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간에 걸친 1기 한-일 역사공동연구위원회가 1일 고대, 중세, 근현대사 19개 주제와 관련한 최종 결과보고서를 발표하고 공식 종료됐으나 양측간 역사인식의 간극은 쉽게 좁혀질 수 없음을 재확인해 줬다.
일본 학자들은 "한국의 항일 민족운동이 그렇게 활발했다면 왜 스스로 독립하지 못했냐"며 한국 내셔널리즘을 문제삼는 동시에, 일본의 식민정책으로 한국에 근대적 측면이 나타났다는 점을 강조하는 등 우리와는 뚜렷한 시각차를 드러냈다.
***한-일역사위 연구 최종 보고서. 日, 한국항일운동관련 내셔널리즘 문제 주장 **
2002년 3월 발족됐던 1기 한-일 역사공동연구위원회는 지난달 31일로 공동연구를 공식 종료하고 1일 0시를 기해 외교부와 교육부 등 유관기관 홈페이지에 2천여쪽에 달하는 최종 보고서 전체 내용을 공개했다.
한국측 26편, 일본측 29편 등 총 55편의 논문을 담고 있는 보고서는 주제별로 양국 연구자가 각각 작성한 논문을 병행 게재함으로써 역사인식의 차이점과 공통점을 파악할 수 있도록 했으나 공통점 보다는 차이점이 훨씬 두드러졌다. 특히 총 13개의 주제로 이뤄진 제3분과 근현대사 시기 부분에서 시각차는 현저했다.
위원회의 한국측 총간사 역을 맡았던 조광 고려대 한국사학과 교수는 “우리는 일본과는 달리 식민지 지배의 부당성을 가장 강력하게 전제로 삼고 논리를 전개했으나 일본은 식민지 지배를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고 이를 기반으로 과거사를 해석했다”고 총평하며 “합의보다는 차이점이 무엇인지가 더 많이 드러났다”고 말했다.
일본 학자들은 그 가운데서도 한국의 항일 민족운동에 관해 한국의 내셔널리즘이 국가-국민의식의 희박, 리더십의 결여 등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고 평가하면서 그토록 운동이 활발했으면 왜 스스로 독립하지 못했느냐고 주장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한국의 독립운동과 민족적 역량을 무시 내지는 낮게 평가하려는 일본의 의도를 보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이에 대해 한국측은 항일 민족운동이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전개됐음을 실증적으로 정리하는 데 주력했다.
***日, "식민정책으로 과학적 경영, 백화점, 신여성 등 근대성 나타나"**
일제 식민지배와 근대성 문제와 관련해서도 일측은 일본의 식민정책으로 한국에 과학적 경영 기법과 대규모 백화점의 출현, 신여성 등 근대적 측면(근대성)이 나타났다는 점을 강조했으나 한국측은 일본 역사교과서에서도 강조하는 식민지배 미화론의 근거가 될 수 있다는 우려 속에 “근대성이 보이긴 하나, 이는 일제의 수탈적 식민지배의 다른 측면이므로 수탈적 구조를 명확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광 교수에 따르면 일본측은 식민지 지배 당시 경제개발과 관련 경부선 등 철도 도로를 건설한 것을 대표적인 사례로 제시했으나 우리측은 이에 대해 개발비용은 압록강 지역 벌채권을 통해 얻은 것이고 철도 운영 체계에서도 조선인이 대부분인 여객 운임은 고액으로 책정하고 일본 제국주의 물품이 대다수인 화물운임은 매우 저렴하게 책정하는 등 한국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일본 지배자의 이익을 위한 것임을 강조했다.
일본의 한 연구자는 아울러 서울에 있던 미스코시 백화점을 예로 들며 매출액이 올라가고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활용했다는 통계자료를 이용해 서울의 경제생활이 향상됐다는 연구결과를 내기도 했다. 우리측은 그러나 식민지 시대 백화점의 이용 계층은 일본 이주자이거나 일본에 가까운 사람들만이 이용할 수 있으며 이러한 일부 사례만 가지고 전반적인 식민지 경제생활에 근대화됐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주장했다.
조 교수는 이에 대해 “오늘날 당시 각종 통계수치를 인용해 식민지 개발론 주장이 나오나 이런 주장에는 허구가 많다”면서 “가장 큰 문제는 식민지 지배가 없었다면 한국은 제로베이스에서 발전을 하지 못했다는 가정이며 식민지 백성의 한과 눈물은 통계로 잡히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日 , “전시강제동원에서도 한국 저항 별로 없었다” **
일본 학자들은 아울러 전근대 동아시아 국제질서에 대한 이해 부분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일본 극우 후소샤 교과서 서술에서 보이는 문제점과 비슷한 시각을 보이기도 했다. 일본 학자들은 청국과 조선의 관계를 종속(조공)관계로 파악하고 이런 종속관계가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무너지고 근대적인 국제질서가 형성됐다고 봤다. 한국은 그러나 이러한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근대화 주장은 일본의 침략행위를 숨기려는 것으로 파악하고 조공체제는 의례적인 것이며 조선은 자주적인 나라였음을 강조했다.
일본 학자들은 일제의 전시 강제동원부분에서도 한국인들의 저항이 별로 없었다고 주장하면서 “총독부의 인적 동원은 원활했다”고 주장했다. 을사조약 및 병합조약의 유무효 문제에서도 일본은 “조약은 국제법적으로 합법적으로 이뤄졌으므로 유효하고 열강이 이를 인정해 줬다”는 논리를 폈다.
반면 한국 학자들은 일본이 한국인을 황국신민으로 만들기 위해 어떻게 한국 민중을 통제하고 억압했는지를 실증적으로 밝히며 “일제 말기 조직적인 저항에 활발하지 못한 것은 전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폭압통치 때문이었음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조약 문제에 대해서도 한국은 “합법 논리는 제국주의 침략을 은폐하는 논리”라는 입장에 따라 “비준, 문서 형식 등에 문제가 있고 강제적, 불법적으로 이뤄진 것이므로 무효”라고 주장했다.
이밖에 1965년 한일협정에 대해서는 일측은 이를 통해 식민지 지배와 관련한 일본 정부의 배상-보상 의무가 소멸했음을 주장했고 우리측은 당시 일본이 청구권 자체를 인정치 않았고 위안부 등의 강제동원 사실이 논의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협정이므로 여전히 배상-보상 의무가 일본정부에 있음을 강조했다.
북-일 관계에서는 일측은 북일수교가 이뤄지지 않은 이유는 납치, 핵문제 등 북한이 야기한 문제 때문이라고 주장한 반면 한국은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 일본이 북한을 적으로 돌리고 우경화, 군사대국화를 추구하고 있으며 과거사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과 배상없이 수교문제를 해결하려는 소극성에도 책임이 있음을 지적했다.
***고대-중세사 부분 임나일본부설 불인정엔 의견 같이해 **
위원회는 중세사 연구 분과에서는 왜구 문제와 통신사, 임진왜란 등 세 주제를 놓고 보고서를 작성했으며 고대사에서는 4,5,6세기 한일관계로 임나일본부설과 광개토대왕 비문, 가야를 둘러싼 삼국과 왜 관계 등을 다뤘다.
양측은 특히 임나일본부설과 관련해 최소한 그 학설이 거의 인정되지 않는다는 점에는 의견을 같이하는 수확을 거두면서도 일측은 광개토대왕 비문 등을 통해 볼 때 4세기 당시 한반도 남쪽에서는 왜인의 활동이 강성했으며 인정할 수 있지 않느냐는 태도를 보였다.
***日 역사교과서 편찬에 아무 영향 주지 못한 한계, 독도 문제 등 주제서 배제돼**
한편 1기 위원회는 구체적인 합일점을 찾지 못했고 실질적으로 일본 역사교과서 편찬에 아무 영향을 주지 못해 아쉬움과 뚜렷한 한계를 보여줬다.
우리측은 아울러 독도 문제 등 영토문제와 위안부 등 민감한 문제까지도 공동연구주제로 삼자고 일측에 제의했지만 일측의 난색으로 공동주제에서 탈락한 점도 아쉬운 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특히 근현대사 부분에서 우리측이 요구했던 공동 주제는 최종 13개보다도 최소 몇 배 이상 많았고 세부적이고 구체적인 문제들이 많았으나 결국 큰 문제들로 뭉뚱그려졌다.
박준우 외교부 아태국장은 이와 관련 “양국간 역사인식 차이와 공통점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는 것을 의의로 꼽으면서도 “공동연구결과가 역사교과서에 반영돼 자라나는 세대에게 올바른 역사인식을 가르치는 데로 이어지지 못했다”고 한계를 평가했다.
그는 이에 따라 “2기 위원회는 반드시 교과서 연계를 토대로 연구를 진행해야 하며 그래야만 양국 역사인식 차이를 극복해서 올바른 인식을 가르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한-일 양국은 현재 2기 위원회 구성 문제를 협의 중으로 6월 20일로 예정돼 있는 한일 정상회담에서 공식 출범 발표를 추진 중이다.
***역사교과서 문제와 합의점 넓히는 책임, 2기 위원회 몫으로 넘어가**
조광 교수는 역사교과서 문제를 직접 다루지 않은 이유에 대해 “역사문제해결을 위해서는 교과서 표현이라는 마지막 문제보다 원초적으로 역사인식을 어떻게 다루느냐, 공통점과 차이점을 다루도록 제한돼 있었다”면서 “이같은 방식은 독-프 등 다른 나라에서도 취한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아울러 “역사교과서 편찬 과정이 한-일간에 달라 역사교과서 문제를 직접 다루지 않았다”고 밝혔다. 즉 한국은 국정교과서 제도라 비교적 수정이 쉬우나 일본은 검인정 제도라 반영 방법에 차이가 있어 일본 정부가 처음부터 난색을 표했다는 것이다.
그는 또 “차이점과 공통점을 밝힌다는 것은 역사인식에 합일점을 구한다는 것이 아니며 합일점을 찾는 것은 1기에서는 보류됐었다”면서 “역사교과서 문제를 직접 다루고 합의점을 넓히는 것은 2기 위원회 책임”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이번 위원회 의의로 “이번 보고서에 수록된 논문은 한일 양국 언어로 번역돼 널리 배포하게 돼 우리 실상을 모르던 일본측 연구자들이 우리 주장을 쉽게 파악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됐다”고 덧붙였다.
양측은 이러한 연구 성과를 정부, 관련기관, 국회, 대학, 도서관, 교과서 작성자 등에 널리 배포, 홍보해 역사교과서 편수 과정에 참고토록 노력할 방침이다. 한국측 위원회는 아울러 일본측과 별도로 한-일 관계사중 1백3개의 세부주제를 자체 선정해 97명의 우리 연구진과 함께 10권에 달하는 <한일관계연구논집>을 발간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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