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를 마감하는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연구전문가)의 12월, 제73강은 <송년특집>으로 수원·오산·화성고을로 갑니다. 세 고을을 둘러보게 되는데 서울에서 가까운 곳이라서 가능할 것 같습니다.
수원은 인문학습원에 <화성학교>가 있어 수원 화성은 제외하고 주로 생산력을 높이기 위해 축조된 저수지와 정조의 효심이 그윽한 융건릉과 용주사를 둘러보고, 오산과 화성은 삼국 초기 대륙으로 가는 길목으로 그때 축조된 관방시설을 둘러볼 예정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하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고을학교 제73강은 2019년 12월 22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 정시 출발하니 출발시각 꼭 지켜주세요.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온누리여행사)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73강 여는 모임.
이날 답사 코스는 서울-북수원IC-지지대고개-노송지대-수원향교-항미정-축만제-만석거-만년제-융건릉-용주사-궐리사-당성-서울의 순입니다.
*답사 도중에 점심식사 겸 뒤풀이가 있습니다.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답사 코스가 변경될 수 있습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73강 답사지인 <수원·오산·화성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수원, 지지대(遲遲臺)고개와 노송지대의 사연
수원(水源)은 중앙에는 팔달산(八達山)이 솟아 있고 북쪽에는 광교산(光敎山), 서쪽에는 여기산(麗妓山), 남동쪽에는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습니다. 물줄기는 광교산에서 발원한 수원천이 수원시를 관통하고 있습니다.
수원은 고구려 때는 매홀군(買忽郡), 통일신라 경덕왕 때는 수성군(水城郡)이라고 하였으며, 고려시대 성종 때는 도단련사(都團練使)를 두었고, 1018년(현종 9)에는 수주지사(水州知事)를 배치하였고, 1271년(원종 12)에 수원도호부로 고쳤으며, 1310년(충선왕 2) 수원부가 되었다가 1362년(공민왕 11)에는 군으로 환원되었습니다. 조선시대 1413년(태종 13)에 다시 도호부로 고쳐지고, 세조 때는 한성을 수호하는 4진(鎭) 중의 하나로 삼았고 1793년 수원유수부로 바뀌었습니다.
지지대(遲遲臺)고개는 수원과 의왕의 경계 지점에 위치한 고개로 <화성지>에 따르면 원래는 사근현이었는데 정조가 '미륵현' 그 후에 다시 '지지현(遲遲峴)'으로 고쳤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근현(沙近峴)이라고 한 것은 고개 아래에 사근참이 있었기 때문이며 '지지(遲遲)'라고 한 것은 사도세자 능을 참배하고 돌아갈 때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하여 이곳에서 한참 지체하였던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정조는 이곳에 장승과 표석을 세웠고, 1807년(순조 7)에 지지대 서쪽에 지지대비와 비각을 건립하였습니다.
노송지대는 지지대고개에서 수원 쪽으로 약 5㎞에 걸쳐 오래된 소나무들이 울창하게 늘어서 있는 곳을 일컫는데 1790년경 정조에 의하여 조성된 것입니다. 1789년 10월 현릉원을 화성군에 있는 화산(花山)으로 옮기면서 왕릉의 규모로 조영하고, 이름도 융릉(隆陵)으로 고쳤으며 그 후 자주 이곳을 찾았던 정조는 융릉의 식목관에게 내탕금(內帑金) 1,000냥을 하사하여 소나무 500주와 능수버들 40주를 심게 하였다고 합니다. 지금은 대부분 늙어서 죽고 110주 정도의 노송만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수원향교는 1291년(고려 충렬왕 17년) 당시 수원의 읍치지역은 화성시 봉담읍 와우리 화산 앞에 세워졌습니다. 그 후 1789년(정조 13) 정조가 부왕인 사도세자의 원침(園寢)을 양주 배봉산에서 현재의 화산으로 장하기 위하여 수원읍치를 팔달산 아래로 옮길 때 현재 위치로 함께 이건하였습니다. 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한 5성과 동국 18현, 송조 2현 등 모두 25위의 위패가 모셔져 있습니다. 향교 앞에는 하마비와 홍살문이 있으며 외삼문, 명륜당, 내삼문, 동무, 서무, 대성전 등의 건물이 있습니다.
정조의 신도시 건설
정조는 사도세자의 영우원(永祐園)을 수원시 화산 아래로 옮기고 기존의 수원읍치를 현재의 수원성으로 옮겨 신도시를 조성할 때 신읍의 경영을 위한 경제적 기반의 확보와 백성들의 생활 안정을 목적으로 둔전(屯田)의 설치와 관개용수를 위한 제방을 쌓는 일, 상권에 대한 보호, 식림사업(植林事業) 등 여러 가지 정책적인 배려를 하였는데 이때 동서남북에 네 개의 호수[四湖]를 함께 축조하였습니다.
북지(北池)는 수원성 북문 북쪽에 위치한 일명 만석거(萬石渠)로 1795년에 완성한 속칭 조기정방죽을 가리킵니다. 남지(南池)는 만년제(萬年堤)라 하여 1797년에 화산 남쪽의 사도세자 묘역 근처에 시설한 것입니다. 동지(東池)는 수원시 지동에 위치하였다고 하나 현재는 형체를 알 수가 없습니다. 서지(西池)는 여기산(麗妓山) 아래 있는 축만제(祝萬堤)로 달리 서호(西湖)라고 불립니다.
축만제는 당시 최대 규모의 관개 저수지
축만제는 천년만년 만석의 생산을 축원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1799년(정조 23)에 당시로서는 최대 규모로 조성된 관개 저수지로 수원 화성의 서쪽에 있어 일명 서호(西湖)라고도 불리는데 내탕금 3만 냥을 들여 축조하였다고 합니다. 문헌상 제방의 길이가 1,246척, 높이 8척, 두께 7.5척, 수심 7척, 수문 2개로 되어 있습니다. 보수 관리는 축만제둔(祝萬堤屯)을 설치하여 도감관(都監官)·감관(監官)·농감(農監) 등을 두어 관수와 전장관리를 맡게 하였습니다.
항미정(杭眉亭)은 축만제의 남동쪽에 있는 정자로 1831년(순조 31) 당시 화성 유수였던 박기수가 세웠고, 그 뒤 유수 신석희와 관찰사 오익영이 중수하였습니다. 화강암으로 2층 기단을 쌓은 다음 초석 위에 각주를 세웠으며, 천장은 연등천장입니다. 정자의 이름은 '항주(杭州)의 미목(眉目)'이라는 소동파의 시(詩)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1908년 순종이 융·건릉을 방문하고 돌아갈 때 잠시 쉬어간 정자로 유서 깊은 곳입니다.
만석거는 수원에서 가장 오래 된 저수지
만석거(萬石渠)는 수원에서 가장 오래된 저수지로 정조 때 축조한 이후 대유평이란 국영농장에 농업용수를 제공해 주면서 조선후기 농업혁명의 산실이 되었습니다. 당시 전국적인 가뭄을 극복하고 수원화성 내탁에 필요한 흙을 조달하기 위해서 1795년 3월 1일부터 5월 18일까지 만들었습니다. 만석거를 축조한 이후 호수 남쪽 언덕에 영화정을 지었습니다. 정조는 수원화성을 축성한 이후 화성 춘8경과 추8경을 정했는데 국영농장인 대유평에 벼가 누렇게 익은 모습을 추8경 중 석거황운(石渠黃雲)이라 했고 만석거에서 뱃놀이 하는 풍광은 춘8경 중 하정범일(荷汀泛鷁)이라 했습니다.
만년제(萬年堤)는 현륭원 남쪽 3리쯤 떨어진 곳에 있는데 동서남북의 사방으로 둑을 쌓고, 둑 위해 버드나무와 소나무를 심거나 떼를 입혔고, 은구(隱溝)를 설치하였으며, 경비는 내하전(內下錢) 6,000냥으로 충당하였습니다. 만년제는 이전부터 있었던 방축수(防築藪)라는 제언을 1795(정조 19)년에 개축한 것으로, 1798년의 공사가 신축공사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나 공사비와 규모가 훨씬 확대되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만년제의 축조는 정조의 명으로 이루어진 1798년(정조 22)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화성(華城)=이 땅을 풍요의 고을로 만들어 여민동락(與民同樂)하겠다
‘화성(華城)’의 지명은 1794년(정조 18) 정조가 수원부 읍치와 현륭원을 위호할 성곽의 터를 둘러보면서 장자(莊子)의 ‘화인축성(華人祝聖)’이라는 고사를 생각하며 붙인 이름으로, 이 땅을 풍요의 고을로 만들어 여민동락(與民同樂)하겠다는 정조의 의지가 담긴 것으로 보입니다.
화성의 지세는 산줄기는 한남정맥이 높낮이를 낮게 하여 지나가고 있으며 동북쪽으로 비교적 산세가 깊은 산지를 형성하고 중앙은 구릉지대가 서쪽으로는 평야지대를 이루고 남양반도와 조암반도가 서해안을 향해 돌출되어 있으며 물줄기는 황구지천, 발안천이 이곳 평야지대를 촉촉히 적셔주고 평택항을 통해 서해로 흘러듭니다.
화성, 당성 중심 서해 해상교통로의 요충
화성은 원삼국시대 마한의 54개 소국 중 3개(원양/모수/상외)의 소국에 위치했고 고구려 시기에는 ‘당성’과 ‘매홀’로 편제되었고 757년(경덕왕 16) 당은군(당성), 수성군(매홀)으로, 940년(태조 23) 당성군과 수주로 개편되었으며, 1413년(태종 13) 남양도호부, 수원도호부 설치하였고 1793년(정조 17) 수원도호부를 화성유수부로 승격하였습니다. 1895년(고종 32) 남양군, 수원군으로 개편, 1949. 08. 15. 화성군으로 개편, 수원읍은 시로 승격 분리되었습니다.
당성(唐城)은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에 있는 구봉산(165m) 정상부에 있으며, 달리 당항성(黨項城)이라고도 하며 시대를 달리하는 테뫼식과 포곡식이 결합되어 축성된 복합식 산성으로 둘레는 1,200m입니다. 성벽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에 걸쳐 축조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외성지로 알려진 성을 중심으로 망해루지(望海樓址)를 포함하여 둘레 400∼500m의 테뫼식 석축성벽이 먼저 축조되었고 이후 현재 본성으로 알려진 토석 혼축의 성으로 확장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성의 확장 시기는 당성이 이 지역의 중심으로 기능이 강화될 때부터로 보이며, 출토되는 유물의 양상으로 미루어 통일신라시대로 추정됩니다. 건물지는 성내의 가장 넓은 평탄대지에서 방형의 유구를 비롯한 온돌구조와 배수시설 등 8개소의 유구가 조사되었지만, 유구들이 훼손되어 정확한 구조는 알 수가 없습니다.
당성은 본래 백제 지역이었으나, 475년에 고구려 장수왕이 한성백제를 점령하면서 당성군(唐城郡)이라고 하였고 551년에 신라 진흥왕이 한강유역을 점령하여 이곳을 차지한 이후 통일신라시대인 757년에 당은군(唐恩郡)으로 개칭하였으며, 829년에는 군사적인 거점으로서 당성진(唐城鎭)이 설치되었습니다. 통일신라시대에도 많은 사신과 승려들이 당성을 통하여 중국에 왕래하며 활발한 교류활동을 전개하였고, 중국으로부터 불교와 유교 등의 발달한 문화가 신라에 전래되면서 사상적·문화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당성은 인적·물적인 교류를 바탕으로 중국의 발달한 문화가 한반도로 들어오는 첫 번째 창구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당성 주변에는 많은 관방유적이 위치하고 있어 당성을 중심으로 하는 서해 해상교통로의 중요성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마도면 백곡리에 백곡리토성(白谷里土城)이 있고, 서신면 광평리 성밖 마을의 북쪽 구릉에서 남양동까지는 남양장성이 있으며 남양반도 내에는 청명산성(淸明山城), 용두리성(龍頭里城), 화양진성(華梁鎭城) 등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당성은 서해상의 여러 섬들을 관찰할 수 있고 남으로는 태안반도의 산줄기들이 조망되는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로 특히 삼국시대에는 중국과의 교섭이 이루어지는 출발점이었기 때문에 그 중요성이 더욱 컸습니다. 551년에 신라는 이 지역을 확보하여 중국과의 직접적인 교섭을 함으로써 이후 삼국통일을 이룩할 수 있는 중요한 기반을 마련하였습니다.
융릉과 건릉
융릉(隆陵)은 추존 장조의황제와 헌경의황후 홍씨의 합장릉입니다. 1789년(정조 13)에 배봉산에서 현재의 자리로 옮기면서 현륭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원을 다시 조성하였습니다.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와 어로, 수라간, 정자각, 비각이 배치되어 있고 비각 안에는 조선시대와 대한제국 시대에 세운 두 기의 표석이 있습니다. 능침은 난간석을 생략하고 병풍석만 둘렀으며, 인석은 연꽃형태로 조각하였습니다. 특이하게 문석인이 복두를 쓴 일반적인 왕릉형식이 아닌 금관조복을 입고 있습니다.
1762년(영조 38)에 장조(사도세자)가 아버지 영조의 명으로 뒤주 속에 갇혀 세상을 떠나자, 현 서울 동대문구 배봉산 아래에 안장하고 수은묘(垂恩墓)라 하였으며, 1776년에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장헌세자라는 존호를 올리고 묘를 원으로 격상하여 영우원(永祐園)이라 하였습니다. 1789년(정조 13)에 원을 현재의 화산으로 옮기면서 현륭원(顯隆園)이라 하였습니다. 1815년(순조 15)에 헌경의황후(혜경궁) 홍씨가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인 1816년에 현륭원에 합장으로 원을 조성하였고 1899년(광무 3)년에 사도세자가 추존되자 능으로 격상되어 융릉이라 하였습니다.
건릉(健陵)은 정조선황제와 효의선황후 김씨의 합장릉입니다.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와 어로, 수라간, 정자각, 비각이 배치되어 있으며 능침은 융릉과 비슷하지만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그 밖에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 등을 배치하였습니다. 1800년(정조 24)에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 장조의 현륭원(융릉) 동쪽 언덕에 능을 조성하였으나 순조가 왕위에 오른 후 건릉 불길론이 있었고, 1821년(순조 21)에 효의선황후 김씨가 세상을 떠나자 현륭원 서쪽 언덕으로 천장하여 합장릉의 형태로 능을 조성하였습니다.
용주사,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 위해 세운 사찰
용주사(龍珠寺)는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만든 사찰로 본래는 이 부근에 갈양사(葛陽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합니다. <갈양사사적기>에 의하면 고려시대(10세기)에 확장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고려시대 고승들이 지방의 사찰을 '산소(山所)'로 정하고 거기에서 말년을 보낸 전통이 있었으므로, 갈양사도 그러한 절이었을 것으로 보이며 고려의 고승인 혜소가 갈양사를 자신이 거처할 장소로 삼았다가 후대로 내려와 언제인가 망해서 폐사지가 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1779년에 정조가 사도세자의 묘를 새로 조성하여 현륭원이라 하였고 1780년에는 현륭원에서 가까운 갈양사의 옛 터에 새로이 절을 지어 용주사라 하였습니다. 정조가 대웅보전 낙성식 전날 밤에 용이 여의주를 물어 승천하는 꿈을 꾸어 ‘용주사’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용주사 창건은 정조가 직접 명하여 국가공사로 이루어졌으며, 비용도 중앙 및 지방의 관가로부터 충당하였는데 숭유억불이 기본인 조선시대에는 상당히 이례적인 사례입니다.
오산 궐리사(闕里祠)의 전해오는 이야기
오산(烏山)은 고구려 때 매홀군이었다가 신라 757년(경덕왕 16)에는 수성군, 고려 1310년(충선왕 2)에는 수원군이 되었고 1914년 수원군 성호면, 1949년 화성군 오산면, 1960년 오산읍으로 승격, 1989년에는 오산시로 승격하였습니다.
독산성(禿山城)은 축성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기록에 의하면 원래 백제가 쌓았던 성이며, 통일신라와 고려를 거쳐 임진왜란 때까지 계속 이용되었던 곳으로, 도성의 문호와 관련된 전략상의 요충지입니다. 1593년 7월에 전라도관찰사 겸 순변사였던 권율이 근왕병(勤王兵) 2만 명을 모집하여 북상하다가 이 성에 진을 치고 왜적을 물리쳤던 곳으로 유명합니다. 이듬해 9월 11일부터 14일까지 불과 4일 만에 백성이 합심하여 수축을 하였는데 이와 같은 독산성의 예는 이웃에 모범을 보여 금지산성(衿之山城)에서도 군량을 모으고 병사를 훈련시켰으며, 이어 월계산성(月溪山城)과 파사성(婆娑城)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이 성의 중요성이 강조되자 1602년(선조 35) 변응성(邊應星)이 수축하고, 1796년(정조 20) 수원성의 축조와 함께 개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현재 성에는 석축 약 400m와 4개의 성문이 남아 있습니다.
세마대(洗馬臺)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 오고 있습니다. 1593년 권율 장군이 주둔하고 있을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끈 왜군이 이 벌거숭이산에 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물 한 지게를 산위로 올려 보내 조롱하였으나 권율은 물이 풍부한 것처럼 보이기 위하여 백마를 산 위로 끌어올려 흰 쌀을 말에 끼얹어 목욕시키는 시늉을 하였습니다. 이를 본 왜군은 산꼭대기에서 물로 말을 씻을 정도로 물이 풍부하다고 오판하고 퇴각하였다고 합니다.
오산 궐리사(闕里祠)는 본래 조선 중종 때의 문신으로 경기도관찰사 등을 지낸 공서린(孔瑞麟)이 서재를 세우고 후학들에게 강의를 하였던 곳으로 그 당시 뜰 안 은행나무에 북을 달아놓고 문하 제자들에게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도록 깨우치며 교수하였는데, 그가 죽은 뒤 그 나무가 자연 고사하였다고 합니다. 그 뒤 정조가 화산(花山)에서 남쪽 멀리 바라보니 많은 새들이 슬피 울며 모여들므로 괴이하게 여겨 그곳에 행차해 보니, 죽었던 늙은 은행나무에 싹이 트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연유로 1792년(정조 16) 이곳에 사당을 짓게 하고, 공자가 살던 곳의 이름대로 지명을 궐리로 고쳤습니다. 궐리사는 공자의 영상을 봉안한 영당(影堂)으로 노성, 강릉, 제천, 오산에 있었으나 현재는 노성과 오산에만 남아 있습니다.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풀숲에선 반드시 긴 바지), 모자, 장갑, 선글라스, 스틱, 식수, 버프(얼굴가리개),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실손보험 미가입자는 반드시 여행자보험에 가입하여 만일의 상황에 대비하세요.
*환경 살리기의 작은 동행, 내 컵을 준비합시다(일회용 컵 사용 줄이기)^^
<참가 신청 안내>
★포털사이트 검색창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해 홈페이지로 들어오세요. 유사 '인문학습원'들이 있으니 검색에 착오없으시기 바라며, 반드시 인문학습원(huschool)을 확인하세요(기사에 전화번호, 웹주소, 참가비, 링크 사용을 자제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 이리 하니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홈페이지에서 '학교소개'로 들어와 '고을학교' 12월 기사를 찾으시면 기사 뒷부분에 상세한 참가신청 안내가 되어 있습니다^^
★인문학습원 홈페이지를 방문하시면 참가하실 수 있는 여러 학교와 해외캠프들에 관한 정보가 있으니 참고하세요. 회원 가입하시고 메일 주소 남기시면 각 학교 개강과 해외캠프 프로그램 정보를 바로바로 배달해드립니다^^
★고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은 우리의 ‘삶의 터전’인 고을들을 두루 찾아 다녔습니다. ‘공동체 문화’에 관심을 갖고 많은 시간 방방곡곡을 휘젓고 다니다가 비로소 ‘산’과 ‘마을’과 ‘사찰’에서 공동체 문화의 원형을 찾아보려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최근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마을만들기 사업>의 컨설팅도 하고 문화유산에 대한 ‘스토리텔링’ 작업도 하고 있으며 지자체, 시민사회단체, 기업 등에서 인문역사기행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에는 에스비에스 티브이의 <물은 생명이다> 프로그램에서 ‘마을의 도랑살리기 사업’ 리포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현재 한국도자재단 대표이사를 맡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고을학교를 열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사유방식에 따르면 세상 만물이 이루어진 모습을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의 유기적 관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때 맞춰 햇볕과 비와 바람을 내려주고[天時], 땅은 하늘이 내려준 기운으로 스스로 자양분을 만들어 인간을 비롯한 땅에 기대어 사는 ‘뭇 생명’들의 삶을 이롭게 하고[地利], 하늘과 땅이 베푼 풍요로운 ‘삶의 터전’에서 인간은 함께 일하고, 서로 나누고, 더불어 즐기며, 화목하게[人和] 살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땅은 크게 보아 산(山)과 강(江)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두 산줄기 사이로 물길 하나 있고, 두 물길 사이로 산줄기 하나 있듯이, 산과 강은 영원히 함께 할 수밖에 없는 맞물린 역상(逆像)관계이며 또한 상생(相生)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산과 강을 합쳐 강산(江山), 산천(山川) 또는 산하(山河)라고 부릅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山自分水嶺]”라는 <산경표(山經表)>의 명제에 따르면 산줄기는 물길의 울타리며 물길은 두 산줄기의 중심에 위치하게 됩니다.
두 산줄기가 만나는 곳에서 발원한 물길은 그 두 산줄기가 에워싼 곳으로만 흘러가기 때문에 그 물줄기를 같은 곳에서 시작된 물줄기라는 뜻으로 동(洞)자를 사용하여 동천(洞天)이라 하며 달리 동천(洞川), 동문(洞門)으로도 부릅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산줄기에 기대고 물길에 안기어[背山臨水] 삶의 터전인 ‘마을’을 이루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볼 때 산줄기는 울타리며 경계인데 물길은 마당이며 중심입니다. 산줄기는 마을의 안쪽과 바깥쪽을 나누는데 물길은 마을 안의 이쪽저쪽을 나눕니다. 마을사람들은 산이 건너지 못하는 물길의 이쪽저쪽은 나루[津]로 건너고 물이 넘지 못하는 산줄기의 안쪽과 바깥쪽은 고개[嶺]로 넘습니다. 그래서 나루와 고개는 마을사람들의 소통의 장(場)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희망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마을’은 자연부락으로서 예로부터 ‘말’이라고 줄여서 친근하게 ‘양지말’ ‘안말’ ‘샛터말’ ‘동녘말’로 불려오다가 이제는 모두 한자말로 바뀌어 ‘양촌(陽村)’ ‘내촌(內村)’ ‘신촌(新村)’ ‘동촌(東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듯 작은 물줄기[洞天]에 기댄 자연부락으로서의 삶의 터전을 ‘마을’이라 하고 여러 마을들을 합쳐서 보다 넓은 삶의 터전을 이룬 것을 ‘고을’이라 하며 고을은 마을의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서 이루는 큰 물줄기[流域]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을들이 합쳐져 고을로 되는 과정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방편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을’은 토착사회에 중앙권력이 만나는 중심지이자 그 관할구역이 된 셈으로 ‘마을’이 자연부락으로서의 향촌(鄕村)사회라면 ‘고을’은 중앙권력의 구조에 편입되어 권력을 대행하는 관치거점(官治據點)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을에는 권력을 행사하는 치소(治所)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를 읍치(邑治)라 하고 이곳에는 각종 관청과 부속 건물, 여러 종류의 제사(祭祀)시설, 국가교육시설인 향교, 유통 마당으로서의 장시(場市) 등이 들어서며 방어 목적으로 읍성으로 둘러싸여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읍성(邑城) 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통치기구들이 들어서게 되는데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중앙에서 내려오는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되는 객사, 국왕의 실질적인 대행자인 수령의 집무처 정청(正廳)과 관사인 내아(內衙), 수령을 보좌하는 향리의 이청(吏廳), 그리고 군교의 무청(武廳)이 그 역할의 중요한 순서에 따라 차례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의 교통상황은 도로가 좁고 험난하며, 교통수단 또한 발달하지 못한 상태여서 여러 고을들이 도로의 교차점과 나루터 등에 자리 잡았으며 대개 백리길 안팎의 하루 걸음 거리 안에 흩어져 있는 마을들을 한데 묶는 지역도로망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고을이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한 관계로 물류가 유통되는 교환경제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는데 고을마다 한두 군데 열리던 장시(場市)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장시의 전통은 지금까지 ‘5일장(五日場)’ 이라는 형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였던 교통중심지로서의 고을이었기에 대처(大處)로 넘나드는 고개 마루에는 객지생활의 무사함을 비는 성황당이 자리 잡고 고을의 이쪽저쪽을 드나드는 나루터에는 잠시 다리쉼을 하며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일 수 있는 주막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고을이 큰 물줄기에 안기어 있어 늘 치수(治水)가 걱정거리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물가에 제방을 쌓고 물이 고을에 넘쳐나는 것을 막았겠지만 우리 선조들은 물가에 나무를 많이 심어 숲을 이루어 물이 넘칠 때는 숲이 물을 삼키고 물이 모자랄 때는 삼킨 물을 다시 내뱉는 자연의 순리를 활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숲을 ‘마을숲[林藪]’이라 하며 단지 치수뿐만 아니라 세시풍속의 여러 가지 놀이와 행사도 하고, 마을의 중요한 일들에 대해 마을 회의를 하던 곳이기도 한, 마을 공동체의 소통의 광장이었습니다. 함양의 상림(上林)이 제일 오래된 마을숲으로서 신라시대 그곳의 수령으로 부임한 최치원이 조성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중앙집권적 통치기반인 군현제(郡縣制)가 확립되고 생활공간이 크게 보아 도읍[都], 고을[邑], 마을[村]로 구성되었습니다.
고을[郡縣]의 규모는 조선 초기에는 5개의 호(戶)로 통(統)을 구성하고 다시 5개의 통(統)으로 리(里)를 구성하고 3~4개의 리(里)로 면(面)을 구성한다고 되어 있으나 조선 중기에 와서는 5가(家)를 1통(統)으로 하고 10통을 1리(里)로 하며 10리를 묶어 향(鄕, 面과 같음)이라 한다고 했으니 호구(戶口)의 늘어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군현제에 따라 달리 불렀던 목(牧), 주(州), 대도호부(大都護府), 도호부(都護府), 군(郡), 현(縣) 등 지방의 행정기구 전부를 총칭하여 군현(郡縣)이라 하고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 등의 호칭도 총칭하여 수령이라 부르게 한 것입니다. 수령(守令)이라는 글자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을의 수령은 스스로 우두머리[首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왕의 명령[令]이 지켜질 수 있도록[守] 노력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물론 고을의 전통적인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만 그나마 남아 있는 모습과 사라진 자취의 일부분을 상상력으로 보충하며 그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신산스런 삶들을 만나보려고 <고을학교>의 문을 엽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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