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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후진타오, '황태자'에서 '황제'로

[신간] "비범한 자질과 인내력, 그러나 개혁 기대는 난망"

지난달 19일 중국인민해방군 최고통수권자인 장쩌민(江澤民)이 군사위 주석직에서 전격적으로 사임 의사를 밝히면서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공산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이 당.정.군을 장악하는 명실상부한 중국의 최고지도자로 자리잡았다.

후진타오는 중국 제2세대 지도부를 이끌었던 덩샤오핑(鄧小平)으로부터 차세대 후계자로 일찌감치 지목된 후 제3세대 지도자 장쩌민으로부터 2002년 11월 당 총서기를 물려받은 뒤 지난해 10월 국가주석직을 물려받은 데 이어 군사위 주석직까지 승계하게 됨으로써 명실상부한 제4세대의 지도자가 된 것이다.

이처럼 권력의 중심에 올라선 후진타오는 중국경제가 한국경제의 생명선이라는 이유외에, 북핵문제에서 중국이 핵심적 중개자 역할을 하는 동시에 고구려사를 왜곡하는 <동북공정>의 핵심인물이라는 점에서 여러모로 우리에게 긴장과 관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황태자'가 '황제'가 되기까지**

이런 와중에 후진타오의 청년시절부터 당 총서기로 지명받기 직전인 2002년 9월까지를 다룬 <대륙을 질주하는 검은 말 후진타오>(런즈추.원쓰융 지음.들녘 간)이 출간됐다. 이 책은 지난해 국가주석에 오른 이후 후진타오 개인에 초점을 맞춘 몇몇 서적과는 달리 후진타오의 행보와 중국의 정치상황을 풍부한 자료와 객관적인 시각으로 서술한 책으로 평가받고 있다.

오랜기간 '황태자'로 불려온 후진타오가 최고권력자로 공식적인 지명을 받기 전까지의 행적을 차분히 짚어봄으로써 제4세대 중국 지도부를 이끌 후진타오와 중국의 내부 사정에 대해 그 진면목을 살펴보는 기회를 제공해준다는 점에서다.

미국에서 유학했으며, 중국정치와 청년문제에 정통한 런즈추는 1980년대 초반 후진타오가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 중앙 상무서기와 제1서기를 맡던 기간 여러차례 후진타오와 접촉했으며, 후진타오를 만났던 주요 인사를 인터뷰하고 방대한 자료를 참고해 책을 썼다.

***후진타오를 만든 덩샤오핑의 한마디, "괜찮은 것 같은데"**

후진타오는 가난한 차 판매상의 아들로 태어나 5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주로 할머니 손에 큰 것으로 알려졌다.
덩샤오핑에게 '황태자'로 낙점을 받은 92년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 된 후진타오의 공식 프로필에는 그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1942년 안후이성(安徽省) 지시현(績溪縣)에서 태어나 칭화(淸華)대 수리공정학부 하천발전공장과 졸업. 74년 간쑤(甘肅)성 건설위원회 비서, 85년 중국 공산당 구이저우(貴州)성 위서기, 88년부터 티베트 자치구 당위서기 역임.

그가 '황태자'로 지명되었을 때 말띠해에 태어난 그를 가르켜 '설산(雪山)에서 뛰어나온 검은말'이라는 표현이 나왔었다. 그러나 저자는 "많은 정치분석가들이 후진타오를 가늠할 수 없는 것은 중국식 정권교체의 양상을 분석해도 그가 왜 최고 영도층으로 선정되었는지 알아낼 수 없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저자에 따르면 중국에서의 권력교체는 신세대의 노력이 구세대의 수긍을 얻어야 점차 구세대가 설정한 정치궤도 안으로 진입할 수 있다. 최후에 가서 구세대의 영수들이 자기의 방침과 노선에 충실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질 때 그에게 옥새를 넘겨준다.

그런데 후진타오의 정치 실적은 그리 대단하다고 할 수 없다. 구이저우에서 3년이나 성위서기로 있었지만 낙후된 구이저우는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으며 티베트에서도 3년이나 있었지만 혼란은 여전하다.

인맥 관계를 보더라도 그는 파벌 색채가 짙지 않다. 비록 그가 '공청단파'에 귀속되어 있다는 일설이 있기는 하지만, 92년은 이 파벌이 가장 침체기에 있던 때이기 때문에 그에게 거대한 배경이 있었다는 것은 성립되지 않는다.

사상면에서도 그는 창의적인 견해를 발표하지 않았다. 저자는 여기서 92년 제14차 당 대표대회 준비모임에서 덩샤오핑이 던진 "후진타오가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아"라는 한 마디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이렇게 밖에 말할 수 없었던 중요한 원인으로 후진타오의 조심스러운 성격을 지적한다. 그는 자기를 포장하지 않으며 자기를 널리 알리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는 "돼지는 살이 찌는 것을 겁내고, 사람은 이름 날리는 것을 겁낸다"는 속담의 뜻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이름을 날렸고" "살이 쪘다"는 점에서 아직 의문이 남는다.

따라서 더 중요한 원인은 그가 자기 권력의 근원이 중국 공산당 원로층에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절대로 자기 자신의 진실한 견해를 발표하지 않으며, 나아가서는 자신의 진실한 견해에 따라 일을 처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중국의 권력체제 내에 이런 말이 유행한다.

"과오를 저지르지 않는 것이 바로 공을 쌓는 것이다".

***후진타오, 평범 속에 비범함 감추는 인내심 두드러져**

저자들은 바로 이같은 관료적인 태도와 함께 연줄을 만들어가는 처세술이 후진타오의 성향을 드러내는 중요한 특질로 지적하고 있다.

그같은 예들은 적지 않다.저자들의 추적조사에 따르면 후진타오의 실제 출생지는 상하이(上海)이며 장쑤(江蘇)의 타이저우(泰州)에서 자랐다. 그런데 후진타오는 이를 알리지 않았으며 심지어 출생지에 대한 취재를 금지시키는 조치까지 취할 정도였다.

홍콩 <명보>지는 그 이유를 분석한 기사에서 "당시 중앙정치국 일곱 명 상무위원들의 원적을 살펴보면 장쩌민도 장쑤 양저우 사람이고, 리란칭도 장쑤 진장 사람이다. 여기에 장쑤 타이저우의 후진타오까지 합치면 사람들에게 '장쑤방'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었다"고 썼다.

후진타오는 또 칭화대에 들어가자마자 공산당 간부의 딸 류융청과 교제하면서 훗날 아내로 맞아들인다. 간부 집 딸과 가난한 소업주의 아들이라는 정치적 등급의 차이를 뛰어넘어 후진타오는 춤과 노래, 문학 등에서도 상당한 재주를 보여 류융칭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저자는 또 후진타오가 정계의 엘리트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그가 '공과대 출신'이라는 점도 행운이었다고 지적한다. 문화대혁명 때부터 정치운동이 격화되면서 인문사회학 전공자들은 상호비판에 매몰되기 십상인 반면 실사구시를 추구한 공과대학 출신들이 더 많이 배출되고 이들이 승진도 더 빨랐던 현상이 존재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베이징대 출신들은 "칭화가 뭔데? 시키는 대로만 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공산당이 선택하는 인재선발 표준에 들어맞았을 뿐"이라고 평가절하하기도 한다. 베이징대 학생들은 독립적이고 자유를 갈망하며 당권자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베이징대 출신들은 "칭화대 출신들이 도대체 어떤 기업관리 능력과 경영 재능이 있는가. 정말로 기업이나 업종에서 실적으로 올려 그 실적에 따라 정계에 진출한 것인가"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주룽지 전 중국 총리는 칭화대 출신에 대해 "엄하고 바르다"는 인품을 강조했다. '엄하다'는 것은 당의 임무를 빈틈없이 완수해야 한다는 것이요, '바르다'는 것은 공산당의 의식 형태를 그대로 따른다는 것을 뜻한다.

이같은 저자들의 분석은 13억의 중국을 이끌며 개혁을 완수해 나가야 하는 21세기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과감한 지도력과는 분명 어울리지 않는다.

후진타오와 같은 세대의 선두주자는 원래 하얼빈공대 출신의 왕자오궈(王兆國·현 정치국원 겸 전국인민대표대회 부위원장)였다.왕자오궈는 일찌감치 덩샤오핑이 미래의 지도자로 직접 고른 인물이었으며, 덩의 오른팔 후야오방(胡耀邦)이 늘 데리고 다니면서 가르치던 인물이었다. 후진타오는 1996년 후야오방 당시 총서기가 원로들의 미움을 사 실각하기 전까지만 해도 왕자오궈의 그늘에 묻혀지내야 했다.

***"후진타오의 정치개혁에 대한 기대는 지나친 모험"**

저자들은 후진타오가 끝내 강력한 경쟁자인 왕자오궈를 물리치고 중국의 대권을 쥐게 된 가장 큰 요소로 '평범 뒤에 비범함을 감추고 겸손하게 인내하는 자질'을 꼽고 있다. 후진타오가 칭화대를 졸업한 뒤 서북지방의 간쑤성(甘肅省)의 류자샤(劉家峽) 댐 건설현장에서 1년간 막노동으로 사회생활을 할 때 그는 아무리 힘든 일도 반드시 해내며 '유명대학 출신'이라는 티를 전혀 내지 않아 간부나 노동자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겨 높은 평가를 받은 일화는 이러한 면모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후진타오의 겸손한 인내력에 대해 저자들은 높은 점수를 주지 않는다. 사회주의에 자본주의 경제를 접목시키는 대전환기에 처해있는 중국 공산당의 앞날을 이끌기에는 박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때문에 저자들은 "후진타오에게 희망을 걸고 그의 능력을 믿어도 괜찮은 걸까"라는 질문을 던진 후 "하지만 대답은 'NO'"라고 단호하게 자문자답한다.

후진타오를 너무 믿는 건 실패를 향해 주사위를 던지는 모험이라는 것이다. 저자들은 "만약 당과 사회, 국제사회로부터 변혁을 촉구하는 충분한 압력을 보내 오지 않고, 최고 정책결정자 역시 이런 정치 개혁을 추진할 동력과 담력이 없는 사람이라면 중국사회의 전형은 언제일지 모르는 아득한 먼 훗날이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나아가 저자들은 "중국 공산당의 일당독재의 장구성에 의심을 갖게 하는 중요한 변수들이 있다"면서 "인구의 증가, 자원의 부족, 환경의 악화, 동부와 서부 지구의 분열....한마디로 생존공간이 좁아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저자들은 "이것들은 중국 공산당이 반드시 해결할 어두운 과제"라면서 "게다가 농업의 파산, 심각한 실업, 부패, 사회신용의 상실, 티베트와 신장 소수민족의 독립정서, 눌러도 자꾸 고개를 쳐드는 파룬궁....쌓이고 쌓였던 위기들이 하나씩 하나씩 그 모습을 겉으로 드러내고 있다"고 적고 있다.

또한 저자들은 "1992년 덩샤오핑이 인민들이 정치를 잊도록 하기 위해 경제이익으로 중국 인민들을 유도했다"면서 "중국 공산당은 유일한 희망과 노력을 모두 경제의 고속성장에 집중했으나 중국의 경제속도가 영원히 더뎌지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단 말인가"라며 중국 공산당이 처한 위기를 부각시켰다.

저자들은 이처럼 중국 공산당의 앞날을 매우 비관적으로 보고 있다. 한 예로 '중국공산당'이란 명칭이 중국의 WTO 가입 이후 반드시 걸어나가야 할 자본주의 발전 방향과 완전히 어긋나고 있다. 중국 공산당 창건 초기의 사회이상은 빠른 속도로 변하는 중국의 자본주의화의 과정에서 점점 우스운 이념이 되고 있다. 그 이념 자체는 조롱의 대상이 되지 말아야 하지만, 중국이 실제로 나아가는 자본주의 길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개념인 것이다.

'중국 특색이 있는 사회주의'는 점차 '중국 특색이 있는 자본주의'로 변하고 있다. 어느날엔가 공산주의와 공산당이라는 명칭이 사회현실과 어울리지 않아 충동을 일으켜 그 해결의 돌파구를 찾는 날이 오면 사람들은 반드시 공산주의와 공산당이라는 이름에 대한 '이름바꾸기' 운동을 일으키고 말 것이다. 저자는 책 말미에 "이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을 바로 할 수 없고, 말이 바르지 않으면 일을 성사할 수 없다"는 속담을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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