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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한국어교사 하윤씨의 열정이 마모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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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대학 한국어교사 하윤씨의 열정이 마모되기까지

대학 사회의 또다른 유령, 한국어학당 교사 上

한국어 교육은 세계화와 한류 열풍에 힘입어 성장을 거듭해왔다. TOPIK(한국어능력시험) 응시자 수가 이를 잘 보여준다. 1997년 첫 시행 당시 TOPIK 응시자 수는 2274명이었다. 2018년 TOPIK 응시자 수는 23만 7873명이다. 한국 체류외국인 유학생 수도 꾸준히 증가해왔다. 2001년 처음 1만 명을 넘긴 외국인 유학생 수는 2018년 14만 2205명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그들을 가르치는 한국어교육 교사 대부분은 저임금에 시달린다. 수업시간에 대해서만 시급 형태로 보수가 책정되는 탓에 수업 준비, 행정 업무, 프로젝트 수행 등은 무보수 자원봉사나 다름없다. 고용형태는 계약직인 경우가 많다. <프레시안>에서는 그들의 이야기를 취재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명함이 없네요."

A대학 어학당에서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교사 최하윤(가명) 씨는 기자가 명함을 내밀자 이렇게 말했다. 박사 과정을 마치고 한 대학에서 긴 시간 학생들을 가르쳐왔지만, 하윤 씨에게는 소속을 밝혀주는 명함이 없었다.

없는 것은 명함만이 아니다. 하윤 씨는 대학 내에서 '신분'이 없다. 대학에서 가르치는 일을 하지만 교원이 아니다. 교육 외 일반 행정 업무도 하고 있지만 직원도 아니다. 권리도 없다. 급여와 노동시간, 고용형태 등은 대학의사에 따라 일방적으로 결정된다. 어학당 교사는 대학 사회에 숨어 있는 또 하나의 '유령'이다.

어학당 교사, 외국인을 가르치고 높은 학력을 요구하는 직업

하윤 씨가 어학당 교사라는 직업을 알게 된 건 대학교 2학년 때였다. 방송통신대의 직업 관련 강의 목록을 뒤지다 한국어 교사를 발견했다. 당시만 해도 한국에 외국인이 많지 않았다.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친다고? 이런 일도 있구나’ 하윤 씨는 재미있는 일이겠다고 생각했다.

좀 더 알아보니, A대학은 어학당 교사에게 관련 전공의 석사 학위를 요구했다. 대부분의 대학이 마찬가지였다. 높은 학력을 요구하는 직업이니만큼 그에 걸맞은 대우와 보람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윤 씨는 기대를 품고 석사 과정을 시작했다.

석사 과정에서 만난 교수들은 "한국어 교사의 사명감"을 강조했다. 한국어 교사는 한국을 찾은 외국인이 가장 먼저 만나는 한국인이며, 외국인에게 한국어 교사는 한국을 대표하는 상징과도 같은 사람이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하윤씨는 어학당에서 일을 하며 사명감이라는 말 이면에 숨은 속뜻을 비로소 알게 됐다. 대가가 지불되지 않는 업무에 대해 "열정노동"이 강제되면 사명감으로 참아야 했다. 대학 당국의 유령 대우에 무너지는 자존감도 사명감으로 추켜세워야 했다. 사명감은 하윤 씨를 옥죄는 족쇄였다.

▲ 한국어 수업을 듣고 있는 외국인들. 한국어 교사는 외국인 앞에 가장 먼저 서는 선생님이다. ⓒ연합뉴스

사명감과 열정노동이 모여 만들어진 대학의 한국어 교육 체계

대학에서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교육과정의 체계화는 하윤 씨와 같은 어학당 교사들의 공로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윤 씨가 일을 시작할 무렵 A대학 어학당에 갖춰진 것은 교재뿐이었다. 이를 효과적으로 실행할 교안이나 표준적인 교육과정은 사실상 없었다. 교실에 들어가 어떤 식으로 한국어를 가르칠지는 교사의 재량이었다. 좋은 교육은 교실 안에서 갑자기 튀어나오지 않는다. 좋은 교육을 위해서는 수업 시간만큼의 준비 시간이 필요했다. 보수는 수업 시간에 대해 시급 형태로 책정됐지만, 하윤 씨는 연구를 병행했다.

"초임 시절, 수업에 들어가기 전이면 한국어 모음을 어떻게 가르칠지 같은 문제를 놓고 씨름했어요. 수업이 끝나면 학생들이 오늘 수업에서 잘 받아들이지 못했다고 느껴지는 내용을 다음에는 어떻게 전달할지 고민했고요. 해보니까 교육과 연구가 따로 갈 수 없더라고요."

수업과 연구만 하는 것도 아니었다. 어학당이 외부에서 수주한 프로젝트나 수업과 무관한 행정 업무 등을 하다 보면 수업 준비 시간이 모자라 밤을 새기도 했다. 교실을 둘러싼 제도도 어학당 교사들의 보이지 않는 고민과 노동에 기대어 있기는 마찬가지다.

"일본에서 온 학생이 있었는데 한국어 배우기를 어려워하더라고요.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수업 일기를 써볼 것을 권유했어요. 처음에는 문장 하나도 못 쓰던 학생이 일기 한 편을 완벽히 써 냈고 과정이 끝났을 때는 반에서 1등을 했어요. 전자사전이 없던 때라 사비를 털어서 국어사전을 사줬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노력해준 마음이 고마워서 뭐라고 해주고 싶었어요."

당시 하윤 씨에게 돌아온 것은 "왜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느냐"는 질책이었다. 그러나 그런 노력들이 쌓여 A대학의 한국어 교육내용과 교육과정은 개선되고 발전되어 갔다.

▲ 공항에서 입국자 픽업을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 저 중 일부는 한국어 교사일 수 있다. 한국어 교사는 공항 픽업, 학생 병원 방문 등 업무를 무급으로 수행한다. ⓒ연합뉴스

유령 대우에 소진되어 가는 어학당 교사들

이렇게 하윤 씨가 사명감으로 행한 열정노동은 그에 걸맞은 대우나 보답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대학은 어학당 교사를 유령 취급했다.

대표적인 것이 소득 분류다. A대학은 하윤 씨와 같은 어학당 교사를 기타소득자로 분류했다. 기타소득은 일반적으로 프리랜서의 소득에 붙이는 명칭이다. 어학당 교사는 대학의 구성원이 아니라는 선언인 셈이다. 보통 외부 인사의 강연료, 자문료, 원고료 등이 기타소득으로 잡힌다. 신분의 부재는 하윤 씨의 생활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은행에 가도 기타 소득자라는 이유로 카드 발급이 안 돼요. 어린이집에 아이를 등록할 때는 근로소득원천징수영수증을 떼어 오라는데, 발급받는 사이트에 제 이름을 넣어도 서류가 나오지를 않더라고요. 박사 과정까지 마치고 십 수 년을 한 직장에 다녔는데, 아이에게 필요한 서류 한 장을 내 이름으로 떼어줄 수 없구나 싶어 펑펑 울었어요."

A대학은 이외에도 여러 영역에서 어학당 교사를 '없는 사람' 취급했다. 어학당 교사는 대학 도서관을 이용할 수 없었다. 교직원이나 학생에게 제공되는 윈도우, 오피스 등 컴퓨터 프로그램도 제공되지 않았다.

어학당 교사의 노동 역시 제대로 평가되지 않았다. 어학당 교사의 보수는 수업시간에 대해서만 시급 형태로 책정된다. 행정 업무, 어학당이 수주한 프로젝트 수행, 수업 준비 등에 대해서는 보수가 지불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A대학 어학당 교사의 소득은 주 20시간 강의를 기준으로 연 2000~2800만 원 수준이다. 시수가 줄어들 경우 보수도 낮아지지만, 대학은 시수 배분 관련 기준을 교사들과 협의하지도, 교사들에게 알려주지도 않았다. 시급도 일방적으로 정했다.

한국어 교사로서 사명감과 소명감을 갖고 시작한 일이 어떤 형태로도 보답 받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하윤 씨는 점점 소진되어 갔다.

▲ 한글날 기념 행사에서 이낙연 국무총리가 경축사를 하고 있다. 한국 사회는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교사들에게 합당한 대우를 하고 있을까. ⓒ연합뉴스

지금도 교실에 서면 즐겁지만

그럼에도 하윤 씨가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을 계속하는 것은 이 일이 천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윤씨는 여전히 교실에 들어서면 즐겁다고 했다.

"교실에 들어가면 즐거워요. 가르치기만 하는 게 아니라 배우기도 해요. 외국인 학생들이 쓰는 중간언어(모국어와 목표어 사이에 존재하는 언어)를 보면서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한국어를 발견하기도 하고요. 한국에서 자리 잡은 학생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일도 즐거워요."

그러나 최소한의 생활만 가능할 정도의 급여, 교원도 직원도 아닌 애매한 지위 등 대학 당국의 유령 대우는 하윤 씨의 자존감을 떨어뜨린다. 낮아진 자존감은 교실에서의 하윤 씨 열정마저 빼앗는다. 하윤 씨는 친구들이 회사의 구성원으로 인정받고 승진을 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부러웠다.

"저에게도 열정이 있었고 투철한 사명감도 있었죠.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나아지는 것은 없고 오히려 소진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소명감이라는 말에 가려져 한국어교사로서의 권리도 보장받지 못했고 법적인 보호도 제대로 받지 못했어요. 내 아이가 커서 '엄마, 나도 엄마처럼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을 하고 싶어'라고 할 때 '멋진 선택이야'라고 말해 주고 싶은데 지금은 그렇게 못할 것 같아요."

한국어교육 시장의 성장 흐름에 바탕을 두고, 교사들의 사명감과 열정에 기대어 대학의 한국어교육은 질적으로도 양적으로도 꾸준히 발전해왔다. 그러나 보답 받지 못한 교사들의 사명감과 열정은 마모되고 있다. 이대로라면 한국어교육의 질적인 성장도, 그들에게 소명으로 부여된 한국을 널리 알리는 일도 기대하기 어려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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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락

내 집은 아니어도 되니 이사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집, 잘릴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충분한 문화생활을 할 수 있는 임금과 여가를 보장하는 직장, 아니라고 생각하는 일에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나, 모든 사람이 이 정도쯤이야 쉽게 이루고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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