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잎처럼 금남로에 뿌려진 너의 붉은 피. 두부처럼 잘려나간 어여쁜 너의 젖가슴. 5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5월의 노래' 중에서)
고 손옥례. 1980년 5월 19일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을 준비하던 그는 아버지로부터 외출이 너무 잦다는 이유로 심한 꾸지람을 들은 뒤 집을 나갔다 연락이 끊겼다. 그는 5월 28일 망월동 묘지에 가매장된 싸늘한 시신으로 열흘 만에 가족들을 만났다.
"좌 유방부 자창, 우측 흉부 총상, 하악골 총상, 좌측 골반부 총상, 대퇴부 관통 총상, 우 흉부 관통 총상." 사망자 검시서에 기록된 그의 사망 원인이다. 그는 '5월의 노래'에 나온 바로 그대로 "두부처럼 젖가슴이 잘려나간 채" 숨졌다.
1980년 5월 살아남은 사람들이 슬픔을 꾹 누르고 구술한, 죽은 이들의 사연을 묶은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5·18민주유공자유족회 구술, 5·18기념재단 엮음, 한얼미디어 펴냄)는 맨 정신으로 보기가 어려운 책이다. 두 권의 책으로 묶인,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열흘 동안 숨진 151명의 삶과 죽음의 사연은 어느새 5월을 잊고 사는, 아니 한번도 제대로 기억한 적이 없던 우리들의 뒤통수를 후려친다.
***"무엇이 끝났다는 것인가"**
1990년대 초반 드라마 〈모래시계〉로 최근에는 〈제5공화국〉으로 간헐적으로 그 사태의 실상이 일부 알려지긴 했지만 여전히 대다수 사람들에게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열흘 동안 광주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여전히 물음표다.
물론 사태의 전 과정을 꼼꼼히 기록한 임철우의 〈봄날〉(문학과지성사 펴냄)과 같은 훌륭한 문학적 성취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재벌가와 인연을 맺은 한 여배우가 주연한 동명의 드라마만을 기억할 뿐이다. 이런 애매하고 혼란스런 상황 속에서 '빨갱이들의 폭동'은 '민주화 운동'으로 격상됐다. 과연 우리는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일까?
"망월동 묘역이 국립모지로 새롭게 조성되고 5·18민중항쟁이 국가 기념일로 지정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변화만으로도 5·18 희생자에 대한 예우를 다했다며 서둘러 그날의 기억을 지우려 합니다. 그러나 1980년 5월을 경험하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5월에 대한 진실이 단지 기록으로만 남은 역사로 전달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염려됩니다."
이 책은 1980년 5월을 '기록으로만 남은 역사'로 박제화하지 않기 위한 살아남은 사람들의 몸부림이다. 2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슬픔을 꾹 참아 온 사람들은 왜 지금 입을 여는가? 가구점에서 일하다 5월 21일 도청 앞 시위대의 선두에 섰다 계엄군의 집중 표적이 돼 목숨을 잃은 김상구의 어머니 나점례의 얘기를 들어보자.
"이제 사람들은 5·18 문제가 법적, 제도적으로 끝났다고 말한다. 그리고 5·18 이야기는 그만 하자고 말한다. 그러나 어머니 나점례 씨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속이 상한다. 무엇이 끝났다는 것인가? 여전히 아들은 돌아오지 않았고 자신의 가슴에 똬리를 틀고 있는데…."
***형은 계엄군으로, 동생은 시민군으로**
151명의 사연 하나하나가 기가 막히지만 형은 계엄군으로, 동생은 시민군으로 만난 일은 소설보다 더 극적이다.
프레스 공장에 다니던 김정은 계엄군에게 두들겨 맞은 데 대한 분노로 시위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집을 나간 후 소식이 끊긴 김정은 6월 초에야 망월동 묘지에서 부패한 시신으로 가족과 대면했다. 집을 나선 김정 역시 도청 앞에서 계엄군에게 머리와 가슴에 총을 맞고 사망했던 것. 김정이 스스로를 증명한 것은 프레스에 절단된 손가락이었다.
공교롭게도 김정의 형은 20사단에서 하사관으로 복무하다가 계엄군으로 광주에 파견 나온 터였다. 그는 김정이 사망한 사실을 모르고 귀대했다가 휴가를 나와서야 동생이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형제가 한 사람은 계엄군으로, 또 한 사람은 시민군이 돼야 했던 상황에 살아남은 자는 치를 떨어야 했다. 그리고 그는 평생 가슴에 그 '한'을 묻고 살아남았다.
5월 광주 하면 떠오르는 사람, 윤상원. 열흘 내내 시민군의 중심에 섰던 그는 이른바 '지식인'들이 도청을 빠져나가던 때에도 끝까지 '동지'들과 도청에 남았다 27일 새벽 4시 계엄군의 도청 진입 때 총과 수류탄에 맞아 사망했다. 그의 시신을 처음 목격한 이는 전날 도청에서 피신하라는 조언을 받았던 기자였다. 당시 윤상원은 "내일 계엄군이 쳐들어와도 싸우다 죽겠으며 우리의 죽음은 항쟁의 참뜻을 후세에 남겨 역사화의 밑거름이 되게 할 것"이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광주의 '영웅' 윤상원도 큰아들 '장가' 걱정을 하던 부모의 '아들'이자, 여러 사람들의 '친구'였다. 1982년 3월 가족과 친구들은 서른의 나이에 장가도 가지 못 했던 그를 위해 야학 동지였던 박기순과 영혼 결혼식을 올려주었다. 1978년 12월 불의의 사고로 사망한 박기순을 윤상원은 누구보다도 애통해했다. 이 영혼 결혼식을 전후로 작가 황석영 등이 준비한 노래극 〈님을 위한 행진곡〉이 만들어졌다. 이 노래극에 실린 '님을 위한 행진곡'은 이제 한반도를 넘어 아시아 전역에서 민주주의의 바람을 담은 노래로 불리고 있다.
***"산 자들이 싸우지 않으면 죽은 자들이 일어 난다"**
소설가 조세희는 사석에서 '산 사람들이 싸우지 않으면 죽은 자들이 일어 난다'는 옛말을 들려준 적이 있다. 조세희는 요즘에도 서울 연희동 근처를 지날 때면 불편하다고 한다. 그가 몇 년째 준비하고 있는 소설 〈하얀 저고리〉는 연희동 근처에 몇 십 년 전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 등장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바로 살아남은 자들이 제 역할을 못 하고 있으니 죽은 자들이 들고 일어선 것이다.
"이제 용서하라고 한다. (…) 죽음으로도 다 갚지 못할 죄악 앞에서도 뻔뻔히 잘 살아가는 그런 이들을 이제는 용서하고 살라고 하는 세상 사람들이 원망스럽다. 자식의 주검 앞에, 억울하게 죽은 자식의 주검 앞에 오열해보지 않은 이들은 모른다. 그의 부모가 얼마나 죽을 힘을 다해 겨우 버텨오고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알 수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고 감히 함부로 말하지 말자. 진심으로 사죄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용서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 (1980년 5월 동생을 잃은 황옥술)
그해 5월 그토록 살고 싶었지만 살아날 길이 없었던 그이들을 기억하며 살아 남은 우리가 할 수 있는 몫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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