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어머니, 언제쯤 함께 살 수 있을까요?"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어머니, 언제쯤 함께 살 수 있을까요?"

〈전태일통신 24〉이주노동자와 망명자

이번 <전태일 통신>의 필자 윈라이 씨는 1972년 버마에서 태어나 대학생이던 1990년 버마 민주화시위에 참여했다가 군사정부의 탄압과 추적을 피해 조국을 탈출, 중국과 태국을 거쳐 1993년 한국에 왔다. 1995년에는 다시 태국 국경 근처로 가서 버마 민주화운동가들과 함께 활동하다 1996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2004년 버마행동이라는 버마민주화운동 단체를 공개적으로 결성해 활발하게 활동을 벌이고 있는 윈라이 씨는 2004년 한국정부에 난민신청을 했는데 아직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이 글을 통해 버마 인권운동가들의 소박하면서도 절절한 소망의 일단을 우리 독자들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버마 민주화운동 활동가들은 버마 군사독재 정부가 나라 이름을 '미얀마'로 바꾼 것을 인정하지 않고 여전히 '버마'라고 부르고 있다. 〈편집자〉

그리운 어머니.

먼저 사랑하는 모든 가족에게 사과해야 할 것 같아요. 저는 항상 아버지께 "제가 가족을 전혀 돌보지 못하고 있는 것 때문에 항상 미안해하고 있어요"라고 말씀드립니다. 지금도 아주 오랜만에 편지를 씁니다. 아버지께서는 저를 이해해 주시겠지만 어머니는 아마 이해 못하시는 것 같아요. 어머니 심정도 제가 이해합니다. 저를 걱정하는 마음 때문에, 가족이 따로따로 헤어지게 될까봐 미리 말리셨던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저는 가끔 제가 아버지와 외할아버지를 본받아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어릴 적부터 가난한 이웃 일이라면 만사를 제치고 돕는 아버지 모습을 많이 보아 왔지요. 언제던가요. 아버지께서는 가난한 이웃들이 장례를 치를 때 돈이 없어 화장터까지 시신을 옮기지 못해 애태우는 것을 보고는 운구차를 마련해 주고 싶어 하셨습니다. 가난한 우리 동네에는 운구차가 없어 시신을 옮기지 못하는 일도 많았고, 시신을 어찌 옮긴다 해도 가족이 화장터까지 따라가지 못하는 일도 많았지요. 그때 주변 사람들이 반대해서 뜻을 이루지 못하셨던 아버지께서 안타까워하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외할아버지도 마찬가지셨어요. 외할아버지께서는 민주화운동을 하던 이들이 모여 일할 자리가 없다는 소리를 듣고 당신 집을 선뜻 내주셨습니다. 그 일 때문에 외할아버지께서 체포되어 온갖 고초를 다 겪으셨던 일도 마음에 새긴 듯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머니, 저는 어머니와 가족 모두를 사랑하고 항상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억압 속에서 살면서도 '자유'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어머니, 잊지 마세요. 지금 제가 가족도 만나지 못하고 먼 나라에서 고생하고 있는 것은 우리나라 독재정부 때문입니다. 독재 정부가 얼마나 나쁜지 잘 생각해 보시면 알 거예요. 우리 국민은 항상 엄청난 억압 속에 살고 있지만 그 억압이 얼마나 큰지도 잘 모르고 자유가 무엇인지도 잘 모르고 있는 것뿐이랍니다.

어머니께서는 저를 무척 걱정하시지만 저는 괜찮습니다. 몸도 건강하고요. 아버지 어머니께서는 건강하신지요. 누나와 동생도 잘 있는지요. 어머니 생각나세요? 누나가 결혼한다고 전화로 말씀하셨을 때 제가 울었던 일 말입니다. 그때는 제 마음이 너무 섭섭하고 슬프고 너무도 그리워서 울었어요. 하나밖에 없는 누나를 시집보낸다니 마음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지금도 섭섭하냐고요? 아닙니다. 어머니, 지금은 조카들이 보고 싶고 안아주고 싶을 때마다 사진을 들여다봅니다. 그 귀여운 목소리를 듣기 위해 전화도 가끔 하죠. 동생이 결혼할 때도 저는 놀라고도 서글펐습니다. 어머니께서도 아시지요? 제수씨가 제 친구 동생이라는 것을. 그 친구는 1988년 저와 함께 거리 시위를 벌이다 총에 맞아 숨졌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 친구의 마지막 숨결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친구의 여동생이 제수가 되다니요. 참으로 놀랍고 반가운 일입니다.

그동안 새로운 가족이 태어나기도 했지만 많은 분들이 돌아가셨지요. 할아버지, 할머니,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 때 저는 뒤늦게 알고서 사무치는 그리움과 죄송한 마음 때문에 무척 괴로웠습니다. 그리운 어머니, 제가 집을 떠나온 지도 벌써 13년이 됩니다. 그동안 쌓인 그리움과 외로움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을까요?

***독재정부는 이국에서도 제 나라 국민을 괴롭힙니다**

1990년 스님과 학생들의 시위가 거세지자 독재정부가 목을 죄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만달레이에서 시위에 참여했다가 주변 동료들이 발각되어 잡혀가는 것을 보고 무세(버마 북부 도시)를 거쳐 중국 쉬리로 탈출했습니다. 다시 태국을 거쳐 한국에 오기까지 여정은 길고도 한심스러웠습니다.

한국에 와서 처음에는 숨어 있듯 조용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한국에는 돈을 벌기 위해 와 있는 버마 사람이 많습니다. 저도 일하면서 주변 친구들을 조금씩 돕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급작스런 병으로 사경을 헤매기도 했고, 어떤 사람은 열심히 일해주고도 월급을 못 받아 괴로워했습니다. 적지 않은 버마 사람들이 죽고 다치고 아팠으며 돈 문제로 힘겨워 했습니다.

제 처지도 무엇 하나 다를 바 없었지만 저는 친구들을 조금이라도 돕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다보니 간혹 마음이 통하는 친구를 만나 마음속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더군요. 저와 비슷한 이유로 한국에 와 있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고, 어떤 친구들은 버마를 떠나면서 비로소 세상을 배우기 시작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또 어떤 친구들은 버마보다 더 발전되고 민주화된 한국에서 버마를 바라보며 그동안 몰랐던 진실을 깨닫기도 했습니다.

요즘은 그 친구들과 뜻을 합쳐 새로운 움을 틔워 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우리 정부는 여기 한국에서까지도 국민을 착취하고 못살게 굴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버마인이 숨도 못 쉬게 감시하고, 활동을 방해하고, 불법적인 방법으로 돈을 뜯어내지요. 저와 친구들은 대사관이 하는 일을 감시하고 잘못된 일이 있으면 항의하며 시정을 요구합니다. 아직 이렇다 할 성과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감시와 항의마저 없으면 더욱 기승을 부리겠지요.

***언제 우리 가족이 모여 살 수 있을까요?**

한국에는 우리 버마인들을 비롯해 동남아시아의 이주노동자들이 많이 와 있습니다. 한국은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정착된 나라지만 한국에 와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에게는 아직 제대로 된 인권이 보장되지 않고 있어요. 열심히 일한 노동의 대가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또 대부분의 경우 힘들고 어려운 3D 업종에서 일해야 하기 때문에, 열악한 환경과 부당한 대우로 몸과 마음이 상하고 있어요. 그중에서 미등록으로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은 더욱 심한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미등록되어 있는 이주노동자들은 언제 단속에 걸리고 잡혀갈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몸이 아프더라도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기 힘든 친구들도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저는 우리 버마 사람들을 비롯한 이주노동자들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저와 생각이 같은 이주노동자들과 또 한국의 인권활동가들과 함께 싸우고 있어요. 한국의 인권활동가들은 예전에 우리나라와 같은 군사독재 정부와 싸운 경험을 가지고 있고 지금도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싸우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아직 한국 사회에서 많지 않아요. 많은 한국 사람들은 이주노동자들을 이상한 눈으로 보고 있고 차별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활동으로 이러한 한국의 상황들이 그래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요. 한국에도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저는 집을 떠나 떠돌며 더 넓은 세상을 배우고 있습니다. 저는 거친 세상에서 사회를 바라보는 눈을 키웠고, 기술을 배우고, 밥벌이 하는 방법을 터득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민주적인 사회를 이룩하고 싶다는 뜨거운 열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제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이 뜨거운 불씨를 많은 이들과 함께 나누는 것뿐입니다. 어머니, 어머니를 뵐 수도 없는 이 먼 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그것뿐입니다. 그러나 어머니, 저를 안타까워하지 마세요. 저는 그것만으로도 기쁘답니다. 저는 많은 친구들과 진실을 나누고 열망을 키우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머니, 어릴 적부터 집을 떠나 생활하는 일이 많았던 저는 아주 작지만 소중한 꿈을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 아마 어머니께서 간직하고 계신 꿈과 같은 것이겠지요. 저는 우리 가족이 모두 모여 함께 살게 되기를 바라고 고대합니다.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올 것입니다. 어머니, 제가 달려갈 때까지 건강하시기를 바라고 또 바랍니다.

한국에서 윈라이 올림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