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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이제 주민투표 이후를 준비해야죠"

[부안주민 연쇄 인터뷰] 주민투표를 만든 사람들

"언론이 2·14 주민투표를 다룰 때 너무 현상에만 집착하고 있어요. 한국 민주주의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의미있는 일인데... 그런 의미를 짚어줘야지. 너무 한심해요."

2·14 주민투표를 앞두고 부안초등학교 강당에서 주민투표 관리위원회가 부안군민을 대상으로 준비한 '주민투표 실무교육'이 진행됐다. 강당을 가득 채운 주민투표 사무원, 참관인들과 기자들을 보면서, 환경단체에서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는 분이 던진 말이다.

고개가 끄덕여졌다. 7개월 동안 정부에 맞서 저항을 해온 주민들이 이제 '주민투표'라는 가장 민주적인 방식으로 그 갈등을 치유하는 길에 나섰다. 2·14 주민투표를 직접 만든 부안 주민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고, 2·14 주민투표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을까? 그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었다.

***"지난 7개월 동안 미쳤어요"**

"지난 7개월 동안 미쳤어요. 할 수 있는 것은 뭐든지 했습니다. 일단 서울에 있으니까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온 수많은 거짓말들과 싸웠어요. 탑골 공원에서 매주 개최하는 재경 부안인들의 집회에도 참석하고요. 지난 설날 이후에는 계속 주민투표 관리위원회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사진 1>

구세주(28) 씨는 지난 7월 핵폐기물처리장이 부안에 들어선다는 얘기를 고향의 아버지, 어머니에게 들은 후 7개월 동안 '미친 상태'로 지냈다. 전공 논문도 잠시 미뤘다. 대신 부안 주민들의 '사이버 대변인'을 자임했다.

"필명은 감춰주세요. 어떻게 알았는지 제 신상명세서가 인터넷 게시판에 돌아다니더라고요. 나도 한 '깡' 한다고 생각했는데 위협을 느낄 정도였습니다."

지난 7개월 동안 부안 대책위 게시판과 환경단체 게시판의 '사이버 대변인'을 맡아오면서 숱한 폭력에 시달려 온 구세주 씨는 필명 공개를 꺼려했다. '사이버 대변인'은 주민투표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처음에는 주민투표를 반대했습니다. 주민투표를 받아들이면, 군수가 주민들을 우롱하고 핵폐기물처리장을 유치한 것을 인정하는 셈이잖아요. 하지만 '경찰 계엄'을 지켜보면서, 더 이상 주민들의 고통이 길어져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구세주 씨는 부안 주민들의 주민투표 선언 이후, 주민투표에 작은 도움이라도 되기 위해 주민투표 관리위원회에서 궂은 일을 도맡아 했다. 그래서 개표 생방송의 2명의 리포터 중 1명으로 추천받기도 했다. (다른 1명은 문정현 신부가 맡는다.)

"지금은 주민투표하기 잘 했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아주 많은 사람이 주민투표를 성공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헌신적으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 모습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주민들이 뭉칠 수 있고, 또 그 결과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셈이잖아요. 감동의 연속이었죠."

***"주민투표 이후요?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요"**

지난 7개월 동안, 주민투표를 준비하는 동안 구세주 씨는 어떻게 변했을까?

"일단 7개월 동안 많이 늙었습니다. (웃음) 예전에는 뉴스를 보면서 '정치인들은 다 썩었어' 정도의 욕이나 하는 수준이었어요. 환경문제에도 관심만 있을 뿐 실천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지요. 7개월 동안 개인적으로 가장 큰 변화는 많은 사람들의 고통에 눈을 돌리게 됐다는 겁니다. 정치·사회 문제를 볼 때도 이주 노동자와 같은 약자의 시각에서 보게 됐고요. 농사밖에 모르던 부안 주민들이 투사가 된 것처럼 저도 그렇게 변한 것이지요."

구세주 씨는 많은 상처를 받아 독기도 올랐지만, 그만큼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긴 부안 주민들이 주민투표 이후에 더 할 일이 많다고 강조했다.

"주민투표 이후요?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요. 일단 김종규 군수 소환 운동을 전개해야지요. 구속자 석방 운동도 해야 하고, 정부에게 손해 배상 청구도 해야 합니다. 더 크게는 '부안의 미래'를 만드는 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대책위를 중심으로 공동체의 상처를 치유하면서 '생명·평화 부안'을 만드는 일을 시작해야지요. 핵 개발주의자들이 얘기하는 발전과 다른 식의 '환경 도시·문화 도시'를 부안에서 만드는 일을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예전에는 구심점이 없었는데 이번 싸움을 계기로 구심점이 생겼잖아요?"

구세주 씨는 그런 '부안의 미래'를 자기 삶과 겹쳐서 펼쳐보였다.

"사실 중학교 이후에 부안을 떠나서 꼭 부안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생각이 없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일단 논문을 쓰고 (웃음) 취직을 해 경험을 쌓은 다음에는 부안에 내려와서 책방이나 공부방을 운영하면서 '부안의 미래'와 함께 하고 싶습니다."

***"'안타까움' 때문에 주민투표에 동참했습니다"**

"처음에는 주민투표를 꼭 해야한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작년에 등교거부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지요. 하지만 주민들의 고통이 계속 가중되고 있는 상황에서 주민투표가 최선의 해결 방법이라면, 기왕에 할 것이라면 잘해내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처음엔 홍보도 잘 안 되고 모든 게 부족해 보였거든요. 내가 작은 도움이라도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진 2>

부재자, 선거인명부 업무 등 주민투표를 준비하면서 가장 힘든 업무를 사실상 총괄해 온 이오철 씨(47)는 담담하게 주민투표를 준비하는데 몸 담게 된 이유를 밝혔다. 이오철 씨는 10년 전까지 교사로 재직하다 건강상의 이유로 전주를 거쳐 부안에 정착했다.

이오철 씨는 대책위에 소속돼 활동하지도 않았다. 다만 2003년에도 등교를 거부한 1만여명의 아이들이 갈 곳 없어서 방황하는 게 안타까워 일종의 대안 학교인 '반핵민주학교'를 주도했던 경험이 있다. 이번에도 이오철 씨는 안타까움 때문에 주민투표 업무를 자원했다.

"부재자, 선거인명부 업무를 보는 실무자들을 독려하고 챙기고, 부족한 부분은 보충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글쎄요. 주민투표에 대해서는 처음과 달리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주민투표를 통해서 부안 주민들의 의식이 놀랄 만큼 향상되고, 조직도 강화됐습니다. 반대 운동 할 때보다 자치 역량이 한 차원 더 상승한 셈이지요. 반면에 찬성측은 계속 자충수를 두고 있습니다."

***"뭔가라도 하지 않고는 미안해서..."**

2·14 주민투표에는 37개 투표소에 총 70개의 투표함과 70개의 기표소가 쓰인다. 애초 투표함과 기표소를 빌려주기로 했던 선거관리위원회가 대여를 거부하면서, 투표함과 기표소는 고스란히 부안 주민들의 몫이 됐다. 부안 주민들의 7개월간의 싸움의 상징 중 하나인 연단을 4번에 걸쳐 직접 제작한 강창은 씨(29)와 무대팀 5명이 다시 나설 수밖에 없었다.

<사진 3>

"누군가는 만들어야 하는데,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죠. 자재값만 3백50만원 드는데 인건비까지 더해지면 관리위원회가 감당할 수 없죠. 그래서 나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뭔가라도 하지 않고는 미안해서......"

병원에서 만난 강창은 씨는 경찰들로부터 직접 만든 연단을 지키다가 폭행을 당해, 허리를 심하게 상한 상태다. 투표함과 기표소도 물리치료를 받으면서 꼬박 6일 동안 만들었다. 직접 용접을 하느라고 얼굴에 화상을 입기도 했다. 쉬지 않고 몸을 움직인 탓인지 13일도 병원에 누워 있었다. 2·14 주민투표가 끝나면 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쉬긴요. 이제 농번기가 시작되는데 본업으로 돌아가야죠. 저만 바라보는 아버지, 어머니한테 너무 죄송해 죽겠어요. 부모님도 반대하시니 망정이지 눈총이 장난 아닙니다."

강창은 씨는 지난 7개월 동안 많은 인연을 만든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다.

"그냥 농사만 지었으면 못 만났을 좋은 이웃들과 사람들을 너무 많이 만났습니다. 그런 사람들과 같이 뭔가를 해냈다는 생각에 뿌듯하기만 합니다. 단 결혼해야 하는데, 결혼할 좋은 인연을 못 만난 게 아쉽네요. (웃음)"

***부안 주민들의 새로운 화두, '부안의 미래'**

이오철 씨와 강창은 씨도 구세주 씨와 마찬가지로 주민투표 이후 '부안의 미래'를 고민하고 있었다.

"주민투표를 승리한 이후, 다시 그 이전과 같은 '반핵 운동'으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주민들이 '생명·평화·자치'를 지향하는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야지요. 지역 자치는 '시대의 화두'라고 생각합니다. 서울 중심의 우리나라 현실을 돌파할 수 있는 새로운 모델이 지역에서 나와야죠.

지난 7개월간의 싸움을 계기로 또 이번 주민투표를 통해서 그런 가능성이 커졌습니다. 그런 흐름이 부안에서 본격적으로 만들어질 테고, 지금과 마찬가지로 그 때도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이오철 씨와 같은 맥락에서 강창은 씨의 얘기를 들어보니 이미 그런 움직임은 부안 곳곳에서 꿈틀대고 있었다.

"주민투표 이후요? 내가 제일 아쉬운 것은 이렇게 같이 있으면 즐겁고 기쁜 좋은 사람들과 같이 일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게 무대 연단을 책임졌던 사람들끼리 작은 모임을 조직하기로 했습니다. 한 12명 되는데요. 이런저런 지역 사회의 일에 도움을 주는 사무실을 내게 될지도 모르겠네요."

2·14 주민투표를 하루 앞둔 시점에서 부안 주민들에게 '주민투표에 대한 불안감'은 없었다. 대신 그들은 '주민투표 이후' 만들어 갈 '부안의 미래'에 대한 고민으로 가득차 있었다. 주민투표를 만든 그들은, 주민투표를 통해 또 한번 바뀌었다. 부안 주민들은 이미 "한국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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