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건화 한신대 교수(경제학)가 이찬근 인천대 교수(무역학),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경제학) 등이 주장해온 '외국자본 지배론'을 강하게 비판하고 나서 주목된다.
정건화 교수는 이찬근-장하준 교수의 '외국자본 지배론'은 "대기업과 재벌 중심의 경쟁력 제고에만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며 "설사 그렇게 해서 안정적인 국민경제를 운영하게 되더라도 그것이 대다수 사회구성원, 특히 직접적 생산자의 삶의 조건을 부단히 불안정하게 하는 조건 위에서만 가능한 것이라면 (故 박현채 교수가 말했던) '민족경제론적 대안'이 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외국자본 지배로 투자가 위축됐다고?"**
정건화 교수는 최근 발행된 〈동향과 전망〉 2006년 봄호(제66호)에 발표한 '2000년대 한국경제의 쟁점 : 외국자본 지배론에 대한 비판적 검토'라는 글에서 이찬근-장하준 교수 등이 주장해 온 '외국자본 지배론'을 이같이 비판했다.
정건화 교수는 "'외국자본 지배론'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급속히 진행된 자본시장 개방으로 금융자본 특히 외국계 금융자본이 국내 실물경제를 장악하게 됐고 이들이 주주가치 극대화의 원리를 내세워 적극적 투자를 외면하고 실물경제의 활동을 제약하면서 한국경제의 성장동력을 손상시키고 있다고 국민경제 위기론을 유포하고 있다"며 "하지만 이런 분석은 과도한 단순화에 근거한 과장된 주장"이라고 지적했다.
정건화 교수는 "한국경제 투자부진의 주된 원인은 중소기업의 수익성 악화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며 "대기업의 수익성은 2002년 이후 지속적으로 개선되고 있지만 중소기업의 수익성은 전반적으로 악화되는 추세이며 특히 2003년 이후 수익성 저하가 심화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수익성이 낮아진 중소기업은 국내 설비투자를 축소하거나 저임금 노동력을 활용하기 위해 해외투자를 확대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기업의 해외투자는 2002년 이후 급증하고 있다. 정건화 교수는 "투자위축은 어디까지나 국내에 한정돼 있다"며 "특히 대기업이 주도하던 과거와 달리 중소기업의 중국에 대한 해외투자가 늘고 있다"고 지적했다. 중소기업의 해외투자는 1990년 0.6조 원에 불과했지만 2004년에는 5.9조 원을 기록했고, 전체 해외투자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2004년 현재 46.2%로 크게 늘었다.
***"중소기업 수익성 악화가 은행권 기업대출 기피의 원인"**
정건화 교수는 외국자본 지배론이 내세우는 '은행권의 수익성 지상주의와 가계금융 집중으로 인해 기업대출이 줄어들면서 축적된 유휴자금이 부동산 시장으로 유입돼 부동산 경기 과열을 초래했다'는 분석에 대해서도 강하게 비판했다.
정건화 교수는 "은행권의 중소기업 대출에는 언제나 높은 문턱이 있었다"며 "제조업 부문 중소기업의 약 5분의 1이 손실을 기록하는 등 수익률이 크게 악화된 상황에서 은행권의 여유자금이 중소기업 대출로 흘러가지 않은 것은 어떤 면에서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며 "'외국자본 지배론'의 주장은 원인과 결과가 전도된 해석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정건화 교수는 "외국자본의 국내금융 지배가 국내 투자부진을 초래하고 한국경제의 성장잠재력을 훼손하고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대기업과 중소기업, 수출기업과 내수기업, 고소득층과 저소득층 등 경제부문 간 양극화의 심화야말로 한국경제의 큰 문제"라며 "결국 이런 양극화의 원인을 야기한 재벌 대기업 중심의 기존 성장전략 자체를 재검토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 교수는 "재벌 대기업 위주의 성장전략을 지속한다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상황이 악화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외국자본 지배론'은 '재벌 지키기' 담론으로 변질**
정건화 교수는 더 나아가 '외국자본 지배론'의 '진정성'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던진다. '외국자본 지배론'은 당장 한국경제가 외국자본에 넘어갈 것처럼 위기감을 조성하지만 정작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외국자본의 국내 자본시장 진입을 무조건 막자는 얘기보다는 투기적 행태를 제한해야 한다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정건화 교수는 "이들이 비판하는 재벌 개혁론자들 역시 한국경제의 개혁 수준에 비해 개방이 다소 과도하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고, 정부도 투기성 외국자본으로 야기되는 위험을 막기 위한 방안을 찾고 있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결국 문제가 되는 부분은 재벌 개혁에 대한 입장차이뿐"이라고 설명했다.
정건화 교수는 "'외국자본 지배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국내 재벌이 적대적 인수합병(M&A)의 가능성을 부풀리고 있지만 실제로 지속적인 제도보완으로 그 가능성은 현저히 낮아졌다"며 "더 본질적인 문제는 적대적 M&A와 큰 관계가 없는 출자총액제한제도 등 현재 진행형인 재벌개혁 정책이 경영권 방어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고 보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이찬근, 장하준 교수 등은 외환위기 이후 추진된 기업개혁 조치가 기업집단으로서 재벌이 갖는 장점을 잠식해 결과적으로 재벌의 경영권을 외국자본에 넘기는 결과를 야기할 것이라고 경고해 왔다.
정건화 교수는 "'외국자본 지배론'은 마치 우리에게 선택지는 '외국자본 지배'와 '재벌' 둘 밖에 없는 것처럼 제시한다"며 "재벌의 사회적 책임을 전제로 재벌의 경제적 지배권을 인정하는 '사회적 대타협'도 이런 논리에 의해 제시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정 교수는 "현실을 과장해 재벌을 마치 민족자본의 위치에 올려놓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반박했다. 정 교수는 "더구나 불과 평균 5% 수준에도 미달하는 지분으로 기업집단 전체에 대해 주인 역할을 하고, 견제 없는 절대 권한을 행사하면서도 그 결과에 책임지지 않고, 그 권한마저도 세습하는 행태는 민주주의의 원칙도 심각히 훼손한다"고 덧붙였다.
정건화 교수는 더 나아가 "현 상황에서 재벌은 재벌개혁에 대해 저항하느라 외국자본의 위협을 강조하는 혐의가 짙으며, 이런 상황에서 '사회적 대타협' 논의는 결과적으로 재벌로 하여금 실제로 타협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궁극적인 위기를 회피할 수 있도록 해 준다"며 "실제로 재벌은 민족자본 논의를 통해 만들어진 대중들의 감성적인 민족주의는 그런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재벌 중심 성장전략 지속한다면 문제 악화"**
정건화 교수는 결론적으로 "'재벌이냐, 외국자본이냐'라는 이분법적 선택지에 대한 정답은 '문제설정이 잘못됐다' 혹은 '둘 다 아니다'"라며 "지금 필요한 것은 1987년 이후 그 한계를 노정하기 시작한 재벌 중심의 성장전략 그 자체를 재고하는 것"이라고 제안했다. 정 교수는 "직접적 생산자의 삶의 조건을 위협하는 양극화 현상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일 뿐만 아니라 한국경제의 미래와 발전전망을 규정하는 최대의 문제"라며 "21세기 한국경제에 대한 민족경제론적 대안은 경제양극화를 해결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재벌개혁론에 근거해 논의를 전개한 정건화 교수는 글 서두에서 최장집 고려대 교수(정치학),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김유선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소장, 박승옥 시민발전 대표 등이 주장해온 '민중 생존권 위기론'의 문제제기를 경청할 것을 주장했다. 즉 '시장 효율성' 논의에 압도당하지 않는 이들의 문제의식 하에서 한국경제에 대한 구체적인 구조분석이 이뤄질 때 1970년대에 '민족경제론'을 주창한 故 박현채 교수의 문제의식이 21세기에도 계승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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