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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삼성, 화학물질 사용 라인은 공개 안했다"

[현장] 15일 삼성 기흥공장 견학, 처음부터 끝까지

삼성전자 기흥공장은 서울 서초 삼성 본관에서 차로 40여 분 걸리는 경기도 용인에 있다. 한국 반도체 신화의 산 증인들이 몰려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노동자들이 젊은 나이에 백혈병으로 스러져간 원인을 제공했다는 의혹의 중심에 서 있기도 하다.

기흥공장 1라인에서 설비 엔지니어를 맡던 황민웅 씨는 2005년 7월 급성림프구성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어 3라인에서 세척업무를 맡던 이숙영 씨가 2006년 8월 황 씨와 같은 나이인 31살에 같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듬해 3월, 고 이 씨와 2인 1조로 일하던 황유미 씨가 23살의 어린 나이에 눈을 감았고, 지난해 11월에는 2라인과 3라인에서 식각 업무를 맡았던 김경미 씨가 29살을 일기로 숨졌다.

잇따른 반도체 노동자들의 죽음에 대해 삼성은 말이 없었다. 2차례에 걸친 역학조사와 삼성의 자체 조사 끝에 암을 유발할 수 있는 화학물질은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반도체 노동자들의 건강관리 실태를 조사한 결과는 기업의 영업 비밀이라는 이유로 아직까지 공개되지 않고 있다.

삼성 온양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에 걸린 박지연 씨가 지난달 31일 故 황 씨와 같은 23살의 나이로 숨을 거두자 인터넷 상에서 '백혈병 소녀'를 추모하는 글들이 잇따라 올라왔다. 말이 없던 삼성이 15일 공장을 전격 공개한다고 나섰다.

▲ 삼성이 15일 반도체 공정라인 공개에 앞서 진행한 간담회에서 조수인 삼성전자 반도체사업부 사장이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삼성전자

삼성이 공개한 라인은 지은 지 18년이 된 5라인과 반자동화된 시스템이 갖춰진 S라인이다. 삼성은 현재 가동 중인 라인 중 가장 오래된 5라인이 두 명의 노동자가 숨진 3라인과 가장 유사한 공정을 갖추고 있다고 했다. 5라인에서 쓰이는 화학물질 역시 3라인과 같다고 한다.

투어 버스에 짐을 내려놓고 입구로 들어갔다. 라인 안에서는 전자기기를 포함한 소지품은 물론 필기도구조차 손에 들 수 없었다. 여직원 휴게실에서 10여 분을 대기했다. 휴게실에는 소파와 컴퓨터 3대, 음료대가 놓여 있었다. 벽에는 보안준수, 스트레칭 방법 등을 알려주는 포스터가 붙어 있었고, 다른 편에는 사내 체육대회 상패 등이 눈에 띄었다.

기자들을 인솔한 삼성 관계자는 "5라인은 1990대 중반 삼성이 세계 최초로 16메가 D램을 만들던 작업장"이라며 "당시 D램 가격이 40달러를 상회했다"고 회상했다. 전직 대통령과 외국 귀빈 등이 반도체 라인을 방문했던 사진이 복도를 따라 걸려있었다.

탈의실로 이동해 줄무늬가 그려진 바지를 받아들었다. 정전기가 날 경우 줄무늬에 들어있는 선을 통해 빠져나가도록 설계된 옷이다. 같은 무늬가 그려진 면장갑을 끼고 그 위에 비닐재질로 된 장갑을 덧씌웠다. 어깨까지 덮는 모자를 착용하고 머리카락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단단히 조였다. 그 위에 상하의가 붙은 방진복을 입고 마스크를 썼다. 목이 긴 신발을 신고 지퍼를 조이니 눈을 제외한 모든 곳이 빈틈없이 가려졌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이 공장 공개에 앞서 14일 배포한 보도자료에 따르면 남성 노동자의 방진복과 방진화에는 이물질이 많이 묻어 있다고 했다. 하지만 기자들이 착용한 방진복은 깨끗했다. 방진복 착용을 돕던 중년의 사원에게 한 기자가 옷들이 새 것이냐고 물어봤지만 "평소에 깨끗하게 관리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클린 룸에 들어가기 직전에 공기 샤워실를 거친다. 천장 양측에 달린 동그란 구멍에서 공기가 1분간 쏟아져 나온 후 클린룸으로 통하는 문이 열렸다. 안내 직원을 따라 복도로 들어섰다. 폭 2미터가 안되는 복도 양쪽에 공정에 따라 작업실이 촘촘히 들어서 있었다. 천장에는 노란 빛을 뿜는 전등이 일렬로 배열되어 있었다. 공기를 순환시키는 환풍기 소리에 귀가 멍멍했다.

라인 견학은 삼성이 준비한 계획에 따라 속전속결로 이루어졌다. 기자 6명씩 조를 이뤄 들어갔고 라인 관리자가 이들을 인솔했다. 한 공정이 이루어지는 곳마다 잠깐 멈춰서 3~4초간 작업내용을 설명하고 이동하는 일을 반복했다. 삼성 측이 쏟아내는 전문 용어와 소음 때문에 설명이 잘 들리지 않았다.

2~3분 정도 지나자 두 겹의 장갑을 낀 손과 마스크로 가린 얼굴에서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눈 주위 얼굴로 느끼는 공기는 시원했지만 바람이 통하지 않는 방진복은 답답하게 느껴졌다. 작업장 내 공기는 쉴 새 없이 위에서 아래로 쏟아졌다. 삼성 측은 화학물질 누출 시 노동자의 호흡기로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운행하는 공기 순환 시스템이라고 설명했다.

공장 견학이 반도체 노동자들의 사망 원인을 규명하는 실마리가 되기 위해서는 반도체 공정에서 사용되는 화학물질과 근무자들의 실제 작업 환경을 살펴볼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삼성 측이 준비한 견학 장소는 웨이퍼를 만드는 곳(서비스 에어리어)이 아니라 부품들을 조립해 운반하는 곳(워킹 에어리어)이었다. 언론에게 공개한 곳도 박막을 입히거나 세공하는 공정이었다.

근무자들 역시 방진복과 마스크를 쓰고 작업하고 있었다. 솜털이 채 가시지 않은 몇몇 어린 여성 노동자들이 눈에 띄었다. 인솔자에게 방진복 이외의 보호장구 착용 여부를 묻자 "이곳에서는 유해한 화학물질이 사용되지 않으며 마스크는 침 등의 이물질이 나오지 않기 위해 착용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5라인 방문을 마친 후 버스를 타고 S라인으로 이동했다. S라인은 공정을 살펴볼 수 있는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방진복이 아닌 평상복 차림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100여 명의 직원이 있었던 5라인과 달리 컨베이어 시스템에 의해 반자동화된 S라인에 근무하는 노동자는 40여 명에 불과했다.

각 라인당 약 10여 분에 걸쳐 속전속결로 진행된 견학에서 비전문가인 기자들이 발암물질과 관련된 화학물질을 살펴보거나 노동자들의 근무상황을 살펴보는 것은 애당초 무리였다. 기자들 역시 이 점을 알고 있었기에 견학 전에 열렸던 간담회에서 공장 견학보다는 그동안 제기된 의혹에 관한 삼성 측의 상세한 해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었다.

반올림 역시 이 점을 지적하며 피해자 중 근무경험이 있는 이들이 견학에 참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 황민웅 씨의 아내 정애정 씨는 11년간 5라인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어 기자들과 대동했다면 당시 근무환경과 지금이 어떻게 다른지 증언할 수 있었다. 삼성 관계자는 "(정 씨가) 참가하면 일정에 차질이 있을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돼 제외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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