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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협정, 무엇이 문제인가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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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한일협정, 무엇이 문제인가 ①

[한일협정, 무엇이 문제인가] ①

김민웅 경희대학교 미래문명원 교수가 '한일협정, 무엇이 문제인가?'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지금 일본은 과거사 문제를 빌미로 한국에 '무역 도발'을 감행했습니다. 선전포고도 없이 사실상 '경제 전쟁'을 선언한 셈입니다. 현 상황은 매우 엄중합니다. 한일 관계에서 이른바 '1965년 체제'를 전환해야 할 시기라는 지적이 나옵니다. 이 '1965년 체제'는 비단 한일 관계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동북아 질서와 한일 문제는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1965년 체제'는 무엇인지에 대해 차분히 되새겨봐야 합니다. 그 시작점은 1965년 박정희 정권이 체결한 한일기본조약(한일협정)입니다.

김민웅 교수가 한국어와 일본어로 '한일협정은 무엇인가'에 관한 글을 문답형으로 정리했습니다. <프레시안>은 김 교수의 '한일협정, 무엇이 문제인가'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이 글이 한국과 일본의 독자들에게 널리 전달되기를 바랍니다. 편집자

오늘부터, 문답형 질문 형태로 '한일협정'과 관련해 아주 쉬운 사실부터 점차 복잡한 논의에 이르기까지의 내용을 차근차근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한일협정’은 오늘날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외교적으로 확장하는 가장 중요한 문건입니다. 이 내용과 그 해석, 논란의 지점 그리고 보다 큰 맥락의 역사를 아울러 다루어보도록 하겠습니다.

(1) '한일협정'은 언제 양국 사이에 조인 된 것인가요?

1965년입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이 1961년 5.16 쿠데타 이후 민정이양을 약속했다가 결국 이를 뒤집고 박정희 자신이 정권의 수반이 된 다음, 정치적 불안정이 계속되면서 무척 다급하게 이뤄진 조약입니다.

(1-1) "다급하게" 라니요?

한일회담의 내용이 알려지면서 국내에서는 거센 반대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굴욕적이고 매국적인 협상이라는 반발이었습니다. 그러자 박정희 정권은 1964년 6월 3일,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군까지 동원해서 반대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했습니다.

이듬해 1965년 6월 22일 조인한 뒤, 국회에서는 8월 14일 공화당 1당과 무소속 2명을 구색으로 껴 맞춰 야당이 총사퇴 결의를 하고 불참한 가운데 내용 검토의 시간도 충분히 갖지 않은 채 일방적 비준을 강행한 것입니다.

▲1965년 한일협정 조인식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디지털 아카이브
▲1965년 한일협정 반대 성토대회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디지털 아카이브
▲1965년 한일협정 반대 시위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디지털 아카이브

(2) '한일협정'을 위한 회담 언제부터 시작한 건가요?

1951년도부터 공식 논의가 시작됩니다. 1차 회담은 1952년입니다. 1965년 7차 회담으로 협정이 조인되었으니 무려 14년 동안 진행한 회담이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1948년부터 일본과 배상문제를 정리할 준비를 합니다. 식민지 피해, 전쟁피해와 관련한 배상요구가 핵심이었습니다. 1948년은 한국이 1945년 해방 후 미군정의 지배에서 벗어나 정부를 수립한 해였기 때문에 이런 준비가 가능했습니다.

일본은 7년 동안 미군정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1948년은 일본 정부가 세워지기 전이라 한일회담은 불가능했습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과 일본의 전후(戰後)처리를 위한 1951년 9월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講和條約)”이 있고서야 비로소 일본은 주권을 회복할 수 있게 됩니다.

1951년 한일회담은 이렇게 한국과 일본의 정부와 정부 차원이 생겨난 시점에서 시동(始動)을 걸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 1951년 한일회담은 한국보다 일본이 좀 늦게 정부로서 기능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2-1) “강화조약”은 전쟁을 치룬 나라끼리 평화적 관계로 들어가기 위한 회담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한국도 일본에 전쟁에 해당하는 무장독립투쟁을 했는데,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회의에 참여했나요?

아닙니다. 하지 못했습니다. 미국은 애초 한국의 참가에 긍정적이었으나 영국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영국에게 언젠가 반드시 따져 물어야 할 바입니다. 특히 패전국의 입장에 있던 일본이 적극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당시 일본의 요시다(吉田茂)) 수상은 “만일 한국이 조약 서명국이 된다면 100만의 재일 조선인들을 연합국민으로 취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은 경제적 부담으로 난처한 지경에 빠지게 될 뿐만 아니라 재일조선인의 대다수는 공산주의자이다. 이들에게 조약의 재산상 이익을 주는 것은 곤란하다.“라고 주장했습니다.

미국은 결국 일본의 편에서 입장을 바꿔 1951년 5월 경, 한국을 제외하는 쪽으로 방향을 굳혔습니다. 일본을 냉전의 아시아 방어선으로 확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일본의 부담을 줄여야 한다는 방침이 선 것입니다. 한국인들의 희생을 댓가로 말이지요.

(2-2) 한국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서명 작업에 참여하지 못한 결과 뭐가 문제가 된 것인가요?

임시정부는 1941년 아시아-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대일선전포고(對日宣戰布告)를 합니다. 일본을 상대로 한 교전국(交戰國)의 위치에 있게 된 것입니다. 동시에 연합군의 일원이 될 기회가 생겨난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오랫동안 독립투쟁을 한 것도 일본과의 전쟁 당사자라는 국제법적 위상을 인정받는 근거입니다.

이렇게 될 경우, 한국은 일본에 대해 교전국, 또는 승전국의 입장에서 전쟁배상 문제를 논의하고 배상요구를 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됩니다. 대단히 중대한 사안이었습니다.

이 길이 막힌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길고 고통스러운 한일회담의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계속)

[韓日協定、何が問題なのか]

今から〈韓日協定の何が問題なのか?〉シリーズを始めます。
とても優しい問答形式にして、少しずつ複雑な論議に至る内容を順々に丁寧にお知らせしたいと思います。

〈韓日協定〉は、今日韓国と日本の関係を外交的に発展させるための最も重要な文書です。
この内容とその解釈、論議の視点そしてより大きな脈絡の歴史を合わせて見つめてみようと思います。

(1)〈韓日協定〉はいつ両国間で調印されたのですか?
1965年です。
当時の朴正煕(パクチョンフィ)政権が1961年5.16クーデター以降軍政から民政移譲を約束していたのに結局はこれを覆して、朴正煕(パクチョンフィ)自身が政権の首班になった後、政治的不安定が続く中、かなり切羽詰まった状況で結ばれた条約です。

(1-1)"切羽詰まる"とは?
韓日会談の内容が広がるにつれ、国内では激しい反日運動が起こりました。屈辱的で売国的な交渉というものでした。すると朴正煕(パクチョンフィ)政権は1964年6月3日、非常戒厳令を宣布して、軍まで動員して反対運動を武力で鎮圧しました。
翌年1965年6月22日調印された後、国会では8月14日共和党 1党と無所属2名を抱き込んで、野党が総辞職の決意をして不参加の中、内容検討の時間も充分に無いままに一方的に批准を強行したものでした。

<韓日協定、何が問題なのか?> 2

(2) <韓日協定>のための会談はいつから始まったのですか?

1951年度から公式論議が始まります。

1次会談は1952年です。
1965年7次会談で協定が調印されるまで、なんと14年の間進められてきた会談でした。

韓国は1948年から日本と賠償問題を整理するための準備をします。

植民地被害、戦争被害と関連した賠償要求が核心でした。1948年は韓国が1945年解放後、米軍政の支配から逃れ政府を樹立した年であったため、このような準備が可能でした。

日本は7年の間米軍政の支配下であったので、
1948年は日本政府が樹立される前だったことから韓日会談は不可能なことだったのです。

アメリカを中心とした連合軍と日本の戦後処理の為の1951年9月の"サンフラシスコ講和条約"
が結ばれたことにより、ようやく日本は主権を回復することが出来たのです。

1951年 韓日会談はこのように韓国よりも日本が少し遅く政府として機能し始めてから始まりました。

(2-1) “講和条約”は戦争を起こした国どうし平和的関係を築く為の会談であると知られています。
韓国も日本に戦争に該当する武装独立運動をしたのですが、サンフランシスコ講和条約の会議に参加しましたか?

いいえ、参加できませんでした。

アメリカは当初韓国の参加に肯定的であったのですが、イギリスはそうではなかったのです。
イギリスにはいつか必ず問いただしたいところです。特に敗戦国の立場にあった日本は露骨に反対していました。

当時日本の吉田茂首相は"万一韓国が条約の署名国になるとしたら100万の在日朝鮮人を連合国民として扱わないといけない。日本は経済的負担で困難な状況になるだけではなく、在日朝鮮人の大多数は共産主義者だ。この者たちに条約の財産上の利益を与えるのは困難なことだ。"と主張しました。

アメリカは結局日本よりに立場を変え、
1951年5月頃韓国を排除する方向に舵を切りました。日本を冷戦のアジア防御線に確定したためでした。日本の負担を減らさないといけないという方針に立ったのです。韓国人たちを犠牲の対価としてです。

(2-2) 韓国がサンフランシスコ講和条約の署名作業に参加できない結果、何が問題になったのですか?

臨時政府は1941年アジア太平洋戦争が起きると対日宣戦布告をします。
日本を相手にした交戦国の位置に立ったのです。同時に連合軍の一員になる機会が生まれたのです。それじゃなくても長い間独立闘争をしたことも日本との戦争当事者という国際法的位相を認められた根拠です。

このような場合、
韓国は日本に対して交戦国、または戦勝国の立場で戦争賠償問題を論議して賠償要求が出来る位置に立つことが出来るのです。
とても重大な事案でした。

この道が途絶えたのです。
ここからは長く苦しい韓日会談の歴史が始まるのです。

(번역 : 재일교포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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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웅

미국 진보사학의 메카인 유니온신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동화독법>, <잡설>, <보이지 않는 식민지> 등 다수의 책을 쓰고 번역 했다. 프레시안 창간 때부터 국제·사회 이슈에 대한 연재를 꾸준히 진행해 온 프레시안 대표 필자 중 하나다.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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