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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파병과 베트남 파병, '붕어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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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이라크 파병과 베트남 파병, '붕어빵'

비전투병 파병후 전투병, 5천 전사-1만6천 부상-고엽제환자 5만

미국이 일방적으로 일으킨 이라크 전쟁은 점점 과거 60년대의 '베트남전'을 닮아가고 있다. 신속하게 끝낼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주요전투 종료를 선언한 5월1일 이후 미군의 사망자 수는 전쟁 중 기록한 1백38명을 넘은 1백55명을 기록하고 있으며 부상자는 6천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13만5천명의 미군을 주둔시키며 매달 40억 달러의 주둔비와 10억 달러의 전후 복구비를 투입하면서 이라크 게릴라와 테러와의 싸움에 고전하고 있는 미국은 급기야 10여개 동맹국들에게 파병을 요청하고 나섰다. 우리나라도 지난 4월 6백57명의 비전투요원 서희(공병지원).제마(의료) 부대를 파병한 데 이어 다시 최소한 3천명 많게는 1만명의 전투요원 파병을 공식 요청받은 상태다.

일각에서는 이라크가 안정되기까지 최소 2~3년, 길게는 10년이 걸릴지 모른다며 '제2의 베트남전'에 우리가 휘말려드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실제로 베트남전에 우리나라가 휘말려 들어가던 과정과, 지금 이라크전에 휘말려 들어가는 과정은 '붕어빵'처럼 너무나 흡사하다.

***미군의 이라크 주둔비와 베트남 전비액수 동일**

지금도 미국민들에게 악몽으로 기억되고 있는 베트남전쟁에서 미국은 연인원 2백60만명의 병력을 파견하였고, 베트남에 주둔한 미군이 54만 9천5백명에 이른 적도 있다. 미국 이외의 참전국 군대의 병력은 가장 많을 때 6만 명을 넘어섰다.

미국이 베트남에 최초로 군사고문단을 파견한 것은 식민지 프랑스가 베트남전쟁을 수행하던 1950년으로서, 그때 25명을 보냈었다. 그러나 그후 고문단 규모는 점차 증가되어 1961년 3천 2백명, 1962년 4천명, 1963년 1만 7천명에 이르렀다.

베트남에서의 철수를 검토하면서 미 군수자본의 눈밖에 난 케네디 대통령이 의문의 암살을 당한 뒤 대통령에 취임한 존슨 대통령은 케네디의 노선과 정반대로 본격적으로 베트남전에 뛰어들어 지상군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미국은 지상군을 파견 1965년 말 월남에서 미군병력은 18만명으로, 그리고 1년 뒤인 1966년 말에는 48만 5천명으로 증가했다. 하지만 단기간 내에 승리를 거두지는 못하고 오히려 월맹의 지구전 전략에 말려들어 고전하다가 1973년 휴전협정 형식을 빌어 패퇴하기에 이르렀다.

이 기간중 미국측 전쟁 희생자는 전사자는 5만7천9백39명, 부상자 75만 2천명에 달했다.

전비도 엄청났다. 당시 미국은 7만발의 총알을 쏘아 월맹군 1명을 죽일 정도로 이라크전에 버금가는 무지막지한 물량공세를 펼쳤다. 그 결과 베트남전에서 미국은 현재 가치로 환산할 때 4천9백40억달러(당시 1천1백억달러)를 썼다. 월별로 나누면 51억5천만달러로 지금 미군의 이라크 주둔.유지 비용과 같다.

***베트남전때도 비전투병부터 파병**

우리나라는 1964년 7월18일부터 1973년 3월 23일까지 8년8개월간 베트남전에 참가했다.

우리나라가 베트남전에 참여하는 과정은 이라크전 참전과정과 너무나 흡사하다.

1964년 5월9일 미국정부는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베트남전 파병을 요청했다. 미 군수자본의 이해를 반영해 베트남전 확전을 결정한 존슨 대통령의 결정 때문이었다. 하지만 국제사회의 반응은 지금과 같이 냉랭했다. 당시 미국은 25개국에 참전요청을 했으나, 참전하겠다고 응한 나라는 참전대가로 보상을 약속받은 우리나라 등 7개국에 불과했다.

미국정부의 파병요청에 있은 뒤 1964년 7월15일 베트남 정부의 공식적 지원 요청이라는 요식행위를 거쳐, 국회는 그해 7월31일 제44회 임시국회를 열어 베트남참전안을 가결 통과시켰다.

베트남전 1차 파병은 여론을 의식해 64년 군의료진 1백30명과 태권도 교관단 10명 등 '비전투요원'으로 이뤄졌다. 1차 파병을 포함해 베트남전 파병동의안은 모두 5차례 국회에 제출됐다. 65년의 2차 파병은 2천명 규모의 의료.공병부대(비둘기부대)였다. 같은 해의 3차 파병은 비둘기부대 병력 보강을 위한 1개 중대 규모였다.

베트남전의 늪에 빠져드는 과정은 마치 지난 4월 이라크에 6백37명의 비전투병력인 의료-공병부대를 보낸 것과 유사했던 것이다.

본격적인 '전투병 파병'은 4차 때부터 이뤄졌다.

정부는 65년 4차 파병 때 해병대 제2여단(청룡부대), 육군 수도사단(맹호부대)을 투입하며 본격적으로 베트남전에 뛰어들었다. 명분은 역시 지금 이라크전때와 비슷한 '전세계 자유 수호'였다. 66년 육군 9사단(백마부대)와 1개 연대 전투병력을 증파한 5차 파병을 마지막으로 더이상의 추가병력 파병은 없이, 그후에는 병력을 교체만 했다.

***전사자 5천, 부상자 1만6천, 고엽제 환자 5만**

당시 월남전 파병결정의 근원은 '돈'이었다. 베트남 파병을 계기로 참전 기간 중 약 10억달러라는 당시로는 엄청난 외화를 벌어들일 수 있었다. 군사적으로는 군사장비 현대화를 이루었다.

1966년 3월4일 발표된 브라운(Brown)각서에서 미국의 한국군 파병의 대가로 '경제적'으로는 베트남에 건설사업 참여, 수출장려 및 기술원조 증가, 경제개발 차관 제공, 경부고속도로 건설지원을 약속했다. '군사적'으로는 한국군의 현대화 장비지급, 참전 한국군의 일체의 경비부담, 해외참전 전투 수당지급을 약속했다. 당시 미국이 지급한 우리나라 사병들의 전투수당은 월 43~56달러였다.

이같은 과정을 거쳐 8년 8개월간의 베트남전 기간에 우리나라는 3개 전투사단과 지원병력을 포함해 5만명, 연인원 32만명에 달하는 전투병력을 파병했다. 하지만 그 희생은 너무 컸다. 우리측 희생자 규모는 전사자 숫자 5천여명, 부상자 1만6천여명, 그리고 아직까지 미국측으로부터 보상받지 못하고 있는 고엽제 환자 5만명이었다.

이처럼 60년대 우리나라가 베트남전에 말려들어간 과정은 지금 이라크전에 말려들어가는 과정에 너무나 흡사하다. 단 한가지 차이가 있다면 이번에는 전비까지도 모두 우리 부담이라는 점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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