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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지 않고 일하게 해달라"는 외침은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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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지 않고 일하게 해달라"는 외침은 여전하다

[기고] 안전하게 일할 권리, 노동의 기본 전제

노동안전보건 소식을 매일 확인할 수 있는 SNS 공지창이 있다. 매일 많은 기사들이 공유되는 대화방에 참여한 지 꽤 됐건만, 울리는 알림을 확인하는 것은 여전히 낯설고 두렵기도 하다. 지역과 사업장, 하는 일의 종류만 다를 뿐 매일 어딘가에서 누군가 죽고 다친 소식이 끊임없이 올라온다. 어제 올라왔던 기사가 아닌지, 다시 눈을 크게 뜨고 확인해보지만 새로운 기사로 전해지는 황망한 소식은 계속되고 있다.

2018년 스물다섯 살 김용균의 죽음은 2인 1조 안전수칙이 허울뿐이었던 현장의 위험, 노동자의 안전과 생명을 담보로 창출되는 이윤을 향유하는 자가 정작 노동자의 건강과 안전은 외면해도 괜찮은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그의 죽음은 산업안전보건법 전면개정을 가능하게 했지만, 우리는 이 법을 ‘김용균 없는 김용균법’으로 명명해야만 했다.

2019년 마흔 살 문중원의 죽음은 한국마사회의 고질적인 비리와 그 과정에서 온갖 갑질과 차별에 시달리는 기수 노동자들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고발했다. 그러나 목숨을 건 위험을 무릅쓰고 경마장에 나서야 하는 이들은, 마사회의 횡포와 비리 속에 언제, 어떻게 일할 수 있을지조차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 죽음이 아니면 이 부당한 현실을 알릴 수 없어 7명의 노동자가 사랑하는 이들의 곁을 떠났고, 문중원 노동자의 장례는 여전히 치르지 못하고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2019년도, 2020년도, 한 해를 정리하고 새해를 맞이해야 할 그 시작을 노동자의 죽음을 추모하고, 진상을 밝히고 책임을 묻기 위한 시간으로 채워지고 있다. 죽지 않고 일할 수 있게 해달라는 외침이 여전히 유효한, 아니 절실한 2020년이다. 최첨단 기술을 뽐내는 대한민국이라지만, 대한민국의 노동자는 물건을 만들다 기계에 깔려 죽고, 건물을 짓다 떨어져 죽고, 내가 만지는 물질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숨 쉬고 만지다가 죽는다. 비용을 줄이려는 사용자에게 언제나 외주화의 유혹은 계속되지만,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딱히 거부할 동기도 없다. 하청업체 소속에 비정규직인 노동자들은 자신이 어떤 위험에 처해있는지, 무엇을 요구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설령 알더라도 하나된 목소리로 사용자와 교섭할 수 없고, 더욱이 일자리를 잃을 위험을 각오하고 개별적으로 문제제기 하거나 일을 거부할 수도 없다.

김용균 노동자 사망사고 진상조사 당시 5개 발전사에서 확인된 21건의 재해자는 모두 1, 2차 하청업체 소속 노동자였다. 언론 보도에 의하면 2018년 1월부터 2019년 9월까지 발생한 사망사고에서 건설업, 조선업 계열사를 둔 그룹이 상위를 차지했다. 우연의 일치겠냐는 질문조차 필요 없는 결과였다. 그러나 다단계의 원하청 구조 속에 정작 최종 이윤 귀속자에게 그 책임을 묻지 못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법을 준수하고 사고를 예방할 것을 기대할 수도 없다.

28년 만에 개정된 산업안전보건법은 많은 부분이 달라졌지만, 개정법에 의하더라도 제조업 공정, 건설현장, 발전소, 시설관리 등 외주화가 자연스러운 형태인 업무는 여전히 도급, 즉 외주화가 가능하다. 그리고 안전·보건조치의무를 다하지 않아 노동자가 다치거나 죽어도 개별 행위자(현장 책임자)가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혐의나 업무상과실치사상죄로 처벌받는 것, 법인이 벌금형을 받는 것 외에 해당 사업주가 법인 운영에 실질적인 영향을 받을 만큼 부담을 줄 수도 없다. 산업안전보건법이 정하고 있는 최소한의 안전·보건조치를 취할 유인이 없는 것이다.

아프거나 다칠까 봐 걱정하지 않고, 건강하고 안전하게 일할 권리는 모든 노동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이다. 이를 보장해야 한다는 법률규정이 있어야만, 어겼을 때 법적제재를 받아야만 가능한 것이 아니고 그래서도 안 된다. 그러나 수많은 노동자들의 죽음과 고통 앞에 무색한 말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산업안전보건법령이 재검토되고,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되어야 하는 이유다. 새롭게 논의를 시작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사업주, 경영책임자에게도 안전보건조치의무 위반에 대한 책임을 묻고, 안전·보건조치의무를 소홀히 하도록 지시하거나 이러한 조직문화가 존재하는 경우 매출액(수입액)을 기준으로 벌금을 가중하도록 하여 실질적인 예방 및 제재가 가능하며, 징벌적 손해배상책임까지 물을 수 있는 법안이 이미 20대 국회에 계류 중이고, 이러한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제정되어야 한다는 요구는 계속되고 있다.

산업안전보건법령에 대한 재검토,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만으로는 안전하고 건강한 일터를 만들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노동자의 안전과 생명이, 비용 절감을 이유로 터부시되지 않도록 하는 작은 마중물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더 이상 노동자의 죽음과 고통을 무기력하게 방관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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