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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떠난 마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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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떠난 마음은 없다

김철의 '몸살림 이야기'<27> 몸과 마음의 관계 1

***몸과 마음은 경험할 수 있는 것**

이왕 스트레스에 화병까지 다룬 김에 몸과 마음의 관계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내친 김에 다음에 전에 쓰겠다고 약속했던 중요한 문제 하나를 여기에서 풀어 버리고 나서, 그 다음에 우리 몸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아보도록 하자.

결국 이 연재의 목표는 몸을 살리는 방법을 알아보는 것인데, 몸에 대해 마음은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그 역 또한 그대로 성립한다. 마음의 병이 몸의 병이 되고 몸의 병이 마음의 병이 된다고 했을 때, 또 이를 뒤집어서 보면 몸의 건강이 마음의 건강을 가져오고 마음의 건강이 몸의 건강을 가져온다고 했을 때, 이미 몸과 마음의 관계에 대해서 할 얘기는 다 한 셈이 된다. 결국 몸과 마음은 하나이면서도 둘이고, 둘이면서도 하나인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 그런 관계가 되는지에 대해서는 좀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아 3~4회에 걸쳐 이 주제를 다루어 보고자 한다.

어떤 사람은 정신이 중요한 것이지 몸이 뭐 그렇게 중요한 것이냐고 얘기하기도 한다. 어차피 몸이라는 것은 죽어서 썩으면 이 세상에서 없어질 것, 이 헛된 것에 망상을 가지고 큰 관심을 둘 필요가 있느냐고 하는 것이다. 몸은 썩어도 영혼은 하늘나라에 가든 윤회를 하든 어떤 형태로든 남아 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니 이 썩어질 육신에 매달리지 말고 영원한 생명에 관심을 가지자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정신,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필자는 모든 종교가 그러하듯이 사람에게 '영'(靈)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은 마음과 영혼을 구분하지 못하고 얘기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사람이 몸과 마음, '영'으로 돼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영'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은 사람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 즉 사람이면 누구나 보편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을 다루는 것이 아니어서 이견만 분분할 것일 뿐이므로 이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고 싶지 않다. 여기에서는 누구나 함께 경험하고 있고 경험할 수 있는 몸과 마음의 문제만을 다루기로 한다.

또 어떤 사람은 몸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한다. 몸이 너무 아프면 하느님께 호소하려고 해도 기도조차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니, 우선 몸부터 건강하게 살아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사실 몸이 아프면 만사가 귀찮아진다. 무얼 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나지 않는다. 마음이 나지 않으면 '몸'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래서 '몸'이 아파 보지 않은 사람은 아픈 사람의 '마음'을 모른다는 얘기도 한다. 우리가 습관적으로 얘기할 때 "몸과 마음을 다하여"라고 하지, "마음과 몸을 다하여"라고는 얘기하지 않는다. 몸이 먼저라는 것이다.

몸이 먼저인지 마음이 먼저인지는 이야기를 풀어 나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결론이 날 것이다. 다만 여기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몸의 문제든 마음의 문제든 모두 우리가 경험하고 있고 경험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것을 다루게 될 때에는 검증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주장만 있을 뿐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없게 된다.

우리 민족은 경험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겨 왔다. 경험이라는 것은 몸으로 직접 겪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현미경이나 망원경 같은 도구의 도움을 받아서 우리의 경험을 확장시킬 수도 있다. 이보다 더 진전된 도구를 사용해서 우리의 경험을 확장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어쨌든 어떤 탁월한 도구를 사용한다고 해도 그것은 인간에게 있어서는 경험일 뿐이다. 경험을 통해서 확증되지 않은 것은 확실한 지식이 될 수 없다. 특히 몸과 마음을 다룰 경우에는 더더욱 그러할 수밖에 없다.

필자가 벌이고 있는 몸살림운동의 방법도 우리 민족이 수천 년간 경험을 쌓으면서 수정하고 보완해서 여기까지 발전시켜 온 것이다. 수없이 많은 경험을 하면서 잘못 알고 있고 잘못하고 있는 것을 수정하고 보완하면서 하나하나 만들어 온 것이다. 서양적인 방법에 밀려 지금은 잊혀져 가고 있고 아예 무시를 당하고 있기도 하지만, 우리 민족에게는 경험을 통해 이룩한, 인류에게 크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위대한 문화유산이 너무나 많이 널려 있다.

몸에 관한 예를 들면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 현대의학이 들어오고 나서야 당뇨병이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예전에는 이 병을 헛헛증 또는 허갈증이라고 불렀다. 속이 헛헛해서 자주 물을 마시는 증세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런 증세가 있는 사람은 산에 올라가 나무에다 허리를 부딪치게 했다. 쿵쿵 울리면서 허리를 부딪치다 보면 척추가 맞아 들어갔고, 요즘 식으로 얘기하자면 그러면서 '신경이 살아나' 이런 증세가 없어졌다. 몸살림운동에서는 이러한 방법을 이어받아 흉추 11번을 바로잡아 줌으로써, 그리고 1번 방석숙제를 통해 허리를 바로 세우게 함으로써 이러한 증상을 없애는 데 이용하고 있다.

또 예전에는 할머니들이 어깨가 아프면 "이놈의 어깨야!" 하면서 그 아픈 어깨를 주먹으로 쳤다. 치다 보면 통증이 사라졌다. 오십견이라는 병명이 붙어 있는 이 증상이 요즘에는 아주 난치의 병이 돼 있지만, 우리 민족은 이렇게 아주 간단한 방법으로 낫게 했던 것이다. 이것은 몸살림운동에서 말하는 어깨 자가교정인 셈이다. 우리 민족은 경험을 통해서 이렇게 하면 낫는다는 것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 몸살림운동에서는 역시 이러한 경험을 이어받아 틀어진 어깨를 주먹의 말려 있는 부분으로 툭 쳐서 맞추어 준다. 주사를 맞고 물리치료를 하고 약을 먹고, 더군다나 수술을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퇴행성관절염이라는 이상한 병명을 가진 무릎의 통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필자가 어렸을 때만 해도 우리 할머니들은 무릎이 아프면 주먹으로 아픈 무릎 안쪽을 쳐 주었다. 열 번 치다 보면 한 번은 잘 맞아 틀어진 무릎이 바로잡히게 돼 있다. 무릎 자가교정을 한 셈이다. 이 증상은 무릎 아래에 있는 종아리뼈가 바깥쪽으로 틀어져 있는 것인데, 치다 보면 그 뼈가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몸살림운동에서는 이 방법을 이어받아 퇴행성관절염이라는 아주 잘못된 병명을 가지고 있는 무릎 통증을 아주 간단하게 사라지게 한다.

사람의 마음의 움직임을 볼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경험을 통해서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몸살림운동에서 제일 첫 번째로 내세우는 슬로건 "가슴을 펴면 마음이 열린다"를 검토해 보자. 가슴을 웅크리면 오장육부가 눌리고 밑으로 처지면서 가슴만 답답한 게 아니라 속도 답답해진다. 신장이 처져 방광을 누르면 신장이 기능을 발휘하지 못해 불순물을 걸러내지 못하니 맥이 빠져 기운을 차리지 못하고, 방광 역시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해 소변에 문제가 생긴다. 또 가슴을 웅크리면 등이 굽게 되는데, 등이 굽으면 오장육부로 연결되는 신경이 약해져 역시 오장육부의 기능이 많이 떨어진다. 또한 뇌로 연결되는 신경이 약해지면서 몸이 긴장한다.

이런 사람은 몸이 좋지 않으니 마음이 예민해지면서 보통 사람보다 더 세상에 대해 짜증을 낸다. 우리는 병자가 짜증을 많이 내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마찬가지로 특별히 밖으로 드러나는 병은 없을지라도 몸이 좋지 않은 상태에 있는 사람도 역시 쉽게 짜증을 낸다. 이런 사람은 선천적으로 성질이 못된 사람이라고 오해하기 쉬운데, 대개는 그런 것이 아니다. 이런 사람도 몸을 펴게 되면 짜증이 많이 줄어들게 된다.

가슴을 펴면 오장육부가 제 기능을 발휘하면서 기운이 나고 몸이 상쾌해진다. 몸 상태가 좋아지면 예민해져 있던 신경이 가라앉으면서 마음에도 여유가 생긴다. 마음에 여유가 생기면 여유를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고 또 사람들에게도 여유를 가지고 대하게 된다. 긴장을 풀고 마음을 열고 대하게 되는 것이다. 급한 것 없이 느긋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마음이라는 것도 대개는 우리의 경험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다. 마음은 마음 자체로도 움직이지만 몸의 상태, 즉 몸의 좋고 나쁨이나 욕구에 따라 좌우되는 측면도 크다. 자기 마음이 일어나고 자는 것을 잘 관찰해 보면, 즉 마음을 경험해 보면 자기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다.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게 되면, 몸을 알면 스스로 건강해질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마음의 건강도 찾을 수 있다.

***몸을 떠난 마음은 없다**

그런데 정말로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한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도대체 한 길 사람의 속은 알 수가 없다고 한다. 마음공부를 한다고 하는 사람도 도통 자기 마음을 모르겠다고 한다. 제일 어려운 것이 마음이라고 한다. 도대체 마음이라는 게 어떤 것인데, 그렇게 알 수 없는 것이라고 하는 것일까?

사전적인 정의를 보면 몸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딸린 모든 것을 말하고, 그리고 마음은 사람의 몸에 깃들어 있으면서 지식, 감정, 의지 등의 정신활동을 하는 것 또는 그 바탕이 되는 것을 말한다. 분명히 마음은 우리 몸에 깃들어 있다. 도술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면 상식적인 선에서 마음은 몸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

몸이 변하면서 마음도 변한다. 태어나서 나이가 들면서 몸이 성장하고 지각이 생겨난다. 사춘기가 되면 예전에는 관심이 없었던 이성(異性)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갖게 된다. 성인이 돼서 자기가 다니던 초등학교에 가 보면 예전에는 그렇게도 커 보이던 학교가 이제는 조그마한 장소로 변해 있다. 콘크리트 장벽에 갇혀서 살다가 넓은 바다나 높은 산으로 가면 가슴이 시원해진다. 힘이 들면 쉬고 싶고, 재미있으면 더 하고 싶어진다. 무언가 부족한 것이 있으면 알아서 몸이 특정한 음식을 먹고 싶어한다. 노인이 돼서 병에 걸리면 그렇게 의욕적으로 하던 일에 대해서도 시들해진다. 마음이란 이렇게 몸의 변화에 따라서 변하게 마련이다.

이와 반대가 되는 측면도 얼마든지 있다. 아무리 힘이 들어도 가족을 위해 일을 하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다. 민족의 광복을 위해 목숨을 내걸고 투쟁하는 독립운동가들이 있다. 투옥과 고문의 경험에 몸을 떨면서도 자신의 신념에 따라 사회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고행을 하면서도 신에게 다가가거나 깨달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기 가족이 아니라 남을 위해서 묵묵히 자원 봉사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렇게 몸이 싫어할 만한 일을 마음이 나서서 하려고 한다. 몸의 요구에 따르지 않고 이를 극복한 사람들은 사회에서 존경을 받는다.

그러나 어쨌든 이러한 경우에도 마음은 몸을 떠나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자기 몸이 불이익을 받거나 잘못되는 것을 감수하고도 그런 일을 하는 것일 뿐이다. 의지가 강한 사람은 자기 몸을 잘 통제하고, 약한 사람은 그렇게 하지 못하는 차이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의 마음은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혹시 몸의 형성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다음번에는 이와 관련해서 마음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욕구(혹은 욕망)의 형성과정을 알아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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