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미국 사이의 방위비 분담금 협상 등 외교 현안에 대한 한국 의회의 입장을 전달하기 위해 미국 워싱턴 DC를 방문한 여야 3당 원내대표가 직면하게 된 문제는 트럼프 행정부의 한미동맹 '리뉴얼'이라는 큰 그림이다.
새로운 이슈는 아니다.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워 대통령이 된 트럼프 대통령이 줄곧 강조한 정치, 정책 노선이다. 미국이 한국 정부에 방위비 분담금으로 갑자기 5배나 인상된 '50억 달러'를 내라는 요구를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불쑥 내민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그 배경은 트럼프 대통령의 '아메리카 포스트' 노선이다.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 오신환 바른미래당 원내대표가 2박 3일 일정으로 미국을 찾아 스티브 비건 미 국무부 부장관 지명자(대북담당 특별대표) 등 국무부 관계자들을 만나서 전해 들은 미국의 입장은 "한미동맹의 재생(renewal)이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나경원 원내대표는 21일(현지시간) 워싱턴 정계 인사들과 면담 일정을 마친 후 가진 특파원들 간담회에서 "비건 대표가 1950년 이후 한미동맹의 '재생'이라는 표현을 썼다"며 "트럼프 정부는 단순히 한미 동맹만이 아니라 전 세계 동맹에 대해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거나 새로운 전략을 짜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오신환 원내대표도 "미국이 과거 수십년 동안 세계평화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했던 역할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며 "리뉴얼 이외에 리주버네이션(rejuvenation)이라는 단어도 썼는데 지금까지와는 다른 주한미군의 역할을 생각하면서 전략적으로 접근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기 때문에 분담금에 대한 요구가 강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밝혔다.
'리뉴얼', '리주버네이션'이라는 추상적인 단어 속에 숨겨진 속내는 결국 '돈'의 문제다.
"미 국무부 관계자가 한 얘기는 한국은 그동안 발전해서 미국에는 없는 전국민 건강보험도 있고, 고속철도도 깔고, 사회보장제도도 발전시켰는데, 미국은 그런 성장을 못했다. 다른 나라들이 성장하고 발전하는 동안 미국은 자국민을 위해 한 것이 없다. 결국 미국 우선주의에 근거한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인데, 한국 뿐 아니라 일본, 독일을 중심으로한 유럽과도 관계를 재설정하려는 의지를 전달 받았다. 비건도 마찬가지 입장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이런 문제 의식을 명확히 전달 받은 국무부 입장은 확고해 보였다."(오신환)
이런 국무부 관료들의 태도에 기반해 나경원, 오신환 원내대표는 방위비 분담금 협상이 "힘든 협상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혹여 이번 방위비 분담금 협상에서 미국이 터무니 없는 요구를 접더라도 트럼프 정부의 '동맹'에 대한 이같은 인식이 바뀌지 않는 한 언제든 다시 불쑥 끄집어 낼 수 있는 이슈라고 오 원내대표는 우려했다.
물론 트럼프 행정부는 '50만 달러'라는 돈의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이인영 원내대표는 트럼프 행정부의 '입장'을 확인한 것과 이에 대한 '수용'은 별개의 문제라는 점을 강조했다.
"지난해는 방위비 분담금 8.3% 인상이었고, 이 역시 과거 인상분의 2배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이번엔 총액 규모에서 5배 가까운 증액을 요구한 것은 과도하고 일방적인 요구다. 한미동맹에 갈등을 조성하는 우려할만한 일이다. 이런 인식을 여야가 공통으로 갖고 있다는 입장을 미 의회와 행정부에 전달했다. 의회는 어느 정도 공감대가 있었는데, 아무래도 국무부는 조금 먼 느낌이었다.(...) 트럼프 정부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했으니까 우리가 거기에 맞춰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인식과 세계 전략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여야할 지는 우리 나름대로 논의를 통해 합의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이인영)
그런 점에서 이인영 원내대표는 "50억불을 다 줄 것이냐, 제가 받은 느낌은 50억불 다는 아니다"며 트럼프 정부도 '50억 달러'라는 제시 금액을 다 받겠다는 의도는 아니라고 해석했다. 일본 등 다른 동맹들에게 내밀 '계산서'도 염두에 둔 협상 카드로 보인다는 풀이다.
이들 원내대표들은 방위비 분담금 협상의 '카드'로 주한미군 철수 문제를 연계시키는 방안은 미 행정부와 의회 모두에서 "바람직하지 않다"는 입장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앞서 <조선일보>는 외교 소식통을 인용해 한국이 방위비 분담금 요구를 수용하지 않을 경우 주한미군 일부를 철수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에스퍼 미 국방장관을 포함해 트럼프 행정부 내에서 이에 대해 "가짜 뉴스"라며 "기사를 철회하라"는 반박이 나왔다. 때마침 방한 중인 원내대표들도 이를 재확인했다.
한편, 방미 당일 아침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의 단식농성 소식을 듣게 된 나경원 원내대표는 일정을 일부 취소하고 빨리 귀국하기로 했기 때문에 사전 양해를 구하고 기자간담회 중간에 자리를 떴다. 나경원 원내대표는 일정을 하루 앞당겨 23일 새벽에 귀국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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