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이면 나는 조선인성학교에 가서 영어 공부를 하였다. 그밖에 에스페란토와 무정부 이론도 공부하였고 틈이 나면 상해에서의 조선인의 생활과 활동을 모든 면에 걸쳐 조사하였으며, 상해에 망명해 있던 모든 조선인 혁명가들과 친하게 되었다. 또한 전차를 타고 시내 곳곳을 둘러보기도 하였다."(님 웨일스의 〈아리랑〉 中)
이렇게 님 웨일스의 〈아리랑〉으로 널리 알려진 김산(본명 장지락·1905~1938)은 왜 에스페란토를 배웠을까? 김산이 중국 공산당에 의해 숙청되기 직전 홍콩의 에스페란토 잡지에 기고한 글이 발굴돼 주목된다.
***김산이 직접 에스페란토로 쓴 글 공개돼**
한국에스페란토협회 안종수 전 사무국장은 최근 펴낸 저서 〈에스페란토, 아나키즘 그리고 평화〉(선인)에 김산이 직접 에스페란토로 써서 홍콩의 한 에스페란토 잡지에 기고한 글 '전쟁 중 연극운동'을 소개했다. 이 글은 1938~39년 홍콩에서 발간된 에스페란토 잡지 〈원동사자(遠東使者)〉 1939년 5월호에 실린 것이다.
이 잡지의 발행시점이 김산이 죽은 뒤인 점으로 미뤄볼 때 김산의 원고는 1937~38년 경 작성돼 투고됐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글은 일부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그 존재가 알려지기도 했으나 한국어로 번역돼 소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김산은 이 글에서 항일 전쟁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연극이 얼마나 대중을 각성시키는 데 효과적인 방법인지를 실제 경험을 통해 접했을 법한 다양한 사례를 열거하며 설명하고 있다. 특히 김산은 글 말미에 "중국과 중국 민중의 위대성"을 언급하고 있어 그가 1938년 숙청당하기 직전까지 중국 사회주의 혁명의 대의를 깊이 신뢰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안종수 씨는 "김산이 의열단 활동에 관여하면서 에스페란토를 했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었지만 그의 에스페란토 실력이 어느 정도였고 또 에스페란토를 어떻게 활용했는지에 관해서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다"며 "김산이 직접 에스페란토로 작성한 글을 보면 상당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고 지적했다.
***에스페란토, 한·중·일 아나키스트들 연대의 매개**
한편 〈에스페란토, 아나키즘 그리고 평화〉는 김산의 예에서 보듯이 1920~30년대 한·중·일의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들이 에스페란토를 통해 소통을 해 온 사실을 여러 가지 증거를 통해 제시하고 있어 흥미를 끈다.
1907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국제 아나키스트 대회에서 아나키스트의 공식 언어로 에스페란토가 채택된 것과 맞물려 20세기 전반기에 아시아에서도 아나키즘과 에스페란토는 동전의 양면처럼 확산됐다. 이런 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 바로 일본의 대표적인 아나키스트 오스기 사카에다.
오스기는 1900년대 초 도쿄의 전차 요금 인상 반대 운동에 참가했다가 체포된 후 3개월 간에 걸친 수감 기간 동안 에스페란토를 접한다. 오스기는 출감 후 일본에스페란토협회를 설립하고 중국인 아나키스트들에게 에스페란토를 교육하는 등 눈부신 활동을 하게 됐다.
특히 일본에서 1921년부터 몇 해 동안 오스기를 중심으로 아나키즘이 전성기를 맞으면서 이 과정에서 많은 조선인 유학생들도 큰 영향을 받았다. 이 책은 김산, 박열 등도 이 때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조선 지식인들에게도 큰 영향…"제국주의 언어의 대안으로 각광"**
이렇게 해외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위한 연대의 도구로서 무정부주의자들에 의해 크게 각광을 받았던 에스페란토는 민족주의자나 사회주의자들에게까지 파급력을 보이며 확산됐고, 이는 곧 국내에까지 큰 영향을 미치게 됐다.
국내에서는 이미 김억, 홍명희 등의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1920년대부터 에스페란토가 보급되기 시작했다. 이런 영향 때문에 1920년 창간된 동인지 〈폐허〉나 1921년 창간된 〈개벽〉에는 각각 해당 제호를 〈LA RUINO〉, 〈LA KREADO〉와 같이 에스페란토로 명기하기도 했다. 특히 1923년 9월 5일에는 홍명희가 서문을 쓴 김억의 〈에스페란토 독습〉도 발행됐다.
하지만 본격적인 에스페란토 보급은 일본에 유학을 다녀온 인사들에 의해 이뤄졌다. 1919년 '2·8 독립선언'을 주도했던 백남규는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까지 국내에서 에스페란토 보급운동의 선두에 섰다. 특히 그는 1931년 7월부터 〈동아일보〉에 100회의 에스페란토 지상강좌를 실시하기도 하였다.
〈에스페란토, 아나키즘 그리고 평화〉에서 안종수 씨는 "1920~30년대의 동아시아에서 특히 조선이라는 지정학적 위치에서 에스페란토는 당시 지식인들의 사상적 부족분을 채워줄 수 있는 하나의 언어로서 존재했다"며 "중국이라는 커다란 국가의 몰락과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국토의 유린을 지켜보면서 지식인들에게 중국어는 이빨 빠진 호랑이의 언어였고 일본어는 식민지국에서 살아남기 위한 입신양명의 언어였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안 씨는 이어 "아직 미국이라는 나라의 영어는 조선인에게 커다랗게 손길이 미치지 않았던 미지의 땅과 같은 또 하나의 제국주의 언어였을 뿐"이라며 "이 때 소개된 에스페란토는 언어적 측면을 떠나 국내 지식인들에게 사상적인 면에서 새 사회의 건설을 위한 동반자적인 역할로 존재했고, 지식의 새로운 축적을 위한 언어로 빠르게 번져 나갔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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