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에서 공식적으로 확인해 주지 않고 있음에도 한미 FTA 협상 과정에서 미국이 한국에 가하고 있는 문화개방 요구의 핵심은 방송시장 개방인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지난 14일(현지시간) 미국 무역대표부(USTR)가 워싱턴에서 주최한 한미 FTA 관련 공청회에서 미한 재계위원회를 대표해 참석한 리처드 홀월 알티코 부회장은 "한국 내 미디어, 방송, 통신 등 서비스 분야 전반에 걸친 규제를 없애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미 무역대표부가 최근 발간한 '2005 무역장벽 보고서'는 미국 업계가 한국 방송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폐지돼야 할 한국의 무역장벽으로 △한국방송광고공사의 광고 독점 △지상파와 케이블·위성 방송의 외국인 소유지분율 제한 △외국 제작물의 방송시간 제한 △외국방송 재송신 더빙 금지 및 외국방송 재송출물에 대한 방송광고 제한 등을 꼽고 있다.
***미국의 방송시장 규모, 우리의 30배**
만약 이러한 미국의 요구가 그대로 관철된다면 한국의 방송산업은 규모가 훨씬 더 큰 미국의 방송산업과 아무런 보호막 없이 맞서야 할 판이다.
국내 방송시장의 규모는 2004년 현재 7조 원 안팎인 데 비해 미국은 약 1900억 달러(200조 원)로 30배 가량 된다. 또 방송산업의 노동생산성 역시 미국이 우리보다 1.8배(2002년도 기준)나 돼, 한미 FTA가 체결될 경우 국내 방송업계의 일자리 축소와 고용안정성의 악화가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 때문에 현재 미디어·방송 종사자들이 모여 '한미 FTA 저지 시청각 미디어 공동대책위원회'를 꾸려 활동에 들어간 상태다. 이들의 '발빠른' 대응은 영화인들의 맹렬한 반대에도 지난 7일 국무회의를 열어 스크린쿼터 축소 계획을 통과시킨 정부에 대한 불신의 표출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은 스크린쿼터를 서슴지 않고 축소시키는 정부를 보며 '과연 한국 정부가 미국과 협상할 능력과 제대로 된 문화정책을 가지고 있는가'에 심각한 의문을 품게 된 것이다.
***'스크린쿼터 축소'의 교훈**
스크린쿼터 축소 문제가 한미 FTA의 협상 내용이 아니라 협상의 전제 조건이었던 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스크린쿼터 문제는 방송개방 압력의 전초전에 불과했다.
특히 그간 정부와 언론이 왜곡해 온 바와 달리 한국의 영화산업은 결코 '폐쇄된 시장'이 아니라는 점에서 영화인들은 정부의 스크린쿼터 축소 계획은 합당한 논거를 갖추지 못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한국은 1987년 이후 외국 영화배급사가 국내 극장에 영화를 직접 배급할 수 있도록 허용해 왔다. 현재 146개 세계무역기구(WTO) 회원국들 가운데 영화 및 비디오 제작·배급 서비스 시장을 개방한 나라는 23개 나라에 불과하며, 이에 비추면 한국의 개방수준은 이미 상당히 높은 것이었다.
배급서비스 시장 개방의 결과는 처참했다. 1987년 이후 평균 30~40% 수준을 유지하던 한국영화의 시장점유율은 계속 하락하기 시작해 1993년에는 15% 수준까지 떨어졌다.
이 비율이 다시 연평균 50%대까지 회복된 것은 영화 분야에서 유지돼 온 스크린쿼터 제도 덕분이었다. 한국영화는 영화인들이 '스크린쿼터 감시연대'를 결성해 극장들이 유명무실했던 스크린쿼터를 지키게끔 한 1990년대 중반부터 차츰 살아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과거가 이야기해주는 바는 분명하다. 문화산업은 최소한의 보호장치가 있어야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고, 미국의 거대 자본과 문화산업에 아무런 보호막 없이 맞서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며. 그럼에도 '한미 FTA 체결을 위해 무엇이든 하겠다'는 정부의 태도는 매우 위험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미식축구 선수 출신의 K-1 격투기 선수 밥 샙의 맞상대로 '국민 여동생' 문근영을 링 위에 올리는 것과 같다.
***대미 방송프로그램 수출입, 극심한 불균형**
방송시장 개방 문제는 곧 '우리의 방송산업이 외국 거대자본의 국내 방송시장 진입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만큼 건실한가'의 문제라 할 수 있다.
지난 13일 한국방송영상산업진흥원에서 낸 '2006년 방송프로그램 수출입 현황'을 보면 수출은 2004년에 비해 72.8% 증가한 1억2349만3000달러, 수입은 18.9% 증가한 3697만5000달러로 수출액이 수입액을 3배 이상 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렇게 총액으로만 보면 한국의 방송은 어느 정도 국제경쟁력을 갖췄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작년도 수출입 현황을 분석한 결과를 보면 수출은 일본(비중 60.1%), 대만(11.4%) 등 아시아 지역이 전체 수출액의 95.3%를 차지해 아시아 편중이 크게 나타났다. 반면 수입은 미국(62.5%), 일본(18.4%) 등에 치우치는 경향을 보였다.
한국은 미국으로부터 2310만4000달러에 이르는 방송프로그램을 수입했지만 미국으로의 수출은 286만 달러(전체 수출액의 2.5%)에 그쳐 심각한 수출입 불균형을 나타냈다. 현재 방송시간의 일정 비율을 국산 프로그램으로 방영하게 하는 방송쿼터제가 실시되는 상황에서도 이러한 불균형이 나타난다는 사실은, 만약 미국의 요구대로 방송쿼터가 낮아진 이후에는 한국의 영상산업이 더욱 수세에 몰릴 것이라고 예측하게 한다.
그렇게 될 경우 아시아 지역의 한류 바람으로 2002년 이후 지속적인 수출 우위를 이어가고 있는 한국의 방송영상산업이 발목을 잡히는 상황이 초래될 수도 있다.
***방송을 문화가 아닌 산업으로 키워 온 미국**
한국과 미국 간의 이런 격차는 그간 미국이 구사해 온 자국 방송산업 육성 전략을 따져보면 당연한 결과임을 알 수 있다.
미국은 기본적으로 문화적 정체성보다는 미국 문화의 산업화를 목표로 삼아 방송산업을 육성해 왔고, 미국 방송산업의 세계화를 지원하는 정책을 추진해 왔다.
미국 정부는 자국 내에서는 산업 간, 그리고 각 산업 내의 기업인수합병(M&A)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여 왔다. 이러한 M&A 끝에 형성된 독과점 체제에 대해서는 ' 소비자의 이익에 배치되지 않으며, 의도적인 폐단이 없다'며 허용했고, 결과적으로 강력한 독과점 사업자들을 길러내는 정책을 펼쳐 왔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대외적으로는 공정경쟁을 위한 시장개방, 독과점 방지를 요구하는 정책을 요구함으로써 자국의 경쟁력 있는 사업자들이 해외시장을 확보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태도를 취해 왔다.
이는 공공서비스와 상업주의를 절충하는 방식의 방송정책을 추진해 온 유럽연합(EU)과 극명한 대조를 보이는 지점이다.
EU는 미국을 상대로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1989년에 '국경 없는 TV 협약'을 체결하는 한편, 공공성 확보를 위해 우리의 쿼터제에 해당하는 '외부제작 프로그램 편성의무'와 'EU 역내 프로그램 편성의무'를 방송에 부여함으로써 다양한 독립제작사들을 간접적으로 지원하는 정책을 추진해 오고 있다.
***전 분야에서 취약한 한국의 방송산업**
이에 비해 우리나라 방송산업은 적극적인 투자가 부족하고 지상파 방송 중심의 독과점 구조가 오랫동안 지속된 탓에 시장경쟁력도 낮은 수준이며, 방송 콘텐츠의 질도 낮은 편이다.
한국의 방송산업은 단순히 영상을 중계하는 방송서비스만이 아니라 콘텐츠, 기술개발, 인력 면에서 많은 취약점을 드러내고 있다.
방송산업을 질적으로 보완해줄 수 있는 콘텐츠 제작사들은 주로 소규모 자본의 영세업체들로서 지상파 방송사의 하청에 매달리고 있을 뿐 아니라 제작물의 유통구조가 취약하고 기술과 인력의 부족에 시달리는 등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또 방송기술의 측면에서 한국은 TV 등 수상기 산업 위주로만 발전했을 뿐 보다 고도의 기술이 요구되는 방송장비 부문의 기술은 저조한 실정이다.
때문에 방송영상산업을 육성, 발전시키려는 보호정책 없이 섣불리 방송시장 개방을 나서게 되면 '방송산업'의 경쟁력도 '방송'의 공익성도 모두 잃는 결과가 초래될 것이 명약관화하다.
***'문화적 예외'를 잊지 말자**
앞으로 진행될 한미 FTA 협상 과정에서 미국은 분명 어떤 수준으로든 방송시장의 개방을 요구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정부의 대응이다. 특히 정부는 미국의 개방압력에 맞설 만한 충분한 정책수단이 우리에게 있음을 알아야 한다.
방송이 본래 지니고 있는 문화적 의미로 인해 방송서비스는 WTO의 다자간 협상 대상에서 유보됐다. 또 자국의 콘텐츠 산업 보호는 국제적으로도 '문화적 예외'의 원칙에 해당되어 충분한 명분을 갖는다.
WTO 서비스 분야 협정이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자유화 규약 등에서 인정하는 '문화적 예외'란 문화적 정체성 보호 및 유지와 관련된 분야는 자유무역의 대상에서 제외하는 원칙이다. 이 '문화적 예외'는 미국과 캐나다 사이에 맺어진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에서도 인쇄·출판과 방송서비스 등 시청각서비스에 해당하는 분야에 대해 적용되고 있다.
산업적 측면에서는 방송 프로그램의 공공재적 특성을 감안해 공정경쟁의 원칙의 관철과 독점에 대한 규제가 주장될 수 있고, 이런 주장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이러한 논리로 방송시장 개방과 관련된 국제협상에서 최대한 자국 시장을 보호하려는 EU 국가들의 대응태도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오늘날의 한국의 방송산업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나라 방송시스템은 부단한 개혁을 통해 보다 활성화되고, 보다 양질의 콘텐츠를 생산해낼 수 있도록 개혁되고 발전돼야 한다. 그러나 그 방법이 준비 없는 시장개방과 같은 극단적인 것은 아니라고 지적하는 전문가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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