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한반도 유사시를 대비해 비축해 두는 전쟁예비물자(WRSA-K) 계획을 2006년말까지 폐지하겠다고 우리 정부에 지난해 5월 통보했던 사실을 주한미군측이 뒤늦게 공개하고 나서 그 배경에 비상한 관심이 쏠리고 있다.
***美, 전쟁예비물자계획 폐지 지난해 5월 통보**
주한미군은 8일 오후“몇 년간의 협의를 거쳐 지난 2004년 5월 20일 폴 울포위츠 당시 미 국방부장관(현 세계은행 총재)은 조영길 당시 대한민국 국방부 장관에게 전쟁예비물자계획의 종료를 서면으로 이미 알린 바 있다”고 밝혔다.
주한미군은 “이 문서에는 해당 계획의 폐지에 따른 손실을 조정할 수 있도록 2년 6개월의 기간이 제공된다고 명시돼 있다”고 말해, 2006년 12월이후 한국에서 전쟁예비물자를 전면 철수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울포위츠 당시 부장관은 서한에서 “전쟁예비물자계획과 (이외 한국에 필요한 전시물자인) 긴급소요부족품 목록(CRDL) 이행은 과거 한반도 평화와 안정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지금은) 당초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있다”고 철수 이유를 밝혔다.
전쟁예비물자란 한반도에서 전면전이 발발하는 등 비상시를 대비해 미국이 비축해 둔 전시물자로, 한-미 양국군이 공동 사용하게 된다. 이 전시물자의 90% 이상은 각종 탄약으로, 포탄에서 미사일까지 2백80종에 58만톤에 이른다. 그 양은 한반도 전쟁 발발시 초기 30일 이내에 필요한 탄약 필수 소요분의 60%라는 분석도 있으며 자본가치로는 5조원에 이르는 규모다.
***美 “전쟁예비물자 판매 제안 한 적 없어”**
주한미군은 이같은 서한을 공개하며 전쟁예비물자계획 폐지 배경으로 “미국 정부가 전쟁예비물자를 영구적인 계획으로 하려는 의도가 없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하다”면서 “세계 11위 경제 대국인 한국의 상황을 고려할 때 해당 계획은 원래의 계획보다 오랫동안 지속돼 왔으며 이미 몇 년전부터 더 이상 유지하는 것이 불필요하다고 판단돼 왔다”고 주장했다.
주한미군은 또한 “한국 정부에 전쟁예비물자를 팔겠다고 제안한 적도 전쟁예비물자의 잠재적인 판매와 관련된 어떤 협상도 한 적이 없다”면서 “해당 물자의 판매, 폐기, 철수에 관한 사항은 미 의회가 결정해야할 사안”이라고 말해, 국내 일부 언론의 보도를 부인했다.
<조선일보>는 이에 앞서 지난 7일 “미국이 한반도 유사시에 대비해 배치해 놓은 전쟁예비물자 탄약 중 상당량을 우리 정부가 사기로 미국측과 합의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보도하며 이에 1조원 정도가 소요될 것으로 추정했다.
***정부, “협상진행중인 사항이라 공개 안해”**
국방부 관계자는 9일 이와 관련, 당시 서한이 전달됐을 때 이같은 사실을 언론 등에 공개하지 않은 이유와 관련, “당시 미국측은 서한을 하나 보낸 것”이라며 “협상이 진행중이라 밝히기 곤란한 면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아직도 미국측 협상 대상자가 불분명한 상태”라고 덧붙여, 미군의 전쟁예비물자를 사들이기 위한 협상이 아직 진행되지 않고 있음을 시사했다. 요컨대 "현재 이 사안은 미국 의회에 상정돼 계류중인 사안으로 상정 내용이 마무리돼야 구체적인 협상 대상자가 지정되고 이에 따라 우리와도 본격적인 협상이 진행될 것"이라는 게 국방부측 설명이다.
그는 “협상 여하에 따라서는 폐지 시점이 확정된 것은 아니다”고 덧붙여, 폐지 시점이 연장되기를 희망하는 속내를 드러내기도 했다.
이 관계자는 아울러 전쟁예비물자계획 폐지가 우리 국방력 등에 미칠 영향에 대해서는 “정책적인 사항으로 밝힐 수 없다”고 언급을 피했으나, 국방부는 계획이 폐지될 경우의 미칠 영향에 대해 다각적 분석작업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울포위츠 서한직후 정부 '이라크 파병' 결정**
주한미군의 이같은 서한 공개는 최근 북핵문제를 둘러싸고 한-미간 이견 및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삭감에 따른 미국측의 보복적 성격이 짙은 게 아니냐는 관측을 낳고 있다. 한 예로 최근 찰스 켐벨 미 8군 사령관은 6백억원 규모의 방위비 분담금 감축에 강력 반발, 주한미군 고용원 1천명을 감원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보다 근원적으로 울포위츠 서한이 통고된 2004년 5월20일 전후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울포위츠 서한이 오기 사흘전인 2004년 5월17일 노무현대통령과 조지 W.부시 미대통령은 전화통화를 가졌다. 부시대통령의 요청으로 성사된 이날 통화에서 주한미군 1개여단(3천6백명)의 이라크 차출 및 영구감축을 통고하는 동시에, 당시 노대통령이 국내의 거센 반발로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던 한국군의 이라크 추가파병을 요구했다. 당시는 미군의 야만적 이라크포로 학대로 국내는 물론 전세계적으로 파병 반대 및 반미 여론이 들끓던 시점이었다.
이틀뒤인 19일 울포위츠 부장관은 상원 외교위 이라크 정책 청문회에 출석, "우리는 미군의 전 세계적인 구조조정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이미 한반도 비무장지대에 배치된 부대를 후방배치키로 했다"고 주한미군의 평택 이전을 밝혔다. 이어 다음날 20일 울포위츠는 한국에 5조원어치의 전쟁시 비상물자 철수계획을 통고한 것이다.
이같이 전방위로 진행된 압박공세하에 6월 참여정부는 3천8백명의 한국군 이라크파병을 결정했고, 한때 파병반대파가 전체의원의 3분의 2에 달하던 열린우리당이 6월17일 파병에 찬성하기로 당론을 정함으로써 파병이 강행되기에 이르른 것이다.
따라서 전문가들은 울포위츠 서한이 한국군의 이라크 파병을 이끌어내기 위한 압박공세의 일환으로 보내졌다가 한국이 이라크 파병을 결정하자 그동안 비공개로 수면밑에 숨겨뒀다가, 또다시 최근 북핵문제 등을 놓고 한미간 이견이 노정되자 미국이 서한을 공개함으로써 재차 압박 수단으로 사용하려는 게 아니냐는 강한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주한미군의 서한 공개후 벌써 국내 보수진영에서는 참여정부의 대미정책을 강력비판하는 움직임이 가시화하고 있어, 앞으로 이 문제를 둘러싼 뜨거운 논란을 예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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