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압군의 절반이상은 전라도 출신이었다"며 5.18 민주화운동을 왜곡해 파문을 불러일으킨 조갑제 <월간조선> 대표의 최근 홈페이지를 보면, 5.18 왜곡뿐 아니라 <이완용 선생은 역사상 가장 억울한 누명을 썼다>거나 <19일간 지율은 단식현장에 없었다>는 등 어이없는 글들로 도배돼 있다.
일각에서는 조 대표의 계속되는 망언은 언론에서 그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이라며 철저히 묵살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나, 국내최대 부수를 발행하는 조선일보의 계열사 대표라는 직함을 갖고 있는 조갑제의 망언은 단순히 묵살해야 할 차원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 하겠다.
***"이해찬이 당시 총리였어도 이완용처럼 행동했을 것"**
지난 21일 조갑제 홈페이지에는 ID '안티구한말(토론방)'의 이름으로 <이완용선생은 역사상 가장 억울한 누명을 썼다>는 제목의 글이 실려있다.
이 글은 "(구한말) 당시 총리대신 이완용에겐 3가지 선택이있었다. 첫째, 해산된 군대를 다시 재정비하여 일본과 전면전을 펼치는 방법. 그러나 일본은 러시아를 물리친 해전강대국이었다. 두번째, 힘이 없으면 버티는 방법으로 죽기살기를 각오하고 저항. 세번째, 한일합방조약에 서명하고 일본의 보호를 받겠다"며 "그는 결국 세번째를 선택했다. 나는 그시대 시대상황을 보면 이완용이 아니라 지금의 이해찬이 총리를 맡았다 해도 그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이 글은 또 "을사오적의 매국행위에 대해선 비난받아 마땅하다.정서적으로나 객관적으로나 구한말 대한제국의 위정자로써 국력을 키우지 못한 책임이 있다"면서도 "그러나 동시대 인도는 조선보다 많은 인구에 지하자원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세포이 항쟁으로 수십만명이 죽기도 하였으나 영국의 총몇자루 든 점령군에게 총알받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그러나 조선의 을사오적은 한일합방의 조건으로 많은 것을 얻게 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 글은 을사오적이 한일합방을 통해 '얻어온 많은 것'의 구체적 예로 "일본의 예산의 십분의 1을 한반도에 투입하고 일본과 똑같은 교육 똑같은 행정과 제도를 시행하게 했다"면서 "이완용은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근대화를 일본의 열차의 한칸에 얻어타 조선을 개화시키길 원했을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이같은 주장은 일본 극우들 사이에서는 간혹 목격되는 것이나, 국내에서 한글로 이런 식의 글이 쓰여진 것은 해방후 60년간 초유의 사태가 아닌가 싶다.
최근 일본이 '다케시마의 날'을 정하는가 하면 주한일본대사가 서울 한복판에서 "다케시마는 일본땅"이라는 주장을 서슴치 않고, 이완용 등 친일파 후손들이 '조선땅 찾기' 소송을 벌이는 것도 조갑제 홈피의 이런 망언과 무관치 않다 하겠다.
***"여승 지율, 19일간 행방 묘연"**
조갑제 대표는 지율스님 단식이 끝난 직후 '위장단식'론을 펴 불교계 등 각계의 신랄한 비판을 받은 바 있다.
지난 23일 조대표의 홈페이지에는 ID '월간조선 인터넷'의 이름으로 월간조선 인터넷 통신 「더 모닝 퍼스트」(The Morning First) 23일자에 실렸다는 <19일간 지율은 단식 현장에 없었다>는 제목의 글이 실렸다. 불교계의 비판에 대한 우회적 반론인 셈이다.
이 글은 "여승 지율은 하루 혹은 이틀씩 어떤 때는 6일 또는 8일 동안 계속해서 단식 현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음이 <월간조선> 인터넷 통신 취재 결과 확인됐다"며 "단식 현장을 비운 기간은 총 19일"이라고 밝혔다.
이 글은 또 "공개된 장소에서 생명을 담보로 하는 단식이란 극단적 방법을 통해 자기 의사를 관철시키려는 사람이 개인적인 일로 단식 현장을 떠나거나, 1주일 정도 종적을 감추었다가 다시 나타난다면 이를 제대로 된 '단식'으로 볼 수 있을까"라고 의문을 제기하며 1백일 단식이 진행되는 동안 <월간조선>이 '나름대로' 파악한 행적을 공개했다. 이에 따르면 부산시청 앞에서 단식을 하던 10월30일~10월31일, 11월16일, 11월20일~21일, 서울 상경 후 11월30일~12월5일, '잠적'을 한 1월22~1월29일까지 총 19일간 지율스님의 행적은 파악이 안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행방이 묘연했다는 그 기간의 지율스님 행적은 <월간조선>만 모르고 있을뿐, 이미 투명하게 알려진 것이었다.
단식 4, 5일째인 10월30일~31일, 지율스님은 농성장을 찾은 환경단체 관계자들과 함께 1천마리 도롱뇽 수놓기 작업을 같이 했다.
11월16일 저녁에는 지율스님은 부산KBS의 생방송 토론회에 참가했다.
11월20일~21일은 지율스님에게 더 긴박했던 날들이다. 법원이 11월15일 "천성산 관통터널 공사를 계속 진행하면서 환경영향평가를 실시하자"는 조정 권고안을 내놓자, 지율스님과 환경ㆍ사회단체는 한자리에 모여 대책을 숙의한 끝에 11월20일 반대입장을 밝히고 다음날도 후속 방안을 함께 논의했다.
11월30일~12월5일 사이의 지율스님의 행적도 명백하다. <프레시안> 기자와 만나 인터뷰를 한 11월30일 지율스님은 이미 청와대 인근 가르멜 수녀원에 기거하고 있었다. 스님이 경찰을 매개로 한 정부와의 비공식 접촉마저 완전히 끊은 1월22일 이후 1주일간의 행적은 더욱더 명확해, 스님이 경기도 시흥의 한 기도원에서 단식을 진행한 사실이 이미 언론에 공개됐으며, 이 기간중 수행자들이 지율스님의 단식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지율스님은 1백일 동안 한 장소에서 단식만 할 수 없었다. 11월에는 각종 법원 심리와 법원 판결에 따른 대책을 마련하고 각종 관련 회의에 참석해야 했고, 12월~1월에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온갖 공식, 비공식 회의와 만남에 직접 참석해야 했다. 지율스님이 약속된 장소에서 단식에만 몰입할 수 있었던 '유일한' 시간은 정토회관으로 옮긴 마지막 1주일뿐이었다.
이처럼 지율스님의 단식 1백일간의 행방은 너무나 투명하다. 심지어 외부와 일절 연락을 끊은 것으로 알려진 2주간의 기간에도 환경ㆍ사회단체 및 조계종 관계자는 지율스님의 단식 장소를 알고 있었다. 단지 조갑제 대표가 이끄는 <월간조선>만 지율스님이 어디 있는지 몰랐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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