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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번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화제의 책] 김용준의 〈내가 본 함석헌〉

지난 한 주 동안 큰 일이 두 가지가 있었다. 야구로 미국에 한 방 먹이고 있는 사이에 평택에서는 미군기지 이전 때문에 멀쩡한 땅을 빼앗긴 촌로들이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질 위기에 처했다. 지역주의에 기생하는 정치인과 막대한 개발 이익에 침 흘리는 토건자본 외에는 득을 볼 사람이 없는 새만금 간척 사업은 대법원으로부터 최종 승인을 받고 끝까지 폭주할 태세를 갖췄다.

하지만 같은 시간 모든 국민의 관심은 야구에 집중돼 있었다. 미국에서 채 한 뼘도 안 되는 자리에 태극기를 꽂는 동안 이웃의 삶의 터전이 송두리째 미국의 손에 넘어갈 상황에 처했는데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뭇 생명이 희생되는 것은 물론이고 앞으로 도대체 몇 조 원의 혈세가 낭비될지 모르는 사업이 강행되는데도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함석헌은 1958년 5월 〈사상계〉에 기고한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는 글에서 생각하지 않는 이들을 이렇게 질타했다. "뜻 품으면 사람, 뜻 없으면 사람 아니. 뜻 깨달으면 얼(靈), 못 깨달으면 흙. 전쟁을 치르고도 뜻도 모르면 개요 돼지다. 영원히 멍에를 메고 맷돌질을 하는 당나귀다."

***운명적인 만남…격동의 역사와 같이한 두 사람**

흰 수염, 두루마기, 고무신. 지난 20세기 한반도의 큰 스승이었던 함석헌의 탄생 105년(3월 13일)을 맞아 고려대 명예교수 김용준이 〈내가 본 함석헌〉(아카넷 펴냄)을 펴냈다. 1927년생인 김용준은 1901년생 함석헌보다 한 세대 가까이 차이가 나는 후배다. 하지만 나이는 속세의 계산일 뿐이다. 김용준은 함석헌 생애에 대한 완벽한 증인이자 사상적 동지로 꼽힌다.

첫 대면부터 운명적이었다. 일제 강점기 한창 때 태어나 제대로 읽어본 역사책이라고는 한 권도 없었던 김용준은 1949년 봄 종로에 있는 옛 YMCA 목조 건물에서 처음으로 함석헌과 만난다. "한국에도 페스탈로치와 같은 저런 분이 계셨구나" 하고 첫 만남을 정리했던 김용준은 그 뒤 함석헌이 운명하는 1989년까지 한국 현대사의 한복판에서 그와 동행한다.

그 동행은 시작부터 순탄치 않았다. 만난 지 1년이 조금 지난 1950년 6월 18일, 한 모임에서 함석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라꼴이 이럴 수가 있는 것이냐? 지금 이 밑에서는 화산의 불길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는데 그 분출구 위에 살짝 덮여 있는 얇은 암반이 마치 만세 반석이나 되는 양, 이렇게 까불고 있는 이 나라는 장차 어찌 될 것인가."

불행하게도 함석헌의 이 예고는 채 한 주일도 못 돼 현실화됐다. 한국전쟁이 터지자마자 해방 후 좌익 사상에 흠뻑 빠졌던 김용준은 종군 통역으로 압록강 근처까지 올라갔다가 중공군 2차 공격으로 다시 남하하는 등 본격적인 한반도의 운명에 몸을 내맡긴다. 이 아수라장에서도 그를 견디게 한 것은 불과 몇 달 전 읽은 함석헌의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였다.

***이미 40년 전에 생명과 평화를 얘기한 선각자**

전공인 유기화학 말고는 모든 것을 함석헌에게 배웠다는 김용준은 지금도 매일 아침 벽에 걸린 함석헌의 사진을 보며 일과를 시작할 정도다. 하지만 김용준은 함석헌의 신격화는 단호히 거부한다. "지금도 혹자는 함석헌이 지나치게 신화화되었다는 평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옳은 소리라고 생각한다. (…) 나는 함석헌은 철저히 사람이었음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함석헌의 가장 든든한 옹호자다. 1980년대 '나이 들어 정신이 흐려졌다'는 비아냥거림을 샀던 함석헌의 언행에 대한 뒷얘기 하나. 당시 함석헌은 1988년 서울올림픽 때 올림픽 정신을 평화운동으로 승화시키자는 서울평화대회 위원장으로 추대됐었다. 이 일을 놓고 함석헌에게 쏟아지던 비난의 목소리를 전하자 함석헌은 다음과 같이 일갈했다. "아니 그러면 평화를 사랑한다면서 나 싫어하는 사람들과는 악수도 하지 말란 말이냐!"

김용준은 함석헌의 평화사상이야말로 세계 모든 만민을 품에 안는 큰 사랑의 정신이라고 본다. 21세기의 화두로 각광받고 있는 생명사상, 평화사상은 함석헌의 그것과 멀지 않다. 함석헌이 1961년에 쓴 〈5·16을 어떻게 볼까〉의 한 대목을 읽어보자. 그는 4·19 혁명의 의미와 한계를 다음과 같이 짚고 있다.

"4·19의 정신은 늘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 녹색정신, 그 평화주의, 그 비폭력주의, 그 공명정대주의, 늘 자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잎으로서 하는 것이 아니요, 나무로서만 하는 것이다. (…) 자엽(子葉)부터 나오지, 하지만 마침내는 나무가 서야 한다. 학생이 시작했지만 혁명은 민중의 혁명이 있어야 할 것이었다. 4·19는 그렇지 못했다."

***다시 한번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이 책이 특히 돋보이는 이유는 연전에 출간된 리영희의 〈대화〉(한길사 펴냄)와 마찬가지로 20세기 후반기의 역사적 격랑을 겪어 온 한 지식인의 고뇌가 책 전체에 걸쳐 녹아 있기 때문이다. 김용준은 함석헌의 삶의 후반기를 따라가면서 자연스럽게 겹치는 자신의 얘기를 들려준다.

사실 김용준의 삶 역시 함석헌을 깊이 흠모한 지식인에게서 함석헌의 사상이 어떻게 펼쳐지는지를 보여주는 한 보기이다. 김용준 역시 항상 '생각하는 백성'으로서 책무를 잃지 않았다. 1965년부터 고려대 화학공학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1975년 첫 번째 해직을 경험한 뒤 1984년까지 완전히 복직할 때까지 두 차례 강단을 떠나야 했던 것과 같은 크고 작은 고초는 '생각'을 한 탓에 얻은 고행이었다.

함석헌은 2006년 지금 우리에게 또 무슨 질책을 할까? 불행하게도 1958년에서 반세기가 가까워오지만 여전히 우리는 변한 게 없다. 함석헌은 다시 한번 일갈하지 않을까?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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