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일본의 핵심소재·부품 수출 규제로 인해 소재·부품 강국으로 인식되어온 우리나라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 메모리반도체 분야 세계 1위이고 제조생산의 52%, 수출액의 50% 이상을 차지하는 소재·부품·장비 분야의 생산과 수출이 위협받고 있다. 이번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로 드러난 사실은 우리나라의 소재·부품·장비 분야가 경쟁력을 가지고 있고 제조생산이나 수출에 많은 기여를 하고 있지만, 핵심소재와 부품 영역에서는 경쟁력에 있어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이다. 완성품 중심의 성장전략, 미흡한 기초연구 투자, 디자인, 엔지니어링 등 지식서비스 발전 지체, 이로 인한 산업생태계의 발전 지체 등이 이러한 문제를 초래한 원인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1)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혁신적인 생태계 구축을 위한 공동노력, 2) 상용화 테스트와 신뢰성 확보를 위한 테스트베드의 구축과 운영, 3) 기술 및 제품의 표준화 노력이 필요하다. 혁신적 산업생태계의 확장을 위해서는 중소기업의 혁신역량 제고를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중소기업 지원을 위한 연구개발 전문 기관 운영, 협업형 비즈니스 모델의 활성화, 전략적 제휴 협동조합 활성화 등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실행할 필요가 있다.
일본정부가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제조에 사용되는 주요 소재인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포토레지스트, 에칭 가스라는 세 가지 품목에 대해 한국을 포괄적 수출 허가대상에서 제외한지 벌써 6개월이 흘렀다. 이 품목들은 일본기업들이 80%이상의 글로벌 시장점유율을 가지고 있으면서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제조에 필수적인 핵심소재라서 이들 품목에 대한 수출규제 및 수출 화이트리스트(수출절차 간소화 국가) 배제 조치는 일본의 소재와 부품에 의존하는 한국 산업들의 생산과 수출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견되었다. 우리나라 입장에서 소재·부품·장비 분야는 수출액 3409억불, 수입액 2034억불(2018년 기준)로 1300억불이상 무역흑자를 내고 있는 분야이나, 기술자립도가 낮고 해외의존도가 높은 구조적 취약성을 가지고 있다. 특히 일본 의존도가 높아 2018년도 대일무역적자 241억 달러 가운데 소재·부품·장비가 224억불로 압도적인 적자를 기록한 바 있다.
이처럼 소재·부품·장비산업이 우리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으로 인해 우리경제 전체에 비상주의보가 내려졌고, 정부, 민간, 국회 할 것 없이 대책 마련에 분주했다. 일본의 핵심소재 및 부품에 대한 전격적인 수출배제 조치는 제조생산의 52%를 차지할 정도로 폭발적인 성장을 해왔던 우리나라의 부품·소재산업의 취약성을 지렛대로 이용해 정치적 이익을 취할 목적으로 행해졌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하지만 6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는 대기업들의 수입선 다변화 노력, 중소기업과의 공동 연구개발 활성화 등의 대책에 힘입어 큰 문제없이 대응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제는 왜 이러한 사태가 발생했는지, 향후 이러한 문제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정책들이 필요한지를 체계적으로 고민하고 대응하기 위한 태세를 만들 필요가 있다.
핵심소재·부품 영역의 취약한 경쟁력 : 그 원인과 변화의 필요성
자동차 부품과 다르게 반도체용 핵심소재와 장비는 국산화가 미비하여 일본과 미국으로부터의 수입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2017년 기준 우리나라의 반도체 장비 국산화율은 18.2%이고 소재 국산화율은 50.3% 정도이다. 화학분야에서의 핵심소재도 마찬가지 상황이다. 우리나라가 전반적으로는 소재·부품·장비 분야가 경쟁력을 가지고 있고 제조생산이나 수출에 많은 기여를 하고 있지만, 핵심소재나 부품 영역으로 들어가면 경쟁력에 있어 상당한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이러한 문제가 생긴 이유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이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완성품 중심의 성장전략을 추구했다는 것이다. 반도체나 화학의 특성상 부품·소재의 경우는 기초연구와 개발연구에 의한 기술경쟁력이 매우 중요하다. 이 분야에서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많은 투자가 필요하고 핵심 인력 양성에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 특히 장비의 경우는 오랜 시간에 걸친 숙련도와 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에 이를 새로 개발하여 사용하는 것은 경제적이지 않다. 따라서 빠르게 변화하는 반도체시장에서 경쟁우위를 가지기 위해서는 부품 국산화보다는 안정적인 품질을 유지하고 있는 해외 부품·소재를 시장에서 구매해 사용하면서 완성품 R&D나 제조 혁신을 중심으로 운영하는 것이 유리했다.
둘째는 글로벌 가치사슬의 안정성에 대한 과도한 믿음이다. 2차 세계대전이후 세계는 일부 국지전을 빼고는 매우 안정적이었고, 미국이 세계 초강국으로 등장하여 독주체제가 시작된 이후에는 국제적 차원의 전쟁에 대한 별다른 불안이 없었다. 최근 들어 미국이 자국 우선주의를 기반으로 다양한 국가들과 경제전쟁이나 군비경쟁을 하면서 불안감이 높아지고 있다. 세계경제 또한 몇 번의 석유 파동을 제외하고는 지속적인 성장을 거듭해 왔다. 이런 상황에서 글로벌 공급사슬의 안정성은 믿음이 됐고, 기업들이 보다 싼 가격에 양질의 제품이나 서비스를 획득하고자 추구해왔던 오프쇼어링을 통한 아웃소싱이 일반화되었다. 특히, 수출부터 시작해서 자본과 사람의 이동이 보장되는 글로벌화의 진전은 핵심소재·부품을 안정적인 해외업체로부터 공급받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는 믿음을 주기에 충분했다.
셋째는 반도체나 화학산업에서 한번 사용하면 바꾸기 어려운 소재·부품의 특성이다. 국내 반도체기업들은 이미 오랜 기간 노하우를 축적한 일본이나 미국 회사들에 의존해 왔기 때문에 이러한 소재나 부품을 바꾸는 것은 제품의 품질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국내 중소기업이나 중견기업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소재를 개발해도 테스트할 방법이 없었고, 테스트를 할 수 없는 경우에는 대기업이나 완성품 제조기업이 구매하는 것을 기대할 수 없었다. 여기에 더해, 소재나 부품, 장비를 제조하는 중소·중견기업의 경우에는 완성품을 생산하는 대기업에 비해 더욱 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중소·중견기업의 경우는 완성품 제조기업인 대기업에서 연구개발하고 디자인한 소재나 부품을 대기업이 원하는 대로 만들어 납품하면 되기 때문에 특별히 연구개발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고, 제품 제조과정의 생산성 향상에만 주력하면 되었다. 따라서 이들의 연구개발 능력이나 엔지니어링 능력은 글로벌 경쟁을 하기에 매우 취약한 상태가 되었다. 중소기업의 매출액 대비 연구개발 투자는 0.7%(2017년 기준)이고 중견기업의 매출액 대비 연구개발비 비중이 1.05%인 점을 보면 이러한 문제가 잘 드러난다.
중소·중견기업의 연구개발역량과 관련해서 중요한 사실은 해외 중소·중견기업들이 50~70편의 산학 협력 논문을 발표하는데 반해서 우리나라의 중견 기업은 2~3편이거나 산학 연구 논문 자체가 없는 기업도 다수 있다는 것이다. 중국의 경우만 해도 대학과 기업이 공동 출원한 특허가 많이 있는 반면, 한국 중견기업은 매우 제한적인 협력만 수행하고 있다. 최근 들어 해외 경쟁 기업들은 첨단 소재, 인공지능, 정보통신기술 등 다양한 기술 도입으로 자사 제품의 경쟁력 강화에 힘쓰고 있지만, 한국 중소·중견기업들은 원가절감, 생산성 향상을 위한 기술혁신만을 추구하고 있으며 신기술 혁신은 일부에 국한되어 있다.
요약하면, 한국의 소재·부품·장비산업의 취약성은 완제품 중심 성장전략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무조건 나쁘다고 비판할 수는 없으나, 현재의 상황변화는 기존의 성장경로를 심각하게 다시 설정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지금의 국제환경은 테러리즘의 글로벌 확산, 무력에 의한 전쟁 발발 가능성의 확대, 수출과 외환관리를 둘러싼 경제분쟁, 금융위기 등 다양한 국제분쟁이 일상화 되고 있고, 이러한 현상을 정상적인 상황(new normal)으로 정의할 만큼 불확실성이 일상화하고 있다. 이를 VUCA(변동성 volatility, 불확실성 uncertainty, 복잡성 complexity, 모호성 ambiguity)시대라고 정의한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기존의 수직적 협력관계를 중심으로 한 산업생태계와 안정성에 대한 믿음을 중심으로 한 글로벌 밸류체인은 더 이상 효율적 생산과 효과적 경영을 위한 대안이 될 수 없다. VUCA시대에는 변화에 대응하고 위기상황에서 회복할 수 있는 탄력성을 가진 혁신적 산업생태계 구축이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우리나라 소재·부품·장비 분야의 위기극복과 안정적인 성장을 위해서는 새로운 혁신적 산업생태계의 구축이 필요하다.
핵심소재·부품 영역의 경쟁력 확보 대안
일본의 전략물자 수출규제는 핵심소재·부품이 언제든지 국가간 전쟁 무기로 돌변할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 불확실성이 일상화된 뉴노멀 시대에는 기존처럼 글로벌 가치사슬의 안정성에 지나치게 의존했다가 경쟁력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을 가능성이 커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디지털변혁이라는 새로운 경제패러다임 시대를 맞아 핵심소재·부품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형태의 산업생태계 구축을 위한 노력은 기업의 경쟁력 뿐만 아니라 국가 경쟁력 확보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새로운 산업생태계를 구축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첫째는 대기업들이 국내 중소기업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꿔야 하고 이를 토대로 혁신적인 산업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 대기업들은 지금까지 국내연구자들의 성과나 중견기업들의 연구성과에 별로 관심도 없었고 무시하는 듯한 행태를 보여왔다. 이른 바 자사 제일주의이다. 혁신생태계 구축에 가장 중요한 것은 국내에도 좋은 기술이 많이 있고 이를 잘 육성하면 해외연구자들이나 기업들보다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현대자동차가 자동차부품재단을 만들고 수십년간 국산화 노력을 기울여 왔듯이, 대기업들이 중소기업들을 지원하여 공동으로 부품·소재를 개발하고, 특허권을 공동소유·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생태계 확장에 중요하다. 특히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공동 연구개발을 통해 만들어진 특허를 활용하여 만들어진 제품이나 기술을 일정기간 이후 중소·중견기업이 자신의 비즈니스 개발에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도 고려되어야 한다. 이러한 조치는 기존의 전속거래제도와 같은 수직적이고 구속적 거래관계를 깨는 것이라서 상당한 어려움을 감내해야 하지만, 수직적이고 위계적인 관계를 수평적 관계로 만들어 내는 것은 중소·중견기업들이 스스로 혁신하고 경쟁력을 가지게 되는 첫걸음이기 때문에 이를 실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물론 공동특허를 활용하여 얻어진 수익을 중소기업이 대기업에 환원하는 절차를 만드는 것도 공정한 거래프랙티스를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둘째는 공공 테스트베드의 구축과 운영이다. 신제품이나 기술이 나왔을 때 상용화 테스트와 신뢰성 확보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이는 많은 투자를 필요로 한다. 대기업도 혼자서 하기 어려운데 중소 ·중견기업에 혼자서 테스트베드를 구축해서 신제품이나 기술을 검증하라고 하는 것은 하지 말라는 것과 다름없다. 대기업의 지원이 필수적이다. 특정 대기업이 협력업체를 위해 혼자 힘으로 테스트베드를 구축할 수 없다면 정부와 대학이 적극적으로 관여하여 테스트베드를 구축하여야 한다. 개별 중소기업이나 중견기업에 연구개발 자금을 지원하는 것보다 집중적으로 투자하여 이러한 테스트베드를 구축하고 운영하는 것이 훨씬 더 효율적인 연구개발 지원이다. 이렇게 구축된 테스트베드를 정부가 운영하는 것보다는 이를 민간 기반의 비즈니스 서비스로 제공하는 것이 민간의 역량을 키우고 민간의 활력을 높일 수 있는 대안이 될 것이다.
셋째는 기술 및 제품의 표준화 노력이다. 글로벌화가 잘된 기업들의 매출액이나 영업이익률, 고용이 높은 점을 고려하면 글로벌시장을 겨냥한 신제품이나 신기술 개발이 필요하다. 중소·중견기업이 해외에 진출하기 가장 좋은 방법은 국제표준을 만들고 이 표준에 의거한 제품이나 기술을 만드는 것이다. 최근 우리나라의 표준화 노력은 적극적으로 국제표준에 관여하고 있는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많이 뒤처져 있다. 우리 정부가 지향하는 그리고 우리 기업들이 가장 잘하는 기술이나 제품 분야를 선정하여 적극적인 국제 표준화 노력을 해야 하고 이를 위해 표준화 관련 예산과 지원을 대폭 늘릴 필요가 있다.
넷째는 연구자와 중소·중견기업을 연결할 수 있는 연구개발전문 기관을 설립하고, 해당 연구 분야의 기술 상용화 연구개발 전반을 담당하게 하는 것이다. 이 기관은 독립채산제 기관으로 개별기업들에게 지원되던 연구과제를 통합하여 운영하게 되며, 연구원 인건비, 장비 등을 통합 관리하게 함으로써 규모의 경제를 이루게 되어, 좋은 인력을 영입할 수 있고, 연구과제 비용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연구개발전문 기관은 연구개발 및 엔지니어링 디자인 전문화를 통해 다양한 기업들에게 수준 높은 아웃소싱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연구과제의 성격에 따라 학교 및 기업으로 연구원을 파견하거나 이들 연구원들의 복귀를 유연하게 운영할 수도 있어, 양방향 인력 이동의 유연성을 제공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협업형 비즈니스모델 활성화를 면밀하게 검토해야 한다. 경쟁이 치열하고 기술의 변화가 빠른 지금과 같은 시기에는 한 개의 회사가 혼자서 모든 영역의 문제를 해결하기는 어렵다. 대기업도 전략적 제휴라는 형태로 협력을 강화하고 있는 마당에 자원이 부족한 중소·중견기업이 이러한 환경변화에 대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중소기업들이 부문별 핵심역량을 갖춘 파트너들과 확실한 사업운영 협약을 맺고, 각자가 전문적 역할을 수행하며, 기여도에 따라 이익을 공유할 수 있다면 규모의 경제, 범위의 경제, 전문성, 그리고 스피드를 확보할 수 있다. 협업형 비즈니스모델의 활성화는 여러 가지 장점을 제공한다.
첫째는 개별 기업이 가진 자금, 기술, 생산설비는 한정적이지만 공동 사업을 수행한다면 우선 자금과 투자가 생략되거나 최소화되고 대량으로 구매하거나 생산할 수 있어 규모의 경제 이점을 누릴 수 있다. 둘째는 다양한 시장과 제품을 가진 기업들이 협업을 선택한다면 하나 또는 두 개 정도의 제품이나 서비스를 제공하던 중소기업의 형태에서 훨씬 적은 비용과 노력으로도 다양한 제품군이나 서비스를 고객에게 제공할 수 있어 범위의 경제를 달성할 수 있다. 셋째는 각 회사가 가진 전문적 역량들을 하나로 묶게 됨으로써 기업 전체 혹은 사업 전체에 필요한 각 분야의 전문성을 확보하게 된다. 넷째는 다양한 고객과 지식을 보유한 가진 기업들이 결합하여 협업을 수행하게 됨으로써 빠르게 혁신이 일어나고 시장에 진입할 수 있다. 따라서 고객확보에 들어가는 시간과 비용, 신제품이나 서비스의 개발에 들어가는 비용과 시간을 줄여 시장에 진입하는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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