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CEP(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 알셉)이 타결되었는지 아닌지를 필자가 계속 따지는 이유는 잘못된 협상을 바로잡을 기회, 특히 농업 팔아서 제조업에 떠다주는 잘못된 FTA 정책을 바로 잡을 기회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타결되었다고 하는 순간 이런 기회가 날아간다. 통상관료들도 이걸 노리고 자꾸 타결이라는 용어를 무리하게 동원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필자의 <프레시안> 기고 "RCEP, 타결인가, 연내 타결 무산인가?" 후 여러 언론에서 RCEP 타결이 맞는지 다루었지만,(SBS CNBC 오늘의 키워드 한국 언론만 'RCEP 타결' 보도…실상은 가짜뉴스다?, 연합뉴스 팩트체크 "RCEP협정문 타결됐다"는 정부…'타결' 표현 적절했나?, 경향신문 정리뉴스 세계 최대 FTA 'RCEP', 정말 '타결'된 거 맞나요?, KBS '김경래의 최강시사' 유명희 "RCEP 타결 효과? 거대 경제블록 새 기회 만들 것") 통상교섭본부는 "협정문 타결"이 맞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이 문제가 불거진 후 문재인 대통령은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15개국간 타결"이라고 했던 표현을 "15개국간 협정문 타결"이란 취지로 수정했다.
"협정문 타결"이라는 꼼수
조약은 문서로만 가능하다. 개인들이야 구두로 약속할 수 있지만, 국가들끼리는 그렇게 못한다. '조약의 조약'으로 불리는 '조약법에 관한 비엔나 협약 (Vienna Convention on the Law of Treaties)'은 서면 형식으로 체결된 국제적 합의를 조약으로 못박는다(제2조 제1항(a)). 따라서 조약의 체결은 조약문을 채택하는 과정을 말하고, 조약문의 타결은 곧 조약의 타결이다.(조약문을 승인하기 위한 서명 절차와 조약에 기속되겠다는 최종 의사표시인 비준 절차는 타결 이후에 진행된다.) 알셉이나 FTA와 같은 통상조약의 경우 조약문은 협정문을 말한다. 따라서, 알셉에 대해 "협정문 타결"이란 말은 "협상 타결"을 의미한다. "협정문 타결"이 따로 있고, "협상 타결"이 따로 있지 않다는 말이다. 그래서 정부의 "협정문 타결"은 꼼수다.
유명희 통상교섭본부장은 알셉 정상선언문에 협정문 타결이란 표현이 나온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정상선언문은 이렇게 되어 있고,
"We noted 15 RCEP Participating Countries have concluded text-based negotiations for all 20 chapters and essentially all their market access issues; and tasked legal scrubbing by them to commence for signing in 2020."
통상교섭본부는 이렇게 번역했다.
"우리는 15개 RCEP 참여국이 모든 20개 챕터*에 대한 협정문 협상을 타결하고, 모든 시장개방 쟁점을 실질적으로 타결했다는 것에 주목하는 한편, 2020년 서명을 위해 법률검토를 개시하는 것을 과제로 설정하였다."
통상교섭본부의 번역 "협정문 협상을 타결"은 원문 "concluded text-based negotiation"을 잘못 번역한 것이다. "협정문 협상을 타결"한 것이 아니라 "협정문안 중심의 협상을 종료"한 것이다. "협정문안 중심의 협상"이란 조문 중심의 협상 또는 통상협정문안을 놓고 하는 분과별 협상을 말한다. 정부는 "concluded"이란 표현이 나온다고 "타결"이 맞다고 주장하는데, 조약법에 관한 비엔나 협약에는 타결이란 말은 없고, 체결을 의미하는 "conclusion"이 있을 뿐이다. 우리 법률에도 조약이나 통상협정의 타결이란 용어가 아예 없다. 위 정상선언문에서 "concluded"는 체결이나 타결(좁은 의미의 체결)을 뜻하는 게 아니라, 그냥 조문 중심의 논의 또는 분과별 협상이 마무리되었다는 말이다.
"협정문 타결"이 꼼수인 점은 정상선언문에서 시장개방 쟁점이 아직 다 합의되지 않았다는 대목에서도 드러난다. 보통 FTA 협정문은 분야별로 구분된 장(chapter)을 기본으로, 부속서한, 부속서, 양허표, 양해각서, 의정서 등 여러 종류의 문서들로 구성된다. 이것들은 모두 협정문의 불가분의 일체를 구성한다고 협정문에 명시해 둔다. 시장개방 쟁점은 상품 관세의 경우 양허표에서, 서비스 개방 조건의 경우 부속서에서 다룬다. 양허표나 부속서의 협상이 아직 남아 있다면(더구나 인도가 빠진 상태라면), 협정문이 완성되었다고 하기 어렵다.(여기서 또 하나 주목할 지점은 정상선언문에는 "market access issues"라고 한 부분은 우리 정부는 "상품·서비스·투자 시장개방 협상"라고 옮긴 대목이다. 상품 관세 외에도 서비스와 투자 분야의 시장 개방과 비합치 조치등에 관한 협상이 아직 진행 중임을 말한다.)
조문 중심의 협상은 끝났더라도 후속 협상을 협정문에 반영하는 방법은 여러가지다. 장별로 나눈 협정문 본문을 건드리지 않고, 부속서한이나 의정서를 통해 협정 내용을 바꿀 수 있다(한미 FTA는 2018년 9월 24일에 서명한 의정서를 통해 본 협정문을 수정했다). 따라서, 시장개방 쟁점이 남아 있다면, "협정문 타결"이란 표현도 잘못되었다.
연내 타결 실패가 더 정확한 평가인 이유
11월 4일 RCEP 협상 15개국 정상들이 모여서 대부분의 쟁점에 합의했고 내년 초에 서명한다고 했으니 타결되었다고 해도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RCEP 협상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이라면 그렇게 생각하지 못한다. 인도가 빠지면서 내년 초 서명이 가능할지도 의문이 든다. 필자는 2012년 알셉 협상이 개시된 직후 알셉 협상국들의 시민단체들과 전문가들이 만든 메일링 그룹을 통해 알셉 협상을 계속 추적해 왔다. 올해에는 타결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서 호주 멜브런에서 열리는 협상장에 가서 상황을 살피기도 했다. 하지만 연내 타결은 쉽지 않아 보였다. 우리 정부가 "타결" 소식을 전하던 11월 4일 저녁 무렵까지도 알셉 타결이 올해에도 무산되었다는 것이 우리 그룹의 공통된 평가였다. 해외 언론들도 마찬가지였고, 다른 나라 정부도 이런 입장을 냈다.
이번 공동성명에 가장 우호적인 호주 정부의 공식 논평은 11월 4일 정상선언을 조속한 RCEP 타결을 위한 합의(Australia welcomes agreement to finalise regional trade deal)라고 묘사한다. 일본 정부는 11월 8일 언론 브리핑에서 "RCEP이 … 이번에는 타결되지 않았지만(今回妥結はしませんでしたけれども)"이라고 하여 연내 타결 불발을 재확인하고 있다. 이런 평가는 그 동안의 RCEP 정상선언과 각료회의 결정들을 보면 자연스럽다.
2017년 제1차 정상 공동선언문 제8항: 우리는 통상장관과 협상팀에게 노력을 배가하여 2018년에는 RCEP을 타결하도록 지시한다( We hereby instruct our Ministers and negotiators to intensify efforts in 2018 to bring the RCEP negotiations to conclusion.)
2018년 11월 14일 싱가포르 2차 RCEP 정상회담에서 채택된 제2차 정상 공동선언문: 2018년 협상에서 상당한 진전이 있었음을 환영하면서 협상이 막바지로 진전되었다고 평가하고, RCEP을 2019년에 체결[타결]하기로 결정했다( We are determined to conclude a modern, comprehensive, high quality, and mutually beneficial RCEP in 2019)며 2019년을 협상 체결/타결 시점으로 명시했다.
2019년 9월 8일 방콕에서 열린 각료회의: 9월 8일 방콕에 모인 RCEP 협상국의 장관들은 세계 최대 규모의 통상 블록을 올해 말(2019년 말)까지 체결/타결하기로 결정했다(Economic ministers from countries participating in negotiations for the Regional Comprehensive Economic Partnership (RCEP) gathered in Bangkok on 8 September determined to conclude the world’s largest trading bloc by the end of the year).
외교 전략 부재 또는 실패
"협정문 타결"도 문제인데, 산업통상자원부는 한 술 더 떠 "협상 타결"을 공식화하고 나섰다. 산업통상자원부가 운영하는 우리 정부 공식 FTA 웹 사이트에는 알셉을 "서명/타결국가"로 분류해 놓았고, 알셉 일지에 "2019. 11. 04. RCEP 타결 선언"이라고 써 놓았다.
이건 표현의 과장에 그치지 않는다. 인도를 대 놓고 들어오지 말라는 것과 같다. 지금까지 합의한 걸로는 못 들어가겠다는 게 인도 정부의 공식 입장인데 한국 정부가 이미 협상이 타결되었다고 선언해 버리면 인도는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지금 알셉 협상국들의 최대 관심사는 인도다. 그것도 인도의 참여다. 올해 여름 중국 정부가 인도를 빼고 가자며, 각국 정부 대표단에 동의 여부를 타진한 바 있다. 필자가 알기로 동의해 준 곳이 없다. 인도도 전혀 주눅들지 않았다. 협상장에서 오히려 더 당당했고, 인도 협상단이 실제로 관철시킨 내용도 많았다(이런 점만 봐도 RCEP이 중국 주도 FTA라는 평가는 잘못이다). 대부분이 인도의 참여를 원하고, 우리 정부도 그런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렇다면 외교전략상 타결이란 표현은 자제하는 것이 맞다. 그런데도 대통령비서실장까지 나서서 RCEP 타결을 공식화하는데, 이건 심각한 외교전략 실패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2가지다. 첫째, FTA 비밀주의 때문이다. 알셉과 같은 FTA 협상은 통상 관료들이 정보를 틀어쥔채 비밀주의, 밀행주의로 일관한다. 어떤 내용이 어떻게 협상되고 있는지 자기들만 알고 있다. 국회 보고도 형식적이고, 법률에 따라 구성된 민간자문위원회에도 제대로 된 정보는 주지 않는다. 이러니 통상 관료들이 사실과 다른 얘기를 해도 그대로 믿는 수밖에 없다(그래도 청와대마저 이럴 줄은 몰랐다). 이 비밀주의가 얼마나 심한지, 뉴질랜드 통상장관과 태국 통상장관이 공개적으로 언급한 알셉 협상 내용(ISDS가 포함되지 않았다는 협상 내용)도 한국 정부는 알려줄 수 없다고 버틴다.
알셉 협상 내용이 통상 관료들의 민감한 사생활 정보라도 되나? 비밀로 감춰야 정보 독점을 통한 권력 행사가 가능하기 때문이리라. 둘째, 통상 관료들의 성과주의다. 여태껏 FTA의 효과는 통상 관료들이 예측하고 평가해 왔다. 자기들이 한 업무를 자기들이 평가하는 그야말로 자화자찬식 평가다. 그리고 통상 관료들은 내용이야 어떻게 되든 협정이 타결되면 그 자체로 성과로 인정받는다. 이런 성과주의가 "협정문 타결"이라는 꼼수를 부리게 만든 것이다.
농업 팔아서 제조업에 퍼주는 FTA 협상은 이제 그만해야
이번에 인도가 알셉에서 빠진 가장 큰 이유는 자국 농민과 노동자 때문이다. 우리도 인도의 이런 결정에서 배워야 한다. 우리 통상 관료들은 농업 팔아서 제조업에 떠다 안겨주는 FTA 정책을 수십년 이어오고 있지만, 이젠 그만 둘 때도 되었다. 미국이나 유럽 국가들도 농업을 이렇게 팽개치는 통상 정책을 구사하지는 않는다.
알셉 협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상품과 서비스 분야 시장개방은 통상관료들이 임의로 정할 사안이 아니다. 지금이라도 이해당사자들을 찾아가 의견을 들어야 한다. 내년 2월 서명이 목표라면 그 전에 농민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최대한 제공하고 이들의 의사를 반영하는 협상을 계속 해야 한다. 통상교섭본부는 자기들 머릿속에 있는 ‘주관적 국익’을 중심으로 협상하라고 만든 조직이 아니다. 농민들의 이해와 의사를 외국과의 협상에서 관철하라고 통상교섭본부를 행정기관으로 두는 것이다. 시장개방으로 당장 생계가 왔다갔다하는 이해당사자들의 의견을 국제무대에서 반영할 역량이 없다면 그런 통상조직은 없애야 한다.
통상협상의 진행에 중대한 변화가 생긴 경우 정부는 국회에 즉시 보고할 의무가 있다(통상조약법 제10조 제2항 제3호). 이번 알셉 정상선언이 여기에 해당한다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보고를 하지 않는 정부나 보고하라고 요구하지 않는 국회 모두 잘못이 크다. 국회는 지금이라도 보고를 받고 그 동안 국내 이해당사자의 의견을 어떻게 들었고, 이를 협상에 어떻게 반영했는지 따진 다음, 잘못이 있으면 바로 잡는 역할을 해야 한다.
우리 헌법 제123조는 농업과 어업을 보호, 육성할 의무가 국가에게 있다고 명시한다. 그리고 농수산물의 수급균형과 유통구조의 개선에 노력하여 가격안정을 도모함으로써 농·어민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도 국가의 의무로 못박고 있다. 이 헌법상의 의무를 통상조약의 이행을 이유로 훼손하지 못하도록 통상조약법이 재확인하고 있다(제19조). 통상조약법의 이 조항은 한미 FTA 비준 과정에서 만든 것으로 필자도 조문 작업에 참여했다. 알셉 협상 과정에서 우리 정부가 이 법률과 헌법 조항을 준수했는지를 따지는 건 너무나 당연하다.
일본산 불매운동하는데 일본산 들여오자는 FTA를 하다니
지난 기고에서 이미 지적했듯이, 알셉이 세계 최대 규모의 메가 FTA라고 해서 우리에게 새로운 시장이 활짝 열린다는 정부의 홍보는 지나친 과장이다. FTA는 규모가 클 수록 해외 시장에서 경쟁은 심해지고 그만큼 FTA 효과는 반감된다. 알셉의 경우 16개국 경쟁이 기본 모델이다. 규모가 클수록 좋다면 가장 좋은 메가 FTA는 바로 WTO다. FTA는 WTO의 예외를 양자간에 만들자는 것이기 때문이 규모가 커서 좋다는 정부는 홍보는 그 자체로 모순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일본을 제외한 모든 알셉 국가와 FTA를 맺었기 때문에 새로운 기회는 일본과의 관계에서 가장 크다. 문재인 정부 임기 반환점에 실시한 MBC 여론조사에 따르면, 일본 불매운동에 참여한다는 응답이 77.6%로, 8월 조사 때와 비슷한 수치를 보였다고 한다. 불매운동 열기가 한창인데, 일본과 FTA를 해서 무슨 새로운 기회를 만들자는 것인가?
정부는 알셉에서 16개국에 대한 통합 원산지 기준을 만들었기 때문에, 기업의 FTA 편의성이 제고되고 중소기업의 FTA 활용에 큰 도움이 된다고 한다. 하지만, 수출 기업으로서는 관세가 알셉이 유리한지, 개별 FTA가 유리한지를 따져야 하는 관문이 하나 더 생긴 셈이다. 예를 들어 베트남에 수출하는 기업은 한-베트남 FTA에 따른 관세, 한-아세안 FTA에 따른 관세, 알셉에 따른 관세 중 어디가 유리한지를 보고 그에 맞는 원산지 규정을 따라야 한다. 마치 기존 FTA는 볼 필요없이 알셉의 원산지 규정만으로 다 해결될 것처럼 홍보하는 것은 사실관계에도 맞지 않다.
다시 한번 촉구한다. 정부는 그 동안의 협상 과정을 국회에 보고하고 국내 이해당사자들에게 성실하게 설명해야 한다. 우리 사회 구성원 중 누구의 이해를 어떻게 반영하는 협상을 했는지, 그것이 국민이 위임한 조약체결권을 헌법과 법률에 따라 행사한 것인지 검증을 받은 다음에 알셉 협상의 타결 절차를 밟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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