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군경의 눈을 피해 두만강을 건너 국경을 오가며 필사적으로 소금장사를 하는 여인. 식민지의 고단한 현실을 온 몸에 걸머지고 사는 그녀가 마침내 항일빨치산과의 만남에서 새로운 역사적 정체성을 갖게 된다는 내용.
1985년에 나온 영화 〈소금〉의 줄거리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배우 최은희의 단연 돋보이는 연기적 투혼을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알려진 대로, 그녀와, 그녀의 남편 신상옥 감독이 북한에서 만든 작품입니다. 항일투쟁이라는 북한 체제의 출생과 관련한 역사의식과 결합한 신상옥 감독의 연출력은 당시 북한 영화들이 가지고 있던, 다소 연극조의 비장한 어조와 결론이 너무 쉽게 보이는 계몽적 설득방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지점에 도달해 있습니다.
신상옥, 최은희 두 사람이 지나온 우여곡절과 드라마 같은 일련의 과정은 개인사적으로는 고통스러운 것이었지만, 결과만을 놓고 보면 최초의 남북 합작 영화의 출발점을 기록했던 셈이었습니다.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 〈조선의 별〉이라든가 〈꽃 파는 처녀〉 등의 북한 영화가 민족사의 중대한 면모들을 짚어내고 있기는 하지만 전개속도가 너무 느리고 장황한 묘사를 보이던 경향들이 그로써 교정되는 계기를 얻었다고 하기도 합니다.
〈로맨스 빠빠〉,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연산군〉, 〈빨간 마후라〉, 〈이조 여인 잔혹사〉, 〈대원군〉 등으로 목록을 작성하게 되면 우리는 '신상옥'이라는 이름이 한국 100년 영화사에서 하나의 거대한 기둥인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김승호, 황정순, 허장강, 김희갑, 신영균, 신성일, 엄앵란, 김진규, 최무룡 등등의 이름은 신상옥 시대의 별들이었습니다.
특히 1955년 조미령과 이민이 주연한 이규환 감독의 〈춘향전〉으로 국도극장에 10만의 인파가 몰려들면서 한국영화의 중흥을 알린 이후 사극시대가 열렸고, 이에 자극받은 신상옥 감독은 〈젊은 그들〉 〈꿈〉 〈무영탑〉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그러더니 드디어 1961년 최은희의 〈성춘향〉으로 서울에서만도 74일간, 당시로서는 기록적인 38만 명 관객의 역사를 쓰게 되었습니다.
곡마단이 점차 사라지고 아직 TV는 대중화되지 않았던 시절, 한국영화는 무엇보다도 서민들에게 위로가 되었고, 해방의 격동과 참혹한 전쟁을 겪으면서 흘린 눈물이 아직도 더 남아 있던 때의 애환의 현장이었습니다.
사극(史劇)은 당대의 정치사회적 현실을 소재로 삼기 어려웠던 조건에서 택할 수 있는 최선의 재료였고, 〈로맨스 빠빠〉등의 가족 드라마는 급속하게 변화해가고 있던 한국사회의 불안과 가족해체에 맞선 고민의 산물이기도 했습니다.
무수한 화제와 파란만장한 인생역정, 그리고 빛나는 영화사적 성취를 남긴 신상옥 감독의 부음(訃音)을 우리는 들었습니다.
그는 한국 영화의 발전에 지울 수 없는 족적을 후배들에게 유산으로 전하고 떠났습니다. 각박하고 어려웠던 때에, 영화 하나에 목숨을 걸고 전력투구했던 신상옥 감독. 분단의 역사를 온 몸으로 겪어냈던 그. 그리고 결국 마지막 순간까지도 영화에 대한 꿈을 품고 있던 그.
명복을 빕니다.
그와 함께, 제2의 새로운 융성기를 맞이한 한국영화가 지금 처한 도전. 스크린 쿼터 축소와 함께 그만큼 설 자리를 잃을 위기에 맞닥뜨린 한국 영화의 현실. 그냥 이대로 물러설 수 없다는 영화인들의 외침은 신상옥 감독의 죽음과 겹쳐서 오늘날 한국영화의 고뇌를 우리에게 일깨우고 있습니다.
국경을 오가며 두만강 일경의 눈을 피해 소금을 팔아야 했던 시절은 이미 지난 지 오래이건만, 우리는 여전히 저항의 시대를 살아야 하는 것인지 엄중히 묻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 글은 〈프레시안〉의 편집위원인 김민웅 박사가 교육방송 EBS 라디오에서 진행하는 '김민웅의 월드센타'(오후 4-6시/FM 104.5, www.ebs.co.kr)의 5분 칼럼을 프레시안에 동시에 연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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