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에 끌려가 1950년 9월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정지용이 미군의 포로로 잡혀 4년간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박창현이라는 가명으로 포로생활을 한 뒤 자진 월북했다는 증언이 발굴됐다.
***정지용, "거제도에서 4년간 포로로 지내다 자진 북한행"**
<월간중앙>은 경향신문 기자 출신으로 필명을 날렸던 김태운이 전후 시사종합월간지 <실화>에 1954년 6월호에 게재됐던 <본지 독점-포로 되었던 시인 정지용, 그의 이북행 비화>를 발굴해 2월호에 전문 게재했다.
김태운의 글에 따르면, 1950년 정지용은 인공 치하에서 '문학가 동맹'의 일원으로 활동하다 인민군의 문화공작대 요원으로 낙동강 전투에 강제 투입됐다 8월 왜관 인근 '트리오트리' 전투에서 인민군이 패퇴하면서 UN군에 생포됐다.
그 뒤 군속 노무자 박창현이라는 가명으로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이송된 정지용은 그곳에서 소제부를 거쳐 취사 반장 생활을 하면서 술과 번민으로 세월을 보내다 1953년 북행이냐 남행이냐의 귀로에서 북쪽을 선택했다. 문학가 동맹 활동, 인민군 문화공작대 활동 등이 남쪽에서 용서를 받을 수 없을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시인 모윤숙이 지용 찾기 위해 포로수용소 뒤지고 다녀"**
특히 김태운은 "시인 모윤숙이 당지 정이용을 찾기 위해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뒤지고 다녔다"며 "그것을 지용이 알았다면 북쪽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정지용이 알려진 것처럼 1950년에 납북돼 사망한 것이 아니라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있었다는 것은 지금까지 풍문처럼만 돌았었다.
<월간중앙>은 "당시 북행을 택한 영문자 포로 명단에 1933년생 강원도 출신 ‘Park Chang Hyun'(포로번호 0098017)이 있다"며 "그가 정지용인지 확인할 길이 없었지만 김태운의 보도로 정지용일 가능성이 커졌다"고 덧붙였다.
한편 김태운의 글이 실렸던 <실화>는 당시 최고의 월간지였던 <신태양>이 펴낸 자매지로 1953년 10우러 창간해 1965년 5월까지 권위있는 시사 주간지로 이름을 날렸다.
다음은 <월간 중앙> 2월호에 실린 김태운의 글 전문.
***포로가 되었던 시인 鄭芝溶 -그의 이북행 秘話- **
***가버린 지용(芝溶)**
먼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절대는
실개천이 휘몰아 나아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으랴.
-<향수>의 일절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든 고향은 아니려뇨.
산 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 고향 지나지 않고
먼 항구(港口)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뫼 끝에 홀로 오르니
흰 점 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소리 아니 나고
메마른 입술이
쓰디쓰다.
-<고향>의 일절
얼마든지 센티멘털하고 서정적인 시를 읊던 정지용(鄭芝溶)은 지금 어느 낯선 하늘 밑에서 저주스러운 목숨을 지탱하고 있을까. 그는 사방 오랑캐 속으로 붉은 곳으로 자취를 감추어버리고 말았다.
영원히 불행한 곳으로 끝내 그는 생리(生理)로는 도무지 살아나갈 수 없는 그런 황막(荒漠)한 터전으로 스스로를 자학(自虐)하며 꺼지고 말았다.
<향수>와 지용. <고향>과 지용. 그리고 <백록담(白鹿潭)>과 지용. 그는 언제 어느 때 어떻게 하여 없어졌는가. 치열하기 이를 데 없는 한국의 동란(動亂)도 어느 결엔가 한숨을 돌리는가 싶더니, 순간 그를 우리 곁에서 잃었다. 아주 괘씸하고 밉던 사람들의 얼굴은 다 남았건만 그는 없다.
때는 신록 우거지는 여름, 한창 무러이근 시절아고 보면 절로 생각키운다.
나는 어느날 저녁 , 그것도 늦저녁 이제 막 밤의 검은 장막이 서울 장안을 덮어씌우려는 직전의 저녁 때 몇 명 친구와 더불어 명동 '모나리자'에서 잡담을 일삼고 있었다.
정치 이야기며 먹고 사는 이야기와 연애 이야기 등 온갖 이야기들을 심심파적(深心破寂)으로 지껄이고 있던 중 어느 사이엔 가 화제는 우리들 주위환경에서 자취를 찾아볼 수 없는, 없되, 생각 키우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미치게 되었다.
"도대체 지용은 어떻게 됐을까..." 누군가가 이런 말문을 열었다.
나 역시 알 턱없는 일이었고 또 몹시도 궁금한 일이었기에 당연히 이 말문에 맞장구를 치며 세상의 무상함을 새삼스럽게 여기고 있는데 불현듯 옆 자리에서
"지용이 어떻게 된 것도 몰라?"
이렇게 의아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한 친구가 대들었다.
전깃불이 들어오지 않아 다방 안은 몹시 어두웠고 그 어두움이 참으로 명동의 명동됨을 호흡시켜도 주는 듯 도시의 정서(情緖)를 넘치도록 안겨주는 시간이었다.
" 모르겠는데."
" 원, 참."
서론(序論)은 당초 필요 없었다. 본론, 결론부터 이야기하라는 것이었다. 밖은 완연한 어둠의 세계였다. 창공에 별이 떠있는지 안 떠있는지 아예 상관치도 않을 초여름 바람이 제쳐놓은 창문 안으로 스며들어오는 밤이었다.
친구는 말하는 것이었다. 손자를 수두룩히 슬하에 안겨놓고 까마 아득한 옛 신화(神話)라도 오손도손 들려주는 할아버지처럼. 그것은 멀리 4년 전으로 소급(遡及)되어 4283년(1950년) 6월 25일로 더듬어 올라가는 것이었다. 이제 앞으로 전개하려는 이야기의 포인트가 여기에 설정되며 이 시간으로 다시 환원(還元)하는 스스로를 발견케 된다.
***자수하는 지용**
진정 평화롭던 이 땅에 6월의 마지막 일요일 날 새벽-. 북녘 민족을 저버린 족속들의 남침(南侵)이 시작된 다음 날인 27일 밤에 이르러선 서울 장안은 철철 끓어 넘치는 도가니처럼 온통 뜨거워지고 우왕좌왕(右往左往)하는 생지옥을 초래(招來) 했으니 세상이 곧 두 쪽으로 날 것 같은 현상을 이루고 있었다.
폭우(暴雨)와 총탄 왕래의 밤이 지난 28일 아침. 서울은 예전의 서울이 아니었고 학살과 인민재판과 욕지거리와 독재의 세상으로 바뀌면서부터 선량한 겨레는 다만 몸서리만 치고 서성거려야 하는 거리로 변하고 말았다.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6·25를 계기로 서울의 주인공이 바뀌어지자 눈치 빠른 사람은 어느 사이엔가 새로 등장한 주인공들에게 아첨과 타협과 보잘 것 없는 넋두리로서 그들에게 붙기 시작하였다. 이곳에 민족의 비운(悲運)이 싹텄고 왜곡(歪曲)된 정의가 정당화하게 되었다.
'문학가동맹(文學家同盟)'
이 간판이 어느 고층 빌딩 문전에 커다랗게 내붙인 것도 바로 이런 시국(時局)이었다.
북쪽에서 내려온 선전공작대(宣傳工作隊). 옥(獄)에서 나왔다는 열성분자(熱誠 分子). 그리고 자유대한의 품에서 안일(安逸)한 생활을 영위하며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서 간사한 웃음이 입 가장자리에 내뿜던 이런 사람. 이들이 서로 모여 '문학가동맹'을 재 건립(?)하기에 이른 것은 7월 초순경이었으며 그 당시는 장안의 시민들 모두가 공포에 사로잡혀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진정 비극적인 하루 하루를 지내던 때였던 것이다.
'의용군(義勇軍)으로 나가자.' '대한민국에 부역(賦役)하던 반동분자를 죽여라.' '인민재판이다.' 등등을 이루 헤아릴 수조차 없는 가지가지의 폭행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여기 또 하나 그들이 입 밖에 안낼 수 없었던 것은 "예전의 남로당(南勞黨)으로서 다시 우리에게 전향(轉向)만 한다면 죄과(罪科)를 용서한다는 것"이었다.
기실(其實) 보련(保聯-보도연맹) 가맹자는 당시 남한 전 지역은 물론 서울만 해도 상당이 많은 수였던 것이다.
이들은 모두가 예전엔 소위 '동무'들 사이였으며 한 노선(路線)을 밟고 있었으나 보련계는 붉은주의에 대해 스스로의 신랄(辛辣)한 비판을 가함으로써 자기가 행위해야 할 세계관의 확립을 이룩하고 주의를 달리하여 '민주'의 품안을 찾은 것이오, 또 하나는 북으로 갔던 부류(部類)였던 것으로 이들이야말로 변천 무쌍(變遷無雙)한 노정(路程)을 밟아오는 처지였다.
그러면서도 서로의 상극(相剋)하는 이념은 어쩔 도리 없이 북쪽 부류는 보련계를 개나 돼지 모양으로 보지 않으면 하나의 죄수로써 누명을 씌우고 굉장한 학대를 한 것은 두말 할 나위도 없는 것이다. 처절한 암투(暗鬪). 혹심한 냉대(冷待). 학살.
'보련계'는 고양이 앞의 쥐였고 북쪽의 패는 원숭이에게 날개마저 붙여준 격의 동물이었다. 간단없이 '보련계'는 붙들려 매맞고 고문당하고 의용군으로 밀려나가고...흉흉한 인생이었다.
이럴 때 정지용도 역시 갖가지로 고민에 고민, 자기 자신의 정신을 잃어버리고 당황한 것은 물론이다. 그는 누가 뭐라거나 하나의 '시인' 내지는 '지성인'이었다. 그는 죽기를 한사코 북녘으로 가지 않은 사람이었다.
상허(尙虛)가 가고 누가 갔고 또 누가 가고 했어도 그는 서울에서 살았다. 심지어는 '상허'에게 "대한민국으로 돌아 오라"는 편지까지 써서 전파(電波)를 편리 삼아 평양까지 보낸 일까지 있었다. <1948년 예술제(藝術祭) 당시, 한국문화연구소(韓國文化硏究所) 주임의 직함으로>
이러고 보면 지용의 고민은 더한층 컸고 도저히 견뎌낼 수 없는 딜레마에 빠져 허덕이고 있었음은 넉넉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 가운데 이리저리 피신을 일삼다가 신분이 탄로되어 자수(自首)의 형식으로 전기(前記)한 '문학가동맹'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극적인 장면이었다.
그의 수십 년 후배들이 장(長) 짜리 감투를 쓰고 호령하는 분위기에 들어간 지용은 고개 숙여 얼굴빛이 상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기도 하였다. 그는 자수를 했다. '문학가동맹'에 나갔다. 지용은 또 하나의 전향을 했던 것이다.
***문학공작 대원으로**
당시는 이미 소위 인민공화국의 세력이란 지리파면 상태에 놓여있었던 순간이었다.
유엔군 측의 사력(死力)을 기울인 부산의 교두보작전(橋頭堡作戰)이 감행되자 인적 자원이 무진장으로 필요하게 된 '인공(人共)'은 길거리에서 의용군을 붙든다. 가택수색(家宅搜索)을 한다. 벼라 별 비인도적 만행(蠻行)을 저질으며 청년들을 전선으로 보냈고 그러고도 부족하여 소년과 노인을 불문(不問)하고 징병(徵兵)을 실시하게 되었던 것이다. '공화국 총동원령'이 그것이었다.
이러한 시국이었음에 '문예총' 산하의 각 단체에서는 솔선수범이라는 미명(美名)을 내걸고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용약(勇躍) '전선으로!' 나서지않을 수 없게 되었다. 회의를 연다는 구실(口實) 밑에 맹원(盟員)들을 동원시키고 그 자리에서 '의용군으로 지원하자!'는 한 분자의 계획된 발언으로 그 자리에 모였던 사람들이 그 날로 남쪽으로 내려가거나 북쪽으로 올라가거나 하여 그들의 단말마적(斷末魔的)인 행동이 자행되었던 것이다.
이때에 '문학가동맹'에서도 '의용군 잡기'가 실행되었으며 그곳에서는 허울 좋은 '문화공작대'라는 것이 편성되었다.
'문화공작대'- 이와 같은 미명 아래 가장 적합하게 동원시킬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는 재남파(在南派)와 '보련계'에 속하는 그들의 말을 비추어 이들이 회색분자들이었음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문화공작대'의 편성과 출전은 드디어 실행되었다.
제1진으로써 박 모(朴某) 외 몇 명이 남쪽을 향해 떠났고 그 얼마 후 제2진, 제3진이 속속 정든 서울을 떠나 이제까지 친구요 벗이었던 사람들을 적대행위하기 위하여 남쪽으로 내려가는 것이었다. 하늘도 울고 땅도 목놓아 우는 시간에 그들은 하루살이 같은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낯선 땅으로 내려가는 것이다.
7월 중순-. 더위가 심장 속까지 스며들어 입으로 내뿜는 숨이 그대로 열풍(熱風)이 되어 새어나오는 것 같은 더위가 지속되는 붉은 치하(治下)의 서울이었다. 인심은 흉흉하고 자유를 희구(希求)하는 겨레들이 남쪽 하늘만 우러러보며 기쁜 사자(使者)가 날아오기만 고대하는 한 나절이었다.
남대문로(南大門路)에 있는 '문학가동맹' 사무실은 최후의 명령을 접하고 어제까지 의기양양(意氣揚揚)하게 뻐기든 북녘파의 표정에서 그 어떤 걷잡을 수 없는 주름살이 보이며 마지막 '문화공작대'파견의 구체안을 세우는 것으로 어수선했다. 정지용, 누구누구. 명령은 내려졌다.마지막까지 그래도 버티던 부류의 문학인들이 드디어 출동하는 비운(悲運)의 날이었다. 눈물마저 아예 말라버린 면면(面面)의 표정. 올 것이 기어이 오고야 만 것이다.
" 동무들! 동무들의 사명은 중대하오. 지금 우리 공화국은 승리를 거두는 지경에서 마지막 선에 이르렀소. 총 단결하여 이겨야만 하오. 이기는 데는 동무들의 사명이 크다 아니할 수 없소. 문화공작은 곧 정신무장으로써 싸우는 것이오." 장엄한 일장의 연설이 있고 난 후에 인생의 마지막 표정에서 볼 수 있는 야릇한 눈동자들을 하고 붉은 시인, 소설가, 음악가들은 죽음의 공작대 행렬에 참가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한 몫 끼어있는 시인 정지용- 염소수염을 처량하게 쓰다듬으며 지용은 말이 없었다. " 귀신도 쓸쓸하여 살지 않는 한 모퉁이. 도깨비들이 낮에도 혼자 무서워 파랗게 질린다.
가재도 기어가지 않는 백록담 푸른 물에 하늘이 돈다. 불구(不具)에 가깝도록 고단한 나의 다리를 돌아 소가 갔다. 쫓겨온 실구름 일말(一抹)에도 백록담은 흐리운다. 나의 얼굴에 한나절 포긴 백록담은 쓸쓸하다. 나는 깨다 졸다 기도(祈禱)조차 잊었더니라." -'백록담'의 일절-
오랜 옛날에 읊었던 시의 한 구절을 가슴 서럽도록 뇌까리고나 있었을까.
***낙동강의 선물**
사람도 하나 없이 그는 떠났다. 밤을 틈타서 떠났다. 달 그림자를 애무(愛撫)하며 걸었다. 걸으면서도 못내 서울을 그리며 눈물이 젖었다. 시나 술이나 담소(談笑)등은 당초(當初) 문제 밖의 물체(物體)로 흠모(欽慕) 하며 걸었다. 걷다가 날이 새면 초가(草家)에 들어 고단한 다리를 쉬면서 홀로 눈물 젖었다. 깨어진 도읍(都邑)에 들어서선 한바탕 연설이나 시 낭독으로서 선량(善良)한 백성을 현혹(眩惑)하곤 또 걷고 걸었다.
끝없는 죽음의 행군인양...집이 타고 사람이 죽고 알뜰하던 세간사리가 몽땅 쓰러진 폐허의 마을을 보며 걸었다. 걸으면서 워낙 감상적인 그는 그 얼마나 가슴 저리며 애탔는지. 포성이 귀의 고막(鼓膜)을 찢고 피비린내 콧구멍을 틀어막는 격전지(激戰地) 낙동강 전선에 이르렀을 땐 이미 8월도 한창. 수수며 감자 벼랑이 천진스럽게 결실(結實)을 맺고 있는 무렵. 낙동강 전선은 피와 피의 도가니 속이었다.
밀리고 쫓기고 말 없는 낙동강은 그대로 피의 강물이었다. 1만, 2만, 3만, 4만...인민군은 자꾸자꾸 투입(投入) 되었고 투입되는 대로 고스란히 포탄(砲彈)의 밥이 되어버리는 전투-. 치열한 낙동강 전선에 당도하였을 때엔 기진맥진한 사병들에 의해 초목이 처참하게 짓눌리고 있을 때이었음에 '문화공작대' 아니라 전지전능(全知全能)한 조물주(造物主)가 출현하였던들 하상(遐 想) 아무 소용없을 전선 풍경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누가 무엇이라 하건 그들은 하라는 대로만 하면 그만이었다. 명령은 '문화공작'을 하려는 것이었으니까. 먹을 것을 먹지 못하고 입을 것을 입지 못하며 기아(飢餓)와 헐벗음과 수면(睡眠) 부족과 상처에 시달리는 사병들을 일깨워 달빛을 '스포트 라이트' 삼아 아름답지 못한 노래와 연설과 시 낭독으로써 소위 '문화공작'이라는 것이 이루어졌으니 서로가 진정 따분한 노릇이 아니고 무엇이었겠는가.
전황(戰況)은 치명적인 형세였다. 언제 어느 때 전멸할지도 모르는 전세(戰勢)에 누구 하나 호탕(浩蕩)한 웃음을 짓는 자 없었고 죽는 날이 내일이냐 아니면 오늘이냐 하는 운명은 정녕 짓궂기도 한 밤이 연속되는 나날이었다. 지용이 이곳으로 온지 벌써 수 삼일을 헤아리는 어느 비 오는 날 밤. 속칭(俗稱) '트리 오 트리'고지(高地)의 일곱 번째 공격명령이 ××군부대 전역에 걸쳐 내려졌다.
비는 억수로 쏟아졌고 촌토(寸土)를 분간할 수 없는 찰라. 번개 불만 계속 번쩍이는 밤이 깊어서였다. 쌍방의 쟁탈전이 치열하였던 왜관(倭館) 근교(近郊)의 '트리 오 트리' 고지의 일곱 번 째의 공격명령이었다. 끊임없이 비가 내리고 질퍽질퍽한 진 땅을 밟으며 전투는 개시되었다.
" 꽝- 꽝- " " 따따따따따....." "탕- 탕- 탕- -탕 " " 딱쿵 따악쿵- " " 슛 꽝- " " 뾰르르....뾰르르....쾅! "
대포·기관총·소총·박격포, 온갖 무기가 저마다의 기능(?)을 발휘하며 온 세상이 무기의 시험장인 듯 싶은 전투가 시작되었다. 모래가마니로 쌓아올린 물 다리 위로 도하작전(渡河作戰)이 감행되고 고지를 향해 보일보(步一步), 각일각(刻一刻)...대전부대는 우리의 전통을 자랑하는 제1기갑사단 제5연대. 이번이 '트리 오 트리'고지 점령 전투로 꼬박 일곱 번째. 수류탄이 던져지고 총알의 불길이 아로새기는 요술을 부리는 비 내리는 한 밤.
얼마간 전투가 계속되었는지 고지 중턱까지 올라갔던 인민군들은 어느순간 지리파멸(支離破滅)이 되었다. 일사천리 후퇴를 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전세는 결정적이었다. 총총히 생존 사병을 후방에 집결시키지 않으면 부대 전체가 전멸을 불면케 되는 시간이었다. 시신(屍身)을 넘고 넘어 왔던 길을 되돌아 도망치지 않으면 죽어 버리는 판국의 전세였을 때 그곳은 일대 수라장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쫓고 쫓기우고...밤이 깊어 어디를 어떻게 다다랐는지 시인 정지용은 어느 깨어지다가 만 담벼락만 남은 초가집 외양간에서 벌벌 떨고 있었다. 동천(東天)에 여명(黎明)이 깃들고 밤이 진한 안개 속이나마 훤히 밝아왔을 즈음 그곳에 몇몇 인민군 사병들과 함께 웅크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며 어젯밤의 전투를 아련하게 회상하는 지용-.
얼마 후 그는 유엔군에 의하여 포로의 운명이 되었다. 그곳은 유엔군 막사(幕舍)의 진지(陣地)였던 것이다. '손들어'와 '무장해지' 등의 제반 절차가 끝난 다음 그는 함께 있던 인민군들과 연대 OP의 G-2에 끌려가 포로 심사 반 의자 위에 앉게 되었던 것이다.
눈 깜짝할 사이였다. 너무나 변천 무쌍한 스스로의 운명을 생각하며 가슴 적이 서늘했으리라. 동료들의 행방은 물론 알 턱이 없다. 어떻게 되어 이와 같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무의식중이나마 의식적으로 계획하여 스스로 이 길을 택하였는지도?
"이름은?" "..." "이름은?" "박창현(朴昌鉉)이올시다." "나이는?" "4236년 생..." "계급은?" "없습니다." "없다니." "저...저 노무자올시다." "노무자라니? " "아, 저- 인민군대에게 징용되어 붙들려 나왔다가 그만..." " ? " "..." "적의 동향에 대해서 아는 게 있으면 말하시오." "군속(軍屬)이 뭘 압니까. 모르겠습니다 "
보아하니 나이는 들었고 이상야릇한 수염까지 있고 보니 딴은 정규군은 아닐 상 싶어 그래서인지 포로 심사 반들도 더 이상의 심사할 흥미가 없었던지 그대로 후방 사단 CP로 넘겼다. 그는 본명을 밝히지 않고 가명(假名)을 썼던 것이다.
"박창현" 어제의 시인이며 떳떳한 정지용이며 문화공작대원이었던 정지용은 오늘에 이르러 포로요 군속(노무자)이오 '박창현'이 되어 있었다. 낙동강이 그에게 준 선물. '트리 오 트리' 전투가 그에게 베푼 관대(寬待). 지용은 운명이 저주스러웠다.
***포로 정지용**
사단 CP, CIC와 G-2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의 문답이 오고 간 후 그는 몇 일 간의 휴식을 얻고 '레드 크로스(적십자)' 기차편으로 후방으로 이송되었다. 그는 병들고 있었던 것이다. 워낙 노쇠하였던 몸이 생전 겪어보지도 못하던 고난을 겪음으로써 몸은 형편 없이 못쓰게 되었던 것이다.
후방 부산으로-. 부산에서 다시 LST로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제 X포로수용소에서 다시 제 X포로수용소로 전전(轉轉)하며 지용, 아니 박창현은 포로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몸이 되었다. 포로의 생활은 차라리 낳았다. 편했다. 먹을 것 풍부하고 잠자리 편하고 누구 하나 간섭하려 들지 않았다.
제 X포로수용소에서 제일 처음 그에게 맡겨진 것은 소제부(掃除夫)였고 그 다음이 취사반장(炊事班長)이라는 감투였다. 취사반장으로서의 자격은 어느 포로 못지 않게 지니고 있었다. 제일 첫째는 노인이라는 것. 한글 정도의 글자를 알아본다는 것...등등. 수용소 내의 포로들은 대개가 17, 8세의 어린애들이었고 고작 많아야 28, 9세. 그렇고 보면 공동생활에 있어 취사반장은 그에게 안성맞춤이었었는지도 모른다.
취사반장으로서의 일과는 시작되었다. 젊은 포로들이 밥짓고 국 끓이고 찌개 만들고 하는 제반 과업을 하나 하나 감시하며 일일이 '코치'하는 일이었다. 특히 식사 공급 시에 그의 직책은 극히 중대하였다. 공평히 식사를 공급하느냐, 안 하느냐. 해풍(海風)이 천막을 뒤흔들고 파도 소리 처량한 밤이면 내내 잠을 이룰 수 없이 멀리 북두칠성을 바라보며 화려했던 옛 추억을 더듬어보기 그 몇 천번이고 그 몇 만 번이었으랴!
사랑하는 아내, 귀여운 딸자식. 그리운 옛 벗. 생각나는 술집. 정다웠던 거리. 젊음의 낭만이 넘쳐흐른 종로 문장각. 잊을 수 없는 제자. 교단(敎壇).
낙동강. 포로. 천막...몸에 걸친 의복에 PW라는 낙인(烙印)이 찍히고 끊어지지 않는 추억을 더듬는 그의 눈동자에선 그 얼마의 눈물이 솟구치며 목이 메었겠는가.
"산 넘어 저쪽에는
누가 사나?
뻐꾸기 영 위에서
한나절 울음 운다.
산 넘어 저쪽에는
누가 사나?
철 나무치는 소리만
서로 맞아 찌 르 렁...
산 넘어 저쪽에는
누가 사나?
늘 오던 바늘 자수도
이 봄 들며 아니 뵈네"
- '산 넘어 저쪽'의 일절-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술을 마셨다. 술을 마시고 울었다. 울다 지치면 또 술을 마셨다. 마시고 또 마셨다. 술은 그에게 있어 유일의 벗이었던 것이다. 술이 손에 들어오는 '루트'는 얼마든지 있었다. 사람 좋은 감시병을 통해서라든가 혹은 포로의 연락을 전문적으로 취해주는 부락민을 통해서든가. 술이 끊이지 않았다.
낮에도 술. 저녁에도 술. 밤에도 술. 술뿐이었다. 술이면 그만이었다. 술을 마시곤 고래고래 주정을 하는가 하면 그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헛된 말을 뇌까리고..." 네깐 놈들이 뭘 안다고 야단이야. 쓸개 빠진 놈들 같으니라구." 닥치는 대로 없신여겼다. 때로는 스스로의 가슴을 쥐어뜯으며 괴로워도 했다. 정녕 안타까운 정경(情景)이었다.
술이 곤드레 만드레가 되어 가지고 취사장엘 나타나 일일이 감독 하는가 하면 나이 어린 포로들이 반장의 눈을 피해 '누룽지'를 살짝 훔쳐 가는 모양을 보고 " 네 이놈, 왜 누룽지를 훔쳐가? " " 그래, 그래, 좋다. 좋아. 갖다 먹어야지. 먹어야하고 말고. 모두 아이들도 있고 딸도 있는 놈이니까."
이렇게 향수에도 정이 있다는 것. 포로의 역사(役事)는 꽤도 오래 지속되었다. '로크' 준장 납치사건. 우익(右翼), 좌익(左翼) 분쟁 학살사건. 좌익 포로 폭동사건. 천막 이동사건 등등. 진정 피비린내 나는 여러 가지 사건이 유수(流水)와 같이 일어나고 깨지고 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도 지용은 어느 한 곳에 가담하지 않고 수굿수굿 술만 마셨다. 술을 마시고 주정을 했다.
달이 가고 해가 바뀌었다. 포로수용소에서 4년이라는 장구(長久)한 세월을 보냈다. 그러는 사이에 밖에서는 서울이 수복(收復) 되고 평양을 탈환 압록강까지 진격 중공군이 참전하고. 함흥 교두보작전이 수행되고. 피의 능선 전투, 백마고지 전투가 일어나고 정전(停戰)이 되고 개성(開城)회담, 정전협정, 판문점 회담이 열리고 싸움은 끝이 났다.
그런 어느 날. 그곳 제 X포로수용소에서는 송환(送還) 희망 불원(不願)문제가 대두(擡頭) 되었다. 이북으로 돌아가겠느냐, 자유대한에 남겠느냐는 것이었다. 대다수의 젊은 포로들이 죽기를 한사코 송환을 불원했다. 죽어도 이북 고향으로 가지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때 정지용은 고민하기 시작했다.
가야 하느냐, 가지 말아야 하느냐. 가자니 기막힌 노릇이요, 안 가자니 자기 자신이 무엇이 될 것인가. 너무나 체신 머리 없고 지조(志操)가 없는 놈이라고 온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할 것이 아닌가. '천하의 변절자(變節者) 정지용! ' 이렇게 멸시 당하며 옛 벗들도 다정스럽게 맞아주지 않을 것이 아닌가.
정든 대한(大韓). 못 잊을 서울. 미칠 듯 그리운 아내, 딸, 아들. 허나 그렇듯 그리운 얼굴들 앞에 무수한 손가락질이 날아 들어오는 '씬'- 그것은 하나의 지성인으로서 진정 견디어낼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립되 가지 못하는 곳. 얼마나 큰 죄과(罪科)를 저질렀기에 다시는 가기 힘든 곳. 가족이 기다리되 안기지 못하는 자기 자신.
"이북으로 가겠느냐? " " 안 가겠느냐? " 물음은 두 개.
대답은 하나. 지용은 '무한히 이곳에 남고 싶고 영원히 살고 싶다. 그리고 자유로워지고 행복해지고 싶다. 허나, 나는 너무나 큰 죄과를 범했다. 그 죄과를 제아무리 참여했던들 그것으로 통하랴. 나는 죽으러 가야 한다. 죽어 마땅한 놈이니까-'
그는 송환을 원했다. 처절한 가슴을 안고 울었다. 아마도 지용은 그 당시 한국의 저명한 여류시인 모윤숙(毛允淑) 여사가 그의 행방을 찾아 그를 구출하기 위하여 남한 내의 각 포로수용소를 샅샅이 찾아 헤맸다는 사실의 1백 분의 1이라도 알았던들 그는 지금 우리 곁에 와있으리라. 그러나 그는 내내 스스로 면구(面具)스러워 가명(假名)을 썼기 때문에 아무리 포로의 명단을 뒤져도 '박창현'의 이름은 나왔을지언정 '정지용'의 이름 석자는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골고다'의 언덕으로**
4286년(1953년) 겨울. 일단 포로들은 판문점 중립지대에 집결하여 중립국의 감시를 받으며 포로 설득(說得)이 개시되었다. "돌아 오라, 나의 아들아. 형제들아! 기회는 이때가 마지막이다. 나의 친구여. "
국군 정훈(政訓)장교의 설득이 이루어졌다. 설득 천막의 국군 설득 장교 책상 위에서는 복혜숙(卜惠淑) 여사가 말하는 나라의 형제에게 보내는 말을 녹음(錄音)하여 틀어놓았을 때 나이 50의 지용의 심회(心懷)는 어떠했을까?
'가야할까?' '머물러야 할까? '
서울의 종로·소공동·명동·아내·자식·친구·서울의 정서(情緖)...죄과. 용서받을 수 없는 과거의 행위. 고민·운명·처참한 시대. 하늘이 놀랐고 눈앞이 아찔하여 그의 가슴은 갈기갈기 찢어져 달아날 것만 같았으리라. 괴롭다, 괴롭다 못하여 발광(發狂) 상태였던 그는 어느 한 순간 비실하고 오른 쪽 발이 북쪽 문께로 빗나가는 것이었다. (5월 2일)
후기: 이 글을 쓰는데 있어 구체적인 자료수집과 정확을 기하기 위해 조언하여준 시인 이활형과 전 반공포로 김동식 군에게 사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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