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헤게모니의 종말은 이미 시작됐으며 미국은 이제 불시착한 독수리일 뿐이다."
세계적 석학이자 미국 좌파 지식인의 선두 주자인 이매뉴얼 월러스틴에게 비쳐진 미국의 현주소다.
미국은 이라크 침공을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명분으로 시작했지만 전쟁 구실이었던 대량살상무기(WMD)는 있지도 않았고 팔루자 학살과 충격적인 이라크 포로 성고문과 학대로 '더러운 전쟁'으로 바뀐지 오래다. 이같은 더러운 전쟁을 시작한 미국을, 월러스틴은 '불시착한 독수리'로 그려내 파산선고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그에게 미국은 "진정한 힘을 결여한 외로운 초강대국, 추종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존경하는 사람마저 거의 없는 세계적 지도자, 그리고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전지구적 혼돈의 와중에서 위험스럽게 표류하고 있는 나라"일 뿐이다.
이에 따라 이제 미국은 나머지 모든 인류에게 점점 더 위험스러운 존재로 변해가고 있으며 그런 만큼 쇠퇴하는 미국의 힘을 어떻게 제어하고 관리할 것인지 하는 문제는 미국인들뿐 아니라 지구촌 모든 주민의 운명과 직결돼 있는 문제라는 분석이다.
***"9.11사태, 미국의 쇠퇴와 허약성 보여주는 최종적인 상징이자 증거" **
월러스틴의 신간 <미국 패권의 몰락 : 혼돈의 세계와 미국>(한기욱, 정범진 옮김. 창비 펴냄)은 공산주의의 붕괴를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승리라기보다는 그 적수가 사라짐으로써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할 근거를 상실했다고 분석(<자유주의 이후>)했던 월러스틴답게 독특한 시각으로 미국 패권의 몰락을 긴 역사적 관점에서 조망해내고 있다.
그는 기본적으로 세계체제론적 분석과 진단을 하고 있다. 즉 미국 중심의 현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이미 그 최종단계의 구조적 위기에 봉착했으며 현재 우리는 몰락하는 체제와 향후 새롭게 형성될 체제 사이의 혼돈스러운 세상에 살아가고 있다고 인식하고 있다.
이 인식하에서 그는 미국이 누렸던 세계적인 헤게모니를, 1873년 전세계 경기침체와 더불어 본격적으로 시작된 긴 과정으로 파악하고 전후시기 미국이 헤게모니 국가로 성공하면서 한편으로는 이 헤게모니가 소멸될 조건들을 창출했다고, 그 특유의 독특한 발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독특한 발상은 네 가지 상징들, 즉 베트남 전쟁, 1968년 혁명,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그리고 2001년 9.11 사태에 대한 월러스틴의 분석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베트남전쟁은 미국과 소련이 20세기 지정학적 억제력을 통해 세계를 통제한 얄타체제에 대한 제3세계의 거부인 동시에 미국의 경제력에 대한 심대한 타격이었다. 1968년 혁명은 미국 헤계모니에 대한 도전이자, 소련과 나아가서는 구좌파세력이 미국 헤게모니와 공모한 것에 대한 대중적 저항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로써 얄타합의의 정당성과 자유주의의 지위는 크게 손상됐다고 월러스틴은 보았다.
이후 1989년을 전후한 공산주의의 붕괴를, 그는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승리라기보다는 그 적수가 사라짐으로써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할 근거를 잃었음을 뜻한다고 보았다. 2001년의 9.11사태는 냉전이후 더욱 심화된 미국의 쇠퇴와 허약성을 보여주는 최종적인 상징이자 증거라고 월러스틴은 주장한다.
***"미국은 패전중"-"깊은 구렁 빠졌다면 구렁 그만 파라"**
월러스틴에게 미국의 아프간이나 이라크 침공은 바로 이 미국 헤게모니가 기울고 있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극적인 증거물이다.
미국은 아프간이나 이라크 같은 주변부 독재국가들을 제압하기 위해 동맹국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엄청난 규모의 군사력을 동원했는데 이점이야말로 미국의 헤게모니가 쇠퇴한 증거라는 것이다.
미국이 명실상부한 헤게모니국가라면 유엔은 물론 유럽을 비롯한 전세계 동맹국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이끌어내어 정치 외교적 힘만으로도 충분히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며, 볼썽사납게 군사력을 휘두를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다.
한마디로 미국은 전성기때의 압도적인 정치력과 경제력을 모두 상실하고 이제는 오로지 막강한 군사력만으로 초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월러스틴의 논지이다. 이런 맥락에서 부시 행정부의 대외정책을 주도한 매파의 군사 패권주의적 모험도 미국 패권의 쇠퇴를 반전시키려는 안간힘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에 따라 현재 "미국은 패전중"이다. 책 후기에 덧붙여 있는 이 제하의 글은 그가 페르낭 브로델 센터(http://fbc.binghamton.edu)에 올리는 글 가운데 2004년 주요 사건들에 대한 논평 가운데 하나로 2004년 여름 미국의 상황을 적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월러스틴은 이 글에서 "깊은 구렁 속에 빠져 있다면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구렁을 그만 파는 것이라는 예로부터의 명언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라크를 침공한 미국에 대한 뼈아픈 지적이다.
이에 따라 저자는 "다음 10년동안 세계적 사건을 결정하는 미국의 힘은 계속 쇠퇴할 것이라는 데는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다"며 "진짜 문제는 미국의 헤게모니가 이울고 있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미국이 세계와 자신한테 최소한의 손상만 입히고 우아하게 하강하는 길을 찾느냐 아니냐"라고 설파하고 있다.
***"이라크전, 쇠퇴한 미 국력의 증거물". 월러스틴, 세계사회포럼에 주목하기도**
이 책이 보다 주목을 받을 만한 이유는 근대 세계체제에 대한 월러스틴의 사유가 특유의 냉철함과 명석함을 유지하되 9.11이라는 의미심장한 사건을 계기로 좀더 적극적이고 실천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자신이 오래전부터 수행해온 논의들, 즉 인종차별주의, 이슬람운동, 사회과학의 쇄신, 민주주의, 지구화, 미국의 헤게모니, 20세기, 반체제운동 등에 대한 분석을 체제이행기의 실천적 과제와 연관지으며 이 책의 2부, "다양한 수사와 현실들"에서 엄밀히 검토하고 있다.
책의 3부, "우리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에서는 저자는 역사상 실재한 좌파운동들의 이론과 실천을 검토하고 그 공과를 평가하면서 당면한 체제 이행기에서 참다운 반체제운동의 의미와 그 실천적 과제를 끌어낸다. 그러면서 그는 세계사회포럼(WSF) 운동에 주목을 하고 있기도 하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