2005년 5월 작성된 이 사업에 대한 최종 보고서에서 나노-TIC가 얻은 총점은 200점 만점에 159점. 매년 꼬박꼬박 거르지 않고 혈세 10억 원이 지원된 데는 이런 엉터리 평가가 배경에 있었다.
이와 관련해 전국과학기술노동조합은 "장비 구축을 위주로 한 사업이 많은 문제점을 갖고 있다고 수없이 지적됐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업비와 유사 사업을 산자부는 계속 확대하고 있다"며 "하지만 이런 사업의 운영 역시 한국산업기술대학교에 버금갈 정도로 부실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과기노조는 "한국산업기술대학의 총장이 산자부 차관 출신이라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대학을 비리로 얼룩진 관학의 '먹이사슬 카르텔'은 척결돼야 할 것"이라며 "특히 이렇게 국민의 혈세를 거침 없이 이용하는 범죄가 버젓이 진행되는 것을 알면서도 두고 보기만 한 산자부 공무원과 평가를 담당하는 한국산업기술평가원(ITEP) 보직자에 대한 처벌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산자부의 행태가 바뀔 가능성은 보이지 않는다. 현재 이 대학의 총장은 중소기업을 지원하기 위한 대통령 직속 기구인 중소기업특별위원회의 위원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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