잇따른 혈액사고로 시민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고 있는 대한적십자사가 해마다 시민들이 힘들게 모금해준 적십자회비도 중간착복한 게 아니냐는 강한 의혹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적십자사는 1999~2003년 사이 재해 및 일반구호용으로 지급돼야 할 쌀, 라면 등을 구입하는 과정에 업체를 임의로 선정해 계약서도 없이 일을 처리해와 리베이트(반대급부) 착복 의혹을 받고 있다. 또 햅쌀 등 질 좋은 쌀을 구입하는 원칙을 깨고 햅쌀 가격을 주고 1~2년 된 묵은 쌀을 구입해 구호용으로 지급한 정황도 포착됐다.
창립 1백년을 맞은 '봉사단체' 적십자사의 적나라한 현주소다.
***"적십자사, 규정 무시하고 수의계약으로 일관"**
7일 국회 보건복지위 한나라당 고경화 의원실이 적십자사로부터 제출받은 최근 3개년간 <적십자사 감사자료>에 따르면, 적십자사는 재해나 일반구호용으로 라면과 쌀 등을 구입하면서 규정에 따른 경쟁입찰 방식을 묵살하고 특정업체와 수의계약을 일반적으로 해왔다.
2002~2003년의 경우 계약 금액이 4천7백여만원어치 라면을 구입하면서 경쟁입찰에 의해 업체를 선정해야 하나, 자체적으로 S사에서 라면을 구입하기로 하고 수의계약을 체결한 것으로 확인됐다.
충북지사도 2001~2003년까지 '구호용 백미' 구입을 위해 총 3회 9천2백여만원을 농협에 수의계약으로 구입한 것으로 확인됐다. 전북지사 역시 2000~2002년까지 '구호용 백미'를 구입하기 위해 농협과 해마다 1천2백만~1천480만원에 해당하는 계약을 체결하면서 수의계약으로 일관했다.
이 과정에 반드시 남겨야 할 기본적인 계약 구비 서류도 제출하지 않아, 의혹을 한층 증폭시키고 있다.
경북지사의 경우 라면 1상자를 2002년에는 1만6백26원에, 2003년에는 1만1천5백17원으로 수의계약을 체결했으나, 계약 당시 이런 단가로 결정한 구비 서류는 누락해 적정한 가격으로 구입했는지 확인이 불가능했다.
전북지사는 계약 보증금의 처리 등과 같은 상세한 계약 내용 없이 계약을 체결했으며, 계약을 체결한 업체가 적격한 업체인지 확인할 수 있는 관련서류(사업자등록증, 인감증명서) 등도 제출받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특히 쌀의 경우에는 품목, 생산지, 생산연도에 따라 가격 차이가 있기 때문에, 견적서를 세밀하게 비교한 후 계약을 체결해야 하나 무조건 최저 견적으로 제출한 업체와 계약을 체결한 사실도 드러났다.
이렇게 밀실에서 은밀하게 일을 처리하다보니 같은 금액을 중복 지급하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발생했다. 부산지사의 경우 무료 급식용 쌀 2백50포 구입대금 5백3십7만5천원을 2001년 2월19일 지급한 후에, 보름 후인 3월15일 다시 같은 금액을 지급한 것으로 확인됐다. 적십자사는 다음 날에야 이런 사실을 인지하고 서둘러 회수했다.
이런 관행은 다른 계약도 마찬가지여서 적십자사의 2003년도 계약현황을 보면 3천만원이상 계약 건 가운데 전산프로그램 개발 등 4건만이 일반 경쟁에 부쳤을 뿐, 나머지 33건 34억여원은 수의계약에 의해 계약업무가 이뤄졌다.
적십자사의 단순실수가 아니라, 수의계약을 통한 리베이트 착복을 겨냥한 게 아니냐는 의혹을 낳는 대목이다.
***"햅쌀 가격 주고 묵은쌀 구입해 구호용으로 공급"**
적십자사는 또 '재해 및 구호용으로 지급하는 물품은 가능한 한 양질의 것으로 제공해야 한다'는 봉사단체의 '기본'도 지키지 않은 사실이 드러났다.
강원지사의 경우 2002~2003년에 농협과 '구호용 백미' 구입 계약을 체결하면서 계약한 해 6월부터 2년에 걸쳐 구입하기로 정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계약 기간이나 쌀의 생산연도 등을 고려하지 않고 계약을 체결해, 매년 햅쌀이 출고되는 11월부터 약 8개월 동안은 공급자가 생산된 지 1년 이상 된 묵은 쌀을 공급할 길을 터줬다.
이에 농협은 묵은 쌀을 햅쌀 가격으로 공급할 수 있어 부가적인 이득을 취할 수 있었다. 이같은 문제점이 지적되자 적십자사는 뒤늦게 "다음해 햅쌀이 나오기 전까지만 공급될 수 있도록 한다"는 내용을 계약서에 첨부할 것을 강원지사측에 지시했다.
***"구매 계약서조차 작성하지 않아"**
적십자사는 또 쌀, 라면 등을 구입하는 과정에서 주먹구구식으로 예산 집행을 해온 것으로 확인됐다.
적십자사 충북 지사의 경우 1999~2000년 동안 총 8회에 걸쳐 '구호용 백미'를 구입하면서 계약금액이 3천만원을 초과할 경우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계약서조차 3회나 작성하지 않았다. 또 농협에 대해서 계약 보증금을 면제하거나(4회), 대금을 지급하면서 물품이 제대로 들어왔는지 확인하는 검수조서를 생략(1회)한 것으로 드러났다. 농협에 대한 절대신뢰를 이유로, 규정을 어기면서까지 최소한 2억4천여만원의 집행이 주먹구구식으로 이뤄진 것이다.
이런 관행은 다른 지사도 마찬가지였다. 경남지사 역시 1999~2001년 동안 '구호용 백미' 총 5회 4억1천여만원과 라면 총 5회 1억8천7백여만원을 농협과 N사에서 구입하면서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고, 계약금액의 10%에 해당하는 계약금을 면제해 준 것으로 확인됐다. 물론 관련 서류도 전혀 비치하지 않았다.
***"적십자사는 '봉'? 공급자 입맛 따라 가격 올려줘"**
적십자사는 이밖에 물가 변동에 따라 구매물자 계약금액을 조정할 때도, 적절한 기준 없이 공급자 요구대로 가격을 올려준 사실도 드러났다.
대전ㆍ충남 지사는 2002년~2003년 농협과 총 1억6천8백여만원의 '구호용 백미' 계약을 하는 과정에서 2002년에는 1포당 9백원 및 1천5백원, 2003년에는 6백원 및 1천1백원을 각각 인상해 총 5백여만원을 추가로 지출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렇게 단가를 조정할 경우 여러 가지 기준을 면밀히 검토해야 하나, 농협이 인상 요청한 금액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계약 단가를 조정하면서 문서로 확정해야 하나, 이런 절차도 졸속으로 처리했다. 적십자사는 내부 규정상 시세 기준표 기준으로 물가 변동이 5% 이상인 경우 양측이 협의해 가격을 조정하도록 돼 있다.
2001년에도 경기지사의 경우 농협과 7억5천4백여만원의 구입 계약을 하면서 1포당(10㎏) 2만1천8백원에 구입하기로 했으나, 이후 농협의 요청으로 1포당 4백원을 인상해 5백7십여만원을 추가로 지출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도 시세 기준표 등은 면밀히 검토돼지 않았다.
시민들이 어려운 이웃을 위해 소중하게 쓰일 것으로 믿고 낸 적십자회비 등이 이처럼 '불투명'하게 집행되고 있다. 적십자사가 과연 존립해야 하는지, 근본적 의문이 제기되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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