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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강을 건너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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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강을 건너면"

김민웅의 세상읽기 〈218〉

최근에 발간된 김용준 고려대 명예교수의 〈내가 본 함석헌〉을 읽어 내려가면서 생전에 뵈었던 함석헌 선생님의 모습이 깊이깊이 떠올랐습니다.

그러다가 이전에는 한번도 보지 못했던 함석헌 선생님의 젊은 시절 오산중학 교사 때의 사진이 실려 있어 그야말로 뚫어지라고 보았습니다. 맑은 눈에 총명하고 준수하게 생긴 청년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도인 같은 풍모의 노년의 함 선생님 얼굴에만 익숙했고, 그나마 젊은 때의 모습이라고는 50대를 넘은 장년의 사진만 본 적이 있었을 뿐이라 무척 신기하고 흥미로웠습니다. 사실 함석헌 선생님의 얼굴은 그 이전에도 없고, 오늘날에는 더더욱 없는 그런 유형에 속한 얼굴이었습니다.

젊은 시절의 모습은 당대로서는 더 이상 바랄 수 없으리만치 근대적이었고, 노년의 모습은 기품이 그득한 고대 선사의 형상이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평가는 매우 주관적일 수 있는 것이지만, 청년의 시절에는 첨단의 시대를 살고 나이가 들수록 인류적 시간의 깊이 속에서 살아 온 이가 도달한 경지가 그 표정 속에 깃들어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그건 그러나 그냥 이루어진 얼굴은 결코 아닙니다. 오랜 세월, 이 땅의 눈물을 알고 슬픔을 겪고 그 좌절의 자리에서 그저 머무르지 않고 하늘과 세월 속에 익혀진 지혜를 구해내기 위해 갖은 시련을 이겨낸 이의 평화가 만들어 낸 작품입니다.

〈내가 본 함석헌〉을 쓴 김용준 교수는 평생에 걸쳐 함석헌 선생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살아 오셨다는데,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인 일기인 1956년 12월 2일에는 〈맹자〉 고자(告子) 편의 글 하나가 기록되어 있음을 어느 날 문득 발견하였다고 합니다.

이 문장은 그가 함 선생님으로부터 수없이 들은 낯익은 글귀입니다. 그건 다음과 같은 뜻을 가진 문장이었습니다.

"하늘이 장차 큰일을 어떤 사람에게 맡기려 할 때에는 반드시 그 마음을 괴롭히며 그 근골을 지치게 하며, 그 육체를 굶주리게 하며 그 생활을 곤궁하게 해서 행하는 일이 뜻과 같지 않게 하나니 이것은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 그 성질을 참게 함으로써 일찍이 할 수 없었던 일을 더욱 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天將降大任於是人也 必先苦其心志 勞其筋骨 餓其體盧 空乏其身 行不亂其所爲 所以動心忍性 曾益其所不能)

고된 역사를 살아 온 우리 겨레, 그 '씨'백성 속에서 의연히 자라나고 있는 힘을 눈여겨 본 이가 맹자의 글을 통해 위로와 격려, 그리고 의지를 다진 것이었습니다.

길이 막혀 더 이상 나가지 못하고, 산이 높아 건너지 못하며, 대하가 가로질러 어쩌지 못하고 있는 처지에서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이로써 그 안에 생각과 뜻이 깊어지면서 도리어 더욱 큰 힘이 솟아나는 과정이 될 것임을 그는 일깨웠던 것입니다.

일제시대와 해방의 격동기, 그리고 전쟁과 그 뒤 정치적 미숙기의 어지러움이 거쳐 간 우리시대의 역사 속에서 고난의 여정은 사실 끊어진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황폐해져갔고 마음은 그와 닮아 폐허가 되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때에도 생각과 뜻의 끈을 결코 놓치지 않고 "빈들에 외치는 거침없는 소리"가 되어 한 시대의 스승이 된 함석헌 선생님 같은 이가 계셔서 세상은 그만한 크기의 의미를 가질 수가 있었습니다.

과거와는 사뭇 달라져가는 세상이지만, 그렇다고 고뇌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저 자꾸 가벼워지기만을 바라고 있으니 그 안에 채워질 것이 없어지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됩니다. 함석헌 선생님의 얼굴을 새삼 응시하면서,

나다니엘 호돈의 〈큰 바위 얼굴〉에서처럼 큰 바위 얼굴이 기다려집니다. 인류적 깊이를 가진 소리와 얼굴의 존재를 말이지요. 그러다가 그것이 소설에서처럼 바로 다름 아닌 자신이 되는 감사가 있다면 더욱 기쁜 일일 것입니다.

고난의 강을 건너는 것은 불운이 아니라, 새로운 힘을 가진 존재로 탄생하는 여정입니다.

*이 글은 〈프레시안〉의 편집위원인 김민웅 박사가 교육방송 EBS 라디오에서 진행하는 '김민웅의 월드센타'(오후 4-6시/FM 104.5, www.ebs.co.kr)의 5분 칼럼을 프레시안에 동시에 연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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