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하지만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살기 위해 죽을 수도 있는 방법을 택하는 사람들이 드물지 않은 시절이다. 작년 여름 평택에서 일어난 사건들만 해도 그랬다.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피하지 않았던 쌍용차 파업노동자들은 사망 직전 겨우 살아났지만 다시 '죽을 처지'들이 되었다. 이들은 어떤 심정으로 공장 옥상에 올라갔을까. 이 이야기를 새삼 들추는 것은 이 싸움의 결말을 알기 위한 수순이다.
싸움은 재발할 수밖에 없는 구조 속에서 시작되고 끝이 났다. 싸움에서 이들은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6명이 죽고 94명이 구속되고 125억원의 손해배상소송이 걸린 이 비극적인 싸움을 사진으로 기록했다.
그리고, "싸우자 투쟁"이라고 쓴 붉은 글씨 앞에 턱 괴고 앉았던 아이를 생각한다. 아이는 어디로 갔을까. 아이의 아빠는 어떻게 되었을까. 세상의 싸움을 일찍 배운 그 아이는 어떤 모습으로 다시 돌아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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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자동차 파업 사태, 지금은?
2009년 1월 9일 중국 상하이차는 인수 4년 만에 쌍용자동차 경영을 포기하고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유동성 위기가 이유였다. 법정대리인은 4월 8일 2646명의 인원을 감축하는 회생안을 내놓았다. 노조는 대규모 정리해고안을 반대하고 무급 순환휴직안을 내놓았다. 회사측은 들어주지 않았다.
노조는 경영 위기의 책임을 노동자에게만 전가시키는 회생안을 반대할 수 없다며 5월 22일 총파업을 선언했다. 회사는 정리해고를 강행하고 직장폐쇄로 맞섰다. 노사는 몇 차례 만났지만 협상은 결렬을 거듭했다.
파업은 77일 동안 대치했다. 8월 5일 경찰은 중무장한 공권력을 투입시켜 파업을 진압했다. 8월 6일 노조는 백기를 들고 협상테이블에 나왔다. 파업노동자 중 52%를 해고하고 나머지를 살려주겠다는 안이 합의됐다.
77일 동안 노조원 가족 2명을 포함해 모두 6명이 사망했다. 노조에는 125억원의 손해배상소송이 걸렸고, 94명이 구속됐다. 마지막 협상에서 고용을 보장받았던 640명(48%)중 44명은 징계 해고 됐고, 92명은 정직 등의 징계를 받았다. 150여명은 희망퇴직을 선택했다. 나머지는 노조가 맨 처음 주장하던 무급휴직 중이다.
회사를 떠난 노동자 대부분은 취업에 실패하고 임시직이나 일용직으로 전락했다. 쌍용자동차에는 회사를 대변하는 노조가 들어섰다. 어느 단체에도 가입하지 않은 '독립 노조'다. 공장의 노동강도는 17잡(job)에서 22잡(job)으로 강화됐다. 한 사람이 감당하는 일의 수가 30% 증가한 것이다.
해고노동자들은 정리해고특별위원회를 꾸려 복직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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