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대통령은 올해엔 작년과 달리 남북협력 사업을 '자주적으로' 적극 추진해 나가겠다고 했다. 1월 2일 신년하례회, 7일 신년사, 14일 신년기자회견을 통해 '운신의 폭'을 넓혀 나가면서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대통령의 발언은 곧 국가정책이다. 따라서 국민들은 '2020년에는 2018년처럼 한반도의 봄이 다시 오겠구나'라는 기대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대통령의 기자회견 이틀 뒤인 16일 해리 해리스 주한 미 대사는 기자회견을 자청해 대통령의 발언에 토를 달았다. 남북협력 사업을 하려면 사전에 '한미 워킹그룹'에서 협의부터 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그러자 그날 통일부는 즉각 해리스 대사 발언은 '주권침해'라고 쏘아 붙였다. 청와대도 '부적절한 발언'이라고 평가했다. 대통령과 통일부, 청와대의 이런 일련의 움직임에는 정부가 올해는 '유엔 대북제재를 위반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한미 워킹그룹을 거치지 않고도 독자적으로 남북 교류협력 사업을 추진해나가겠다'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보인다. 지난해처럼 사사건건 미국과 사전협의를 하거나 '허락'같은 것을 받지 않고서도 남북관계에서 '운신의 폭'을 넓혀 나가겠다라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미국 대선이 있는 2020년은 미국 국내 정치 상황 때문에 북미 관계가 진전되기는 어차피 어렵다. 그런 와중에 남북관계와 북미 관계가 2인 3각처럼 움직여야 한다는 미국의 정책을 우리가 '추종'한다면 2020년도 남북관계에서 허송세월을 보낼게 뻔하다.
한편 북한은 최근 미국통인 리수용 외무상을 해임하고 통일전선부 경험을 가진 군 출신 리선권을 임명했다. 이를 볼 때 북한도 당분간은 북미 관계를 접었다고 할 수 있다. 일이 이렇게 되어 가는 마당에 우리마저 미국을 따라 남북관계 관리를 방기(放棄)한다면 어찌 될 것인가.
손 놓고 미국의 허락이 떨어지기만 기다릴 시간이 없다. 한반도 문제는 우리가 주체가 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2인 3각의 족쇄가 풀어져야 하는 이유다. 북한의 "남조선은 미국의 51번째 주인가?"라는 비아냥은 무시한다 하더라도, 남북관계는 우리의 필요에 의해서라도 적극적‧자주적으로 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문 대통령은 "작년에는 남북관계와 북미 관계의 조화를 이루려다 보니까 남북관계가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그래서 "금년에는 운신의 폭을 좀 넓혀 나가면서 노력하겠다"고 연초부터 새롭게 국민들에게 약속했다. 그러면 정부 내 통일‧외교‧안보 유관부처들은 대통령의 정책의지를 구현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지난 10~11일 사이에 실망스런 일이 있었다. 미 국무부 대북정책 부대표인 알렉스 웡이 방한해 외교부의 카운터 파트인 국장급 인사를 만났다. 외교부는 "개별관광, 철도·도로 연결, 2032 서울-평양 공동 올림픽 등 문 대통령의 대북 제의에 대해서 알렉스 웡 미 국무부 대북정책 부대표에게 충분히 설명했고, 웡 부대표가 이해했을 것이다"라고 발표했다. 그리고 기자들이 웡 부대표와의 협의가 한미 워킹그룹 회의였느냐고 묻자 한미 간 국장급 정보 공유 차원의 협의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미 국무부는 그 협의가 바로 한미 워킹그룹 회의였다고 성격 규정을 했다.
외교부의 대처는 국민들을 혼란스럽게 하다못해 자괴감마저 들게 했다. 대통령이 '자주적으로'라는 말까지 써가면서 남북관계에서 운신의 폭을 넓혀 나가겠다고 했으면, 외교부 실무진도 의연하게 협의를 운영했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 국무부 쪽에서 한국 정부가 한미 워킹그룹 회의에서 남북관계 사안을 상세하게 '보고했다'는 정도로만 생각하도록 협의를 끝내 버렸다.
한미 워킹그룹은 2018년 11월에 만들어진 한미 간 외교 협의체이다. 그런데 이 협의체가 만들어진 이면에는 불편한 진실이 있다. 2018년 9.19 평양 남북정상공동선언과 함께 9.19 남북 군사분야합의서가 발표된 후,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이 "왜 한반도의 군사문제를 미국과 사전협의도 없이 남북끼리 결정해버렸느냐"고 불만을 표출한 후 한미 워킹그룹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이미 다 알고 있다.
이 해프닝이후 그해 11월에 한미 워킹그룹이 만들어졌고, 거기에서 남북관계와 북미 관계, 북핵 문제 관련 한미 간 긴밀한 정책들을 조율해 나가고 있다.
2018년 11월 20일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워킹그룹의 첫 작품은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조업 재개 불가"였다. 물론 북핵문제 미해결과 유엔 대북제재 위반 가능성을 이유로 들었지만, 그 이후 2019년 내내 남북관계는 한 발짝도 못 나가고 말았다. 한미 워킹그룹에서 한미가 긴밀하게 공조한 결과가 그것이었다.
결국 한미 워킹그룹은 남북관계-북미 관계-북핵 문제를 조율한다는 미명하에 미국이 남북관계를 자기들 맘대로 좌지우지하는 2인 3각의 '족쇄(足鎖)'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2020년에는 유관 부처들이 한미 워킹그룹이라는 '족쇄'를 풀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최소한 그 족쇄를 느슨하게 만들 방법이라도 찾아야 한다. 주한 미국 대사가 일국의 대통령의 정책의지에 제동을 걸어도 '꿀 먹은 벙어리'요, 국장급 한미 워킹그룹에다 보고하고 미국 측이 이해만 했다는 말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 외교부는 한미관계의 원만한 유지, 한미동맹만 외칠 것이 아니라, 미국이 난색을 표하더라도 우리가 간절히 원하고 필요로 하는 것을 얻어내야 할 것이다.
'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준다'는 옛말도 있다. 우리의 필요를 어떻게 미국이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미국의 이해를 넘어서 미국의 협력을 끌어내는데 자주적으로, 그리고 현실적인 방안으로 미국을 설득해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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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북한학으로 석사-박사학위를 받았다. 통일부 정책자문위원, 원광대 초빙교수(외교안보통일), 김대중평화센터 이사 등을 거쳐 현재 민주평통 상임위원, 민화협 정책위원장, 통일부 남북관계발전위원회 위원, 더불어민주당 한반도경제통일교류위원회 부위원장, 외교안보통일 자문회의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북한의 기아>(역서, 2001) <북한인권문제 : 원인과 해법>(2012), <국경을 걷다>(2013), <정세현 정청래와 함께 평양 갑시다>(공저, 201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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